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러시아가 소련으로

구름위 2014. 9. 1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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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탄생(1922년)

 

 

                    소비에트 연방 결성 성명
 
제정시대의 러시아 제국은 겉으로 보아 강력한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일은 서로 다른 언어 · 관습 · 문화 등등, 여러 민족의 고유한 특성들을 폭력으로 눌러서 유지해온 통일이었다. 제국 내에 있는 각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해온 이러한 '통일'은 마땅히 타파돼야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뒤 2주 후에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동등권과 자주권, 나아가 분리독립권까지를 포함하는 각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확립하고, 모든 종류의 민족적 · 종교적 특권과 제한을 폐지했다. 그 시행의 한 예로, 1979년 12월 인민위원회는 핀란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핀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해주도록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에 제안했고, 중앙집행위는 이를 승인했다. 그루지야가 독자행동을 하는 등 다소 유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공동의 혁명투쟁과 내전 속에서 형성된 여러 민족의 통일감은 곧 국가적 통일로 성장해갔다.

 

내전이 종반으로 접어든 1920년경,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권력이 확립돼 있었다. 독일군이 진주했던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와 루마니아군이 점령한 베사라비야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러시아의 중앙부에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이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을 자치 단위로 끌어안고서 혁명국가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각기 성격이 조금씩 다른 8개의 공화국이 있었다. 8개 공화국 중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5개 국가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됐고 당시 유일하게 멘셰비키가 주도하던 그루지야는 연합국과 연대하여 소비에트 정부에 저항했으나, 1921년 2월 민중봉기가 일어난 틈을 타 붉은군대가 진주하여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다. 중앙아시아의 호레즘과 부하라에는 인민 소비에트공화국, 시베리아의 치타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돼 있었다.

 

러시아까지 9개 공화국 중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6개 공화국에서, 힘을 합쳐 간섭군과 싸우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동맹의 기운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공동투쟁 속에서 각 공화국의 군사 · 정치동맹이 형성, 강화돼가던 1920년 2월, 외교동맹이 먼저 성립됐다. 제노바에서 열린 유럽 경제회의에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에 자기네 이름으로 임의의 국가와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위임한 것이다. 1922년 4월에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6개 형제국의 이름으로 전면 군축,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의 평화 공존 · 호혜평등의 경제협력을 제안했다.

 

공화국 간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공동의 행동을 조정 · 통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조약들은 군대와 몇몇 경제 · 행정기관의 통합을 규정하고 있었다. 1922년 봄, 카프카스 산맥 너머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3국은 자카프카스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공화국을 창설하는 조약을 맺었다. 뒤이어 자카프카스 연방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단일 연방국가를 창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레닌의 제안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안이 마련됐다. 즉, 모든 공화국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의사로 연방에 가입하며, 중앙에 최고권력기관으로 연방 중앙집행위를 둔다는 안이었다.

 

1922년 12월 23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제10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 벨로루시 공화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으로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직전에 열린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스의 각 소비에트 대회도 단일 연방국가의 창설에 찬동했다. 극동공화국은 그보다 조금 앞서 미군과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후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흡수 통합됐다.

 

12월 30일 네 공화국의 대의원들이 제1차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결성이 제창되고, 선언과 동맹조약이 채택됐다. 선언문에는 "연방이 여러 민족의 자발적 통합이라는 것, 각 공화국의 자유로운 연방 탈퇴권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세워질 모든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에게 연방가입의 문호가 열려 있다는 것, 새로운 연방국가는 1917년 10월에 이미 구축된 모든 민족의 평화공존과 협력의 토대를 더욱 확고히 다져 완성했다는 것"이 명시됐다.

