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름위 2014. 9. 1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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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귀국과 4월 테제(1917년)

 

 

러시아로 들어가기 위해 스톡홀름을 지나는 레닌 일행(가운데 우산 든 이가 레닌)
레닌은 4월 3일 저녁 페트로그라드에 도착,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혁명이 승리하고 차르가 물러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래로부터 막혀 있던 민중들의 에너지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사태전개에 놀라 민중들을 체제 속에 다시 가둬 넣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깨어난 민중들은 옛날처럼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지는 않았다. 민중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한에서만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따랐다.

 

민중들이 보기에, 차르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열렸음에도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지겹게도 계속되고, 굶주림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고, 토지는 농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소수민족들도 피압박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평화'와 '빵'과 '토지'와 '자유'를 갈구했다.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는 이것들을 하나도 해결해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 생각에, 전쟁은 계속돼야 했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민중일 뿐 다수의 자본가는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었고,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군의 위계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향후 세계질서의 재편을 고려해도 서유럽과 연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연합국의 제국주의자들도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전쟁 계속수행을 종용했다. 임시정부는 결국 차르가 연합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확인하고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임시정부는 대중에게 빵도 줄 수 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대중들에게 빵을 준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이윤감소를 의미했다. 그것은 전쟁이 승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재건되는 먼 훗날에나 다소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토지도 물론 줄 수 없었다.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은 권력 지지기반의 하나인 지주의 파산, 나아가 자본제적 소유의 파괴를 뜻했다. 토지의 대부분이 은행에 저당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토지문제의 해결을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루고, 제헌의회 선거는 되도록 늦추려 했다.

 

자유도 줄 수 없었다. 전제가 타도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 마당에 대중들에게 더 이상의 자유와 권리를 준다는 것은 자기네 무덤을 파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비에트를 무력화시켜 임시정부의 권력을 강화할 길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임시정부는 또한 차르 정부의 제국주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아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계속 고수했다. 지방에는 차르 정부의 기구가 그대로 유지됐다.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중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뿐이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축을 이룬 소비에트의 지도부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사실상 지지했다. 지금은 부르주아지를 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반을 튼튼히 할 때이고 인민이 권력을 잡는 사회주의 혁명은 먼 훗날의 일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타협파 사회주의자의 두 정당은 '시시비비주의'를 표방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감시하면서 잘하는 일은 지지하고 과거로 역행하려는 시도는 비판, 견제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다. 그들은 나약한 임시정부에게 소비에트의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부르주아지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전쟁문제에서도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정책을 사실상 지지했다. 일각에서는 '혁명적 조국방위론'을 주창하면서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을 수호하자고 인민들에게 호소했고, 일각에서는 '무배상 무병합' 원칙에 따른 강화추진을 제안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민중들은 스스로 이 족쇄를 풀어나갔다. 전국 각지에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의 소비에트가 만들어져 목소리를 높여갔다. 소비에트와 별개로, 병사들은 부대마다 군위원회를,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을, 농민들은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병사들과 민중들 사이에 반전기운이 더욱 높아갔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공장과 토지의 접수를 시작했다.

 

3개 사회주의 정당 중 당시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 흐름을 읽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즉각 평화 실현, 혁명의 계속 수행을 외쳤다. 그러나 3월 중순 이후 유형지에서 돌아온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당을 이끌면서 볼셰비키 내에서도 임시정부가 차르 체제의 잔재를 근절하는 동안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계속 압력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스위스에 있던 레닌은 당 중앙에 혁명 2단계로의 전화와 임시정부 반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우고 귀국을 서둘렀다. 독일 당국이 일관되게 반전을 주장한 레닌의 귀국에 협조했다. 러시아의 후방전선이 교란되는 것은 곧 독일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독일 당국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돌아왔다.

