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구름위 2014. 9. 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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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 채택(1921년)

 

국가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내전기에 소비에트 정부는 전시비상경제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전선으로!'라는 슬로건하에 전시 동원체제가 확립됐다. 교통과 산업이 국가의 통제하에 놓였고, 이미 국유화된 대기업 외에 중소기업의 상당수가 국유화됐으며, 국가가 모든 자원과 산업을 직접 계획, 관리, 분배했다. 전시 비상경제에 10월혁명 후 점점 강화돼온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게 가미된 것이다. 이를 전시 공산주의라고 한다.

 

전시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식량징발이었다.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농민들에게서 징발한 것이다. 농민들은 자기네에게 필요한 만큼만을 빼고 나머지 잉여곡물을 국가에 바쳤다.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에는 큰 어려움 없이 식량이 조달됐다. 혁명을 수호하는 것은 대다수 농민에게도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지역을 빼고는 내전이 거의 진정된 1920년 말엽, 문제가 발생했다. 농민들이 식량징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들은 더 이상 잉여곡물을 생산하지 않으려 했고, 개중에는 남는 농산물을 숨기거나 빼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국토가 황폐해져 그렇지 않아도 충분치 않았던 농업생산이 더욱 줄어들었고, 여러 지방에서 부농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나마 전쟁 전 생산고의 40%라도 유지한 농업분야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7년간 계속된 전쟁과 내전은 러시아의 모든 산업을 마비시켜버렸다. 연료와 원료 부족으로 공업생산은 극히 부진했고, 과도한 국유화와 투기 억제책으로 상업은 거의 뿌리가 뽑혀져 있었다.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강화돼온 국가의 지나친 통제도 여러 면에서 부작용을 일으켰고, 1920년부터 시작된 대기근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러시아에는 흉년이 잦아 인민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1921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도 전해의 대기근이 한 원인이 되었다.
 
식량위기와 생필품 부족, 조업중단에 노동자들이 동요하고 지나친 국가개입에 대한 농민과 상인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1921년 2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의 요구는 상업의 자유, 식량공급 개선 등이었다.

 

3월 초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이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오랜 기간 혁명의 메카 역할을 수행해온 크론슈타트의 수병들1)은 이제 무정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소비에트의 자유선거와 모든 사회주의 정당의 동등권, 소농과 수공업에 대한 제한 철폐 등을 요구했다. 반란은 보름 만에 진압됐으나, 이 사건은 농민을 필두로 하는 소소유자와 소비에트 권력 간의 갈등이 심해졌음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혁명의 축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흔들리고 있음을 뜻했다.

 

다각도로 문제의 해결방법이 강구됐다. 농업부문에서는 소소유자인 농민의 속성을 감안, 이들에게 이윤동기를 부여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면서 농업을 점진적으로 사회화해가자는 방법이 채택됐다. 그럼으로써 소비에트 권력에서 이탈해가는 농민들을 다시 끌어들여 노농동맹도 재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 산업과 소상품생산 농업의 연결고리로서, 생산물을 팔고 사는 상업도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1921년 3월 제10차 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된 신경제정책(NEP)의 골자다.

 

신경제정책은 농업 · 공업 · 상업부문에서 사적인 영리추구를 상당 부분 인정하여 자본주의적 요소를 발전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장악한 공업시설 · 교통설비 · 은행 등 국민경제의 중추부문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켜가는 한편, 나머지 부문에서는 이윤동기를 부여하여 생산력을 끌어올리면서 점차적으로 사회주의 요소를 증진시켜간다는 데 있었다. 즉, '자본주의로 1보 후퇴하여 공산주의로 2보 전진하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하에 먼저 농업과 소규모 산업을 활성화하고, 다음으로 대규모 산업을 부흥 · 발전시키며,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준비 · 실현시켜, 사회주의의 물적 ·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단계가 설정됐다.

 

1921년 3월 21일, 그 구체적인 조치로서 농산물 징발이 현물세 납부로 바뀌었다. 농민들은 현물세를 내고 남은 농산물을 자유로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됐다. 그 후 1924년에 현물세가 금납제로 대체되면서 농민의 생산의욕은 더욱 증대되고 농산물 거래량이 크게 증가했다.

 

1921년 5월에는 상품유통을 활성화하고 주민들의 공산품 수요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소규모 산업의 국유화를 해제하고 기업의 사적소유를 인정하는 법령이 제정됐다. 사적인 거래가 허용되고, 농공 간의 직접 상품교환도 시작됐다.

 

1921년 가을에는 대규모 시장이 부활하고 무역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20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기업의 신규조직이 허용됐고, 수공업의 발전을 위한 조처가 취해졌다. 농업분야에서도 토지임대와 노동자 고용이 허용됐다.

 

소상품생산과 자유거래가 늘어나면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증가했다. 그와 더불어 상인 · 사업가 · 중개인 · 매점매석인 등의 네프만, 즉 신흥 부르주아지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이들과 그 가족의 수가 약 230만에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부농(쿨라크)의 힘이 커졌다.

 

그에 맞추어 국민경제 관리조직도 재편성됐다. 1921년 5월, 최고국민경제회의 내에 산업부문별로 16개의 본부가 창설되어, 각 지역인민위원회를 통해 산업체를 지도했다. 국가산업도 독려채산제로 바뀌었고, 급료도 화폐로 지급됐다. 화폐유통을 국가가 조절하기 위해 국립은행을 창설했고, 농민들에게 저리의 신용대부를 해주기 위해 농업은행도 개설했다.

 

신경제정책은 서유럽 국가들의 외면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시켜, 1926년에는 농업과 공업 생산력이 모두 전쟁 전의 수준을 넘어섰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각주
1 크론슈타트의 수병들: 혁명기에 활약한 수병들은 대부분 여러 전선으로 투입되고, 당시 수병들의 다수는 새로이 농촌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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