 

1924년 1월, 제2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1차 대회의 선언과 조약을 토대로 해서 만든 소련 헌법이 승인됐다. 1920년대 말, 중앙아시아의 3개 공화국이 소련의 연방구성 공화국으로 인정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완성됐다. 소비에트 연방은 새로이 성립되는 소비에트 공화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민족의 동등권을 확립한다는 취지하에 종래의 '러시아'라는 역사적 · 지리적 · 민족적 호칭을 버렸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그냥 '소련'으로 불리고, '러시아'는 연방 최대의 러시아 공화국과 대러시아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소련은 이후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드넓은 영토에서 사회주의를 발전시켜가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강력한 제2의 체제를 수립하여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레닌의 죽음과 스탈린의 대두(1924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을 지나는 조문 행렬
레닌은 죽기 직전 '스탈린 후계자'에 불안을 느끼고 다른 선택을 생각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을 응축시켜 몸속에 담고 있던 레닌이 죽었다.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이 겹쳐,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922년 12월 두 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명제로서, 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 문화혁명, 모든 민족의 평등우호 관계,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과 노농동맹의 강화, 대중의 창조력 중시, 당과 대중의 긴밀한 결합, 집단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등을 역설했다. 1923년 3월 사실상 폐인이 될 때까지 그는 마지막 불꽃을 사르며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계속 쏟아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열거하면서 그 성격과 장단점을 묘사하고 그를 기초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강화 등을 제안한다. 이 편지는 1년 이상 묻혀 있다가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편지 공개 시의 물의를 우려한 몇몇 지도자들의 뜻에 따라 비밀리에 일부 대의원에게만 회람됐고, 서기장 스탈린을 바꾸자는 레닌의 제안도 반트로츠키 투쟁에 밀려 조용히 거둬들여 졌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그의 '비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 대해서는, 10월혁명 때 무장봉기를 반대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나,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이를 빌미로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나 변증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의 결함을 비판하여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쥔 그가 이 권력을 늘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닌은 며칠 뒤에 편지에 추신을 붙였다.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 그보다 못하더라도, 더 참을성 있고 신실하며 동지들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레닌이 세 번째로 쓰러진 후 1923년 4월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이 말한 특징묘사를 그대로 확인시키려는 듯했다. 레닌이 편지에서 말한 핵심은 대중과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 당이 변화를 보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당의 권한이 강화되어 마침내 권력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랐고, 당의 단합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 공산당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류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세계혁명의 뒷받침 없이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신경제정책도 어디까지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자본주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므로, 그 추진과정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획화가 중시돼야 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농업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와는 별개로 행동하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다만 세계혁명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주의로 직접 이행하려 하기보다는 신경제정책을 폭넓게 발달시켜 생산력을 높이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의 최대 이론가가 됐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세계혁명의 기운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거대한 영토와 인구와 자원을 갖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1924년 말,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정리된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대였던 레닌이 쓰러진 후,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돼갔다. 그러나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여전했고, 논쟁 시의 매서운 칼날은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당 지도자들이 트로츠키의 좌익 분파주의를 비판하는 데 힘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경제정책을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곧 분파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에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반대파를 탄핵했다. 요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레닌 이후의 지도자를 공공연히 자처하는 지노비예프와 달리, 레닌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며 조용히 처신했다.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와 그 지지자들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제명하자고 했으나, 스탈린이 반대하여 제명은 면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10월에 발간된 〈10월의 교훈〉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거기서 그는 레닌의 당부를 어기고, 카메네프와 '고참 볼셰비키'가 〈4월 테제〉에 저항한 것, 10월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을 조소했다. 이것은 즉각 응수를 야기하여, 트로츠키가 레닌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옛 시절의 얘기를 포함하여 그의 '멘셰비즘'과 '농민과소평가'가 연일 신문과 집회의 비판대에 올랐다. 1925년 3월 그는 마침내 군사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됐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공방과정에서 트로츠키와 두 사람의 '과거'는 적나라하게 까발려져 대중들에게 회자됐다. 전면에 나서지 않은 스탈린은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후 몇 년 간의 당 역사는 스탈린의 권력장악 과정을 잘 보여준다. 먼저, 트로츠키 축출에 앞장섰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일국사회주의와 신경제정책의 우경화에 반기를 들었다가 우파와 손잡은 스탈린에게 패배했다. 두 사람은 1926년 이제 트로츠키와 손잡고 '좌익 반대파'를 이루어 한목소리를 내지만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세 사람은 그 후 당에서 축출됐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1929~1930년 부하린 등의 우파마저 당의 의사결정기구에서 밀려나고 스탈린은 마침내 대적할 자 없는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불투명한 세계혁명에 국가의 장래를 걸거나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틀려는 시도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비전과 그 프로그램을 제시했고, 대중들은 거기에서 매진하여 달성할 목표를 발견했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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