 

4월 3일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역에 도착하여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환영 나온 인파를 앞에 두고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을 보니 무척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의 일성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그냥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만세였다. 4월 4일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연이어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세칭 '4월 테제'로, 3일 후 《프라브다》 지에 그 전문이 실렸다.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2.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긴 혁명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 2단계로 이행해가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4.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5. 의회제 공화국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6.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해야 한다.
7. 모든 은행을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해야 한다.
8. 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가 통제해야 한다.
9. 당 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10.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테제를 요약하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켜 이중권력을 해소하고,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테제'는 러시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를 외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고 중상모략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플레하노프는 '4월 테제'를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연립정부와 7월시위(1971년)

 

임시정부와 민중 간의 갈등은 곧 폭발했다. 도화선이 된 것은 당시 대중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전쟁문제였다. 4월 18일(신력 5월 1일), 노동자들은 즉시 강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규모 메이데이 행사를 벌였다. 바로 그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연합국들에 보낸 각서에서 차르 정부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지킬 것이며 최종 승리의 날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4월 20일,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졌다. 그날 오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이 임시정부 청사로 행진하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 중지' '임시정부 타도' '밀류코프 타도'를 외쳤다. 노동자가 합세하여 격렬한 대중집회가 열렸고, 모스크바와 지방 여러 도시에서도 규탄시위가 벌어졌다.

 

위기를 느낀 임시정부는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에 도움을 요청했다. 5월 5일, 사회혁명당의 체르노프, 멘셰비키의 체레텔리, 스코벨레프 등 소비에트의 실력자들이 입각했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제1차 연립정부가 구성된 것이다. 카데츠를 주축으로 한 자유주의자 장관 10명, 사회주의자 장관 6명의 진용이었다.

 

연립정부는 뒤에 6월의 제1차 전 러시아 노 · 병 소비에트 대회와 5월의 제1차 전 러시아 농민대표자 대회에서 지지를 받긴 했으나, 위기의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했다1).

 

노동자 · 농민 · 병사들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행동을 하는 사례가 늘어갔고, 상대적으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커졌다. 5월 16일 크론슈타트 노병 소비에트는 '시의 유일한 권력은 노병 소비에트'라고 선언하고 중앙정부의 권력을 부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연립정부는 한 가지 돌파구를 마련했다. 전선에서 하계공세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연합국의 요청도 있었고 장교의 지배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군부의 요청도 있긴 했으나, 연립정부와 그를 주도하던 부르주아지의 뜻은 더 깊었다. 즉, 하계공세를 성공시킴으로써 정부를 중심으로 국민을 결집시킨 뒤에 이중권력을 소멸시켜 부르주아 권력을 수립하고, 군도 확실히 장악한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반전 분위기가 워낙 심해 정부는 어려움을 겪었다. 오랜 준비 후 6월 18일에야 겨우 서남 방면군에서 하계공세가 시작되어, 처음에는 다소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7월 6일 독일군의 역공에 러시아군은 다시 퇴각하고 말았다. 하계공세는 결국 4만 명의 사상자만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무리한 하계공세 추진과 그 실패는 오히려 대중과 병사의 혁명화를 촉진했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발트 함대의 주력부대, 리가, 민스크, 톰스크 등, 임시정부와 중앙 소비에트에 따르지 않는 혁명파의 거점이 크게 늘었다. 기업주의 공장폐쇄에 대응한 노동자의 기업접수, 기업통제, 파업이 갈수록 늘어갔다. 우크라이나의 의회인 '라다'와 핀란드의 의회인 '세임'이 자치 움직임을 보이는 등, 민족문제도 첨예화됐다. 지주와 부농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으려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반발하여 농민운동도 급증했다. 병사들의 혁명의지는 갈수록 높아갔다. 대중의 혁명화는 시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났다.

 

남서부 전선에서 공세가 시작된 날인 6월 18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 대회의 승인을 얻은 대중시위가 전개됐다(하계공세 개시에 인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정부에서 그날로 시위 날짜를 잡았다). 50만의 시위대는 거의 전부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행진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제 임시정부는 물론, 부르주아지와 협조하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대해서까지 공공연한 불신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7월 3일, 연대의 일부를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가 총회에서 무장시위를 결정했다. 목표는 소비에트 중앙에 압력을 가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연대 총회는 이를 위해 볼셰비키 당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부대와 공장에 대표를 파견해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했다. 많은 부대와 공장이 적극 지지했다.

