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혁명(1917년)
겨울궁전으로! 1917년 10월 26일 오전 2시경
대중의 혁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지도자는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카데츠가 참가하는 새 정부에는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권력이 평화적으로 소비에트에 넘어올 가능성이 다시 생겨났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의 지도자들에게 부르주아지와의 연대를 끊고 소비에트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즉각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평화적 발전, 노동자 계급이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백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이 비친다면, 마땅히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여전히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한다는 것은 혁명에 대한 범죄'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이제 자신들의 영향권을 벗어난 소비에트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소비에트 · 공장위원회 · 군위원회 · 노동조합의 의석 수를 삭감하고,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조직인 젬스트보와 시 두마의 대표권을 늘렸다.
9월 25일 케렌스키는 다시 카데츠와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들의 협조를 얻어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연립정부의 기반은 몹시 허약했다. 정부와 '민주협의회'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부르주아지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예비의회'라고도 부름)를 선출하여 러시아에 의회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심으려 했다.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제 소비에트를 아예 내쳐버린 것이다. 반코르닐로프 투쟁에서 고양된 대중들의 열기는 자연히 혁명적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로 집중됐다.
병사 · 농민 · 노동자들의 불만 · 분노, 지배자들에 대한 적의는 갈수록 높아갔다. 모든 것을 약속하면서도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와 부르주아지의 '연립'은 대중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그들의 눈을 뜨게 했다. 민중들은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 권력 수립의 길로 치달아갔다. 그 방법으로 무장봉기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10월 초, 레닌은 핀란드의 은신처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무장봉기의 준비를 직접 장악했다. 10월 10일과 16일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 소비에트 대회를 통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카메네프 등이 볼셰비키의 힘은 아직 미약하고 봉기는 당의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는 우려를 강력하게 표명했으나, 레닌은 그를 일축하며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며 무장봉기의 철저한 준비를 촉구했다. 봉기시점은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개최일에 맞추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10월 1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신임 의장 트로츠키의 주도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위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볼셰비키의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에 힘을 합쳤다. 이로써 무장봉기의 실행주체가 형성됐다.
임시정부는 무장봉기를 눈앞에 두고 정예부대를 전선과 수도 외곽에서 수도로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주요도시에도 정부 지지군의 압력이 증강됐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상황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군부대와 주요 전략목표에 전권대표를 파견했다. 10월 21일, 군사혁명위의 승인을 받지 않고 수비대에 내려지는 명령은 무효로 선언됐다.
반혁명파의 거점은 페트로그라드의 중심부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겨울궁전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총사령부와 해군성이 있었다. 혁명파의 사령부는 시의 동쪽 변두리 스몰니 학원이었다. 이곳에 군사혁명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노 · 병 소비에트, 볼셰비키 당중앙이 있었다.
혁명파의 주력부대는 셋이었다. 무장노동자의 적위대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시의 중심부를 포위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파 부대는 그 안쪽에서 제2의 반원을 형성했다. 서쪽에서는 군사혁명위의 요청에 따라 발트 해 함대의 군함이 네바 강 하구를 장악했다. 혁명파의 노동자와 육군과 해군은 3자 합동으로 페트로그라드 중심부를 포위, 차단하고 있다가 일시에 공격, 점령할 계획이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임시정부가 봉기를 막기 위해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10월 24일 아침, 볼셰비키의 인쇄소가 점령됐고, 정부청사와 역에 군대가 진주했으며, 네바 강의 도개교가 들어 올려졌다. 케렌스키는 특별성명서를 들고 예비의회의 연단에 올라 상황을 폭동으로 정의하고 무조건 지지를 요청했다.
노동자 적위대와 혁명파 병사와 수병들은 일전을 치를 태세를 갖추고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에게 던져진 질문 "행동할 준비는 됐는가?"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앞에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역사가 빗자루로 쓸어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가엾고 무력한 정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행해진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그날 밤, 즉각 행동이 개시됐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 장악되고, 도개교가 다시 연결됐다. 25일 저녁 때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됐다. 26일 새벽 2시,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수도의 봉기는 완료됐다.
10윌 25일 밤,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볼셰비키의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가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대의원의 구성은 볼셰비키의 완전한 승리를 확인해주었다. 60% 조금 넘는 수가 볼셰비키였고, 약 15%가 볼셰비키 쪽으로 많이 기운 좌파 사회혁명당원이었다.
10월 26일, 대회는 즉각 〈평화에 대한 포고〉를 발했다. '포고'는 전쟁을 '인류에 대한 최대의 범죄'라고 선언하고, 러시아와 전 세계 인민에게 모든 나라와 무병합 · 무배상의 공평한 조건으로 즉시 강화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했다.
대회는 이어 〈토지에 관한 포고〉를 발했다. 지주의 모든 토지가 몰수되어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주어졌다. 오래전에 성안됐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던 사회혁명당의 안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농민들은 이미 절반이 넘는 지역에서 스스로 토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다른 당파가 참여를 거부해 인민위원회는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됐다. 레닌이 인민위원회 의장이 됐고, 트로츠키는 외무,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중앙집행위 의장에는 카메네프가 선출됐으나, 며칠 뒤 스베르들로프로 교체됐다.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는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고 완료됐다. 그러나 반혁명파가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던 모스크바에서는 7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1월 3일에야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됐다.
전국에서 사회주의 혁명 승리의 행진이 시작됐다. 러시아의 각 도시에서 노동자와 병사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전보가 스몰니 학원으로 속속 날아들었다.
소비에트 대회가 파한 후, 대표들은 전국 각지로 돌아가 대회에서 채택한 포고를 널리 알리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많은 어려움과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러시아 영토 거의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됐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그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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