 

볼셰비키는 대중의 뜻을 지지했으나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것은 반대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분명히 노동자와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전국의 인민 다수가 아직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따르고 있어 권력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 중앙위는 시위 자제를 결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미 볼셰비키의 통제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3일 저녁 7시, 기관총연대를 선두로 대규모 무장시위가 시작됐다. 수도의 각 부대와 노동자들이 대거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가 볼셰비키 본부인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도착했다. 스베르들로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나서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제를 호소했다. '물러가라!' 이것이 시위대의 답변이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부득이 방침을 전환했다. '타브리다 궁전까지 평화행진하여 대표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자'는 볼셰비키의 수정제안이 시위대에 전달됐다. 시위대는 환호했고, 〈라 마르세예즈〉가 거리를 뒤덮었다. 같은 시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노동자평의회도 평화시위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밤 10시경 시위대가 소비에트 본부인 타브리다 궁전에 도착했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엄청난 규모로 불어났다. 선출된 대표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소비에트가 권력을 인수하라고 요구했다. 밤 12시경 노 · 병 소비에트 집행위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5시간 이상 계속된 회의는 자신들에 대한 압력행사에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소비에트 권력 반대' 결의를 채택했다. 한편, 다른 방에서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혁명파 합동회의는 4일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7월 4일 아침, 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무장시위 금지를 발표했다.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질서회복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관내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부대는 카자흐 병 연대, 사관학교 생도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전선 사령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4일에는 더 대규모의 무장시위가 벌어졌다. 크론슈타트에서 1만여 명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등, 수도 근교로부터도 수병 · 병사 · 노동자가 밀어닥쳐 시위대는 50만을 넘었다. 몇몇 곳에서 정부 지지군이 시위대에 발포했다. 분노한 시위대와 소비에트 지도자 · 정부군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험이 감돌았으나, 소규모 충돌로 그쳤다. 저녁 9시경, "우리의 목적은 달성됐으니 이제 물러가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볼셰비키와 혁명파의 설득이 주효하여 시위대는 해산했다.

 

수도에 호응하여 전국 곳곳에서 궐기가 일어났다. 발트 해 함대, 핀란드, 리가, 이바노보 등지의 많은 소비에트가 '소비에트 권력'을 공식 요구했고, 여러 곳에서 시위와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체적으로는 혁명파보다는 타협파가 우세했다. 대부분의 지방 소비에트에서 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을 지지하고 수도의 시위를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정부와 타협파가 대반격을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은 레닌이 독일 첩자임을 '입증'하는 날조된 문서를 제시했다. 중립입장을 취하던 몇몇 부대가 이 문서에 자극받아 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전선에서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속속 도착했다.

 

5일부터 시작된 정부의 탄압은 볼셰비키에 집중됐다. 볼셰비키 본부가 점령되고 《프라브다》 지가 발행금지됐으며 당의 인쇄소가 파괴됐다.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이 수색당했고, '무장반란'에 가담한 부대의 무장해제가 시작됐다. 볼셰비키와 혁명파 지도자들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레닌과 지노비에프는 지하로 잠적했고, 카메네프, 트로츠키 등이 체포됐다.

그러나 지하활동으로 단련된 당 조직은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7월 말에 열린 볼셰비키 제6차 당대회는 혁명파의 중핵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4월에 8만의 당원을 가지고 있던 볼셰비키는 24만의 당원을 가진 정당으로 성장해 있었다.

 

7월 시위와 그 후의 탄압은 러시아의 세력관계를 크게 바꿔놓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주류는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더 굳게 결속하여 혁명파를 탄압하는 정당으로 변했다. 사회주의자들의 느슨한 연대가 확실히 깨어지고, 자유주의자와 타협파 사회주의자의 연합이 혁명파와 날카롭게 대치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불법화된 볼셰비키는 이제 지하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준비했다.

 

정부의 탄압은 대중을 잠시 주춤거리게 했으나, 그 혁명열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발동이 걸린 대중은 화려한 이론이나 지도자 없이도 계속 혁명을 수행해갔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지도자와 정파를 선택했다.

 

각주
1 노 · 병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축이 된 집행위원회가 구성되고, 농민대표자 대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주축이 된 집행위원회가 구성되어, 향후 긴밀한 협력을 펼쳐나간다

볼셰비키 내에서도 큰 혼란이 초래됐다. 카메네프 등 당의 많은 지도자들이 러시아는 아직 사회주의의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 주장이 '임시정부 타도'로 해석되어 미처 준비가 덜 된 대중들의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반발했다. 레닌이 당원들을 설득하는 데 3주일이 걸렸다. 4월 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했다.

 

그 후의 상황전개는 레닌의 견해가 옳았음을 입증해주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움직임은 지도자들의 의식이나 혁명의 교과서를 훨씬 앞지르고 있었고, 레닌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 흐름을 읽어냈던 것이다.

 

볼셰비키, 세를 얻다

 

케렌스키 내각과 코르닐로프의 반란(1917년)

 

 

1917년 7월 4일 시위대에 대한 발포사건
페트로그라드에 50만여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자 정부 지지군이 발포, 일촉즉발의 위기를 빚어냈다.
 
7월 위기의 대응, 농업문제 등에 관한 노선의 차이로 제1차 연립정부는 깨지고, 7월 24일 제2차 연립정부가 수립됐다. 전 트루도비키 의원으로 사회혁명당 극우파의 리더이던 케렌스키가 새로이 수상이 됐고, 사회주의자 7명, 자유주의자 8명이 각료로 취임했다. 신임수상 케렌스키에게는 비상대권이 주어졌고, 카데츠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내각은 소비에트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마침내 혁명적 대중과 관계를 끊은 케렌스키는 이제 부르주아지의 항로를 고분고분히 따라갔다.

 

내각 내에서 사회주의자 각료와 부르주아지 각료는 각기 다른 정강과 조건을 제시했으나, 행동 면에서는 사실 별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자기네 권력체제가 숭앙받기를 원했다. 서유럽 민주정치에 심취된 각료들은 몸놀림과 스타일까지도 서유럽 정치가들을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대중들의 혁명적 요구를 묵살했다. 대중들의 긴급한 요구와 갈망의 충족은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뤄졌고, 제헌의회 구성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제헌의회 구성을 마냥 늦추려는 부르주아지에 대해, 타협파 사회주의자 각료들은 아무런 수단도 동원할 수 없었다. 대중들의 움직임은 점점 더 혁명적으로 변해갔다.

 

이제 상황은 두 가지 결말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혁명의 물결을 누르고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는 군사독재를 확립할 것인가, 대중봉기를 통해 부르주아지 권력을 무너뜨리고 인민의 권력을 수립할 것인가?

 

새로운 상황에 처한 볼셰비키는 7월 26일부터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철회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우경화한 소비에트의 지도부가 인민에 대해 총부리를 겨냥하기에 이른 지금, 소비에트를 통해 평화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계획은 이제 물 건너갔고, 오로지 대중의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즉각 행동하지는 말고 대중들의 저 깊은 곳에서 혁명의 기운이 세차게 일어날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기로 했다.

 

대회는 또한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등의 중앙파 사회민주주의자 4,000여 명을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1단계 혁명이 성공하고 2단계 혁명으로 나아가는 이 시점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견해 차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후 레닌의 한 팔이 되어 혁명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혁명파와 부르주아지 타협파 사회주의자 연합의 대립이 격화되고 혁명파에 대한 정부의 공세가 강화되는 속에서, 이 공세의 첨병으로 코르닐로프가 크게 부상했다. 코르닐로프는 하계공세 실패 후인 7월 18일 최고사령관에 오른 후 군사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했다. 군사령관과 자본가 · 자유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8월에 들어 코르닐로프는 군사동원을 개시하며 군대의 일부를 수도 주변으로 집결시키고 자파의 주력부대를 다졌다.

 

우파의 공세에 잠시 멈칫했던 혁명파는 곧 기운을 회복하고 세력을 계속 확장해갔다. 7월 말에서 8월 사이에 '소비에트 권력' 또는 '노동자와 병사와 빈농의 권력'을 요구하는 소비에트가 더 늘어났고, 권력문제에서는 정부와 타협파에 동조해도 정부의 탄압에 대해서는 반기를 드는 반정부적 소비에트도 크게 늘었다. 소비에트와 함께 대중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공장위원회 · 지역위원회 · 노동조합 등에서도 혁명파의 힘이 크게 증가했다. 8월 12일 정부가 소집한 부르주아지의 '모스크바 국민회의'에 대한 반발은 매우 커서, 모스크바의 40만을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대규모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코르닐로프와 군 수뇌부, 정부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케렌스키도 코르닐로프와 호흡을 맞춰 혁명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갔다. 8월 11일의 각료회의는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의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의 권한 제한' 등을 포함하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를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8월 19일에는 수도에서의 계엄령 선포, 기병군단의 수도 진입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를 무시하고 독자행동을 구상하고 있었다.

 

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기병 제3군단을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군단장은 수도와 그 인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8월 26일,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즉시 물러나 모든 권력을 최고사령관에게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띄웠다.

 

케렌스키는 자신도 참여한 음모가 그렇게 결말이 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권력이 자기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낀 케렌스키는 즉각 코르닐로프군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는 소비에트와,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종조차 않던 볼셰비키에까지 도움을 청했다. 카데츠 각료들은 코르닐로프가 새 정부를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일괄사퇴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는 수도를 향해 진격해왔다. 소비에트 지도부, 그리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국민들에게 임시정부의 방위를 호소했다. 볼셰비키는 대중들에게 반혁명 분쇄 투쟁에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 투쟁은 결코 코르닐로프의 공범자인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임시정부의 조력자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위한 것도 아님을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호소는 수백만 대중을 움직였다. 수도의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었고, 새로운 적위대가 만들어졌다. 일반민중들도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코르닐로프가 보낸 전신은 그의 부대에 도착되지도 못했고, 반란군이 탄 기차에는 물 한방울 공급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에 의해서 간단히 진압됐다. 9월 1일 코르닐로프와 그 공범자들이 체포됐다.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국내정세를 크게 변화시켰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지주세력을 지지해온 타협파 사회주의자의 본질을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농민들은 반란장군들의 배후에 자신의 토지를 지키려는 지주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병사들은 정부가 자신들에게 참호 속에서 네 번째 겨울을 지내게 하리라는 점을 확신하게 됐다. 민중들 사이에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온 볼셰비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에서 타협파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볼셰비키 대의원으로 대체했다. 8월 31일,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즉시 강화, 지주토지의 몰수,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등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결의를 채택했다. 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결의를 채택했다. 그밖의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민중들 사이에 혁명의 기운이 치솟음을 깨닫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다시 내걸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이제 무장봉기와 깊숙이 결합돼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전면적인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연료난과 원료부족으로 가동이 중단되는 공장이 늘어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파국을 막을 길이 없었다. 민중은 이제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지배를 전면 거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는 경우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모든 형태의 노동운동이 권력장악 문제를 제기했다. 뒤늦게 행동을 시작한 농민들도 전투적으로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다. 유럽 러시아의 절반 이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병사들도 지휘관을 추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을 새로 선출했으며, 공공연히 전쟁을 거부했다. 각 도시의 수비대와 북부 · 서부전선의 병사들은 사실상 볼셰비키의 부대가 됐다.

 

민중의 혁명화로 인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분열상은 더 극심해졌다.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는 볼셰비키에 가까워졌고, 7월에 계급투쟁과 국제주의 원칙의 고수를 천명하며 독자행동을 선언한 사회혁명당 좌파는 이제 당의 타협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민중들은 소리 높여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장악하라고 외쳤다. 문제는 어떻게 장악하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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