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마의 개설과 스톨리핀의 반동개혁(1906년 ~ 1907년)
제정 러시아의 의회 두마
차리즘은 혁명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폭동 진압대와 '검은 100인조'가 발트 연안, 폴란드, 카프카스, 모스크바 카잔 철도, 시베리아 등, 러시아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혁명투쟁에 가담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여 문초하고 투옥했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총살과 교수형이 다반사로 집행됐다.
기세가 오른 자본가들도 '기업가 동맹'을 맺고 노동자와의 전투에 나섰다. 공장주들은 공장폐쇄를 단행하고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으며, 노동운동가들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여 취업을 막았다. 혁명으로 얻은 공장규칙,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벌금이 강화됐다. 자본가들은 "이제야말로 우리 시대가 왔다"고 외쳤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제 190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르정부는 '10월선언'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고, 1905년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은 러시아의 인민들도 이제 어제의 인민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지지하에 입헌군주제의 시도가 행해졌다. 1905년 12월 11일 모스크바 봉기 중에 두마 선거법이 공포됐다. 차리즘과 자유주의자들의 선전은 대중들에게 의회를 통해 요구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다.
공포된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 자체를 주지 않았다. 여성 전체는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다. 주민 전체를 지주 · 도시민 · 농민 · 노동자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 강하게 남아 있던 의회에 대한 환상과 카데츠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보이콧 전술은 실패했다.
1906년 3월의 선거는 정부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자유주의 정당 카데츠의 대승으로 끝났다.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10월당은 참패했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보이콧한 가운데 농민동맹, 사회주의 성향의 명망가들, 카데츠 좌파 등 잡다한 사람들이 많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다수 당선됐다. 의회 구성 후 이들은 '근로인민 계급 모두를 통합한다'는 모토 아래 트루도비키(근로파)를 결성했다.
1906년 4월 23일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됐다. 차르가 여전히 전제군주로서 행정 · 군사외교 등의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 비상시 입법권 ·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한 '사이비' 입헌군주제였다. 또한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차르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상원인 국가평의회는 황제가 임명하던 종래의 칙선 의원 절반, 젬스트보 · 귀족 · 상인 등이 선출하는 대표 절반으로 구성하도록 했고, 하원인 두마는 이미 선거가 끝나 개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7일, 제1두마가 열렸다. 의석 분포는 카데츠 184명, 트루도비키 107명, 10월당 13명 등등이었다. 카데츠와 트루도비키가 주도하는 의회는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트루도비키는 당시 한창 타오르던 농민운동에 힘입어 '모든 토지의 토지기금으로의 이양, 경작자들에게 토지 균등분배'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카데츠는 이에 맞서 '지주토지의 일부 수용'을 제안하는 법안을 냈다. 정부는 두마에서의 토지문제 심의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발족 2개월 만에 두마는 해산됐다.
해산된 두마 의원들은 핀란드 만의 비보르크에 모여 투쟁선언을 하고 국민들에게 납세거부 및 징병거부를 호소했으나,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정부는 호소문의 서명자들을 체포, 투옥했다.
다시 선거를 치른 후 1907년 2월에 제2두마가 열렸다. 불리한 선거법과 비상사태하 선거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이 65석을 얻었고 사회혁명당도 다수 진출하여, 두마는 한층 더 반정부적이 됐다.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두마와 정부가 다시 대립했다.
1907년 6월 3일, 수상 스톨리핀은 두마를 다시 해산하고 개악된 새 선거법을 공포했다. 6 · 3 반동 쿠데타였다. 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새 선거법에서는 이제 선거인단의 2/3를 지주와 자본가들이 뽑았다. 지주의 1표는 대자본가 4표, 중간 계급 65표, 농민 260표, 노동자 540표와 맞먹었다. 소수민족의 대표권도 크게 줄었다.
11월에 열린 제3두마에서 차르 정부는 바라던 의회를 얻었다. 지주 · 관료 · 성직자들이 의석의 2/3를 차지하여 두마는 보수화됐다. 제3두마는 차르 정부와 밀월을 누리며 5년의 임기를 채웠다. 제1당이 된 10월당과 그밖의 우익정당들은 이제 다수 여당을 형성하여 스톨리핀의 정책을 지지했고, 제1야당으로 밀려난 카데츠는 간혹 차르정부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으나, 예산과 농업정책, 혁명세력 탄압 등 중요사안에서는 차르 정부를 지지했다.
두마를 통제하에 둔 정부는 이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수상 스톨리핀은 '평화'와 '개혁'의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그는 1905년에 농민폭동이 극심했던 볼가 유역의 사라토프 현 지사를 지내며 자신의 구상을 다듬었다. 스톨리핀의 '평화'란 혁명가들과의 전면전을 뜻했다. 200여 종의 진보적 신문이 폐간됐고, 반란 혐의자들이 즉결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며, 혁명조직에 비밀경찰요원이 들끓었다. 1907년부터 3년 사이에 정치활동을 이유로 2만 6,000명이 투옥됐고, 5,000여 명이 처형됐으며, 1909년 현재 무려 17만 명이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또 1910년까지 500여 개 노동조합이 해체됐다. 사람들은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불렀다.
그의 '개혁'은 자영농을 육성하여 안정된 체제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06년 11월의 행정명령과 1910년 6월의 법령으로 농민공동체를 해체하여 농민이 공동체 내 자신의 분여지를 사유화하고, 흩어져 있는 토지를 한 곳으로 모아 단지를 만들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추진됐다. 농민이 공동체에 내던 토지상환금도 폐지됐다. 물론, 체제의 충실한 버팀대인 지주의 토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1914년까지 농가 전체의 24%가 공동체를 나와 사유지를 갖게 됐고, 약 10%가 단지화에까지 성공했다. 부농들은 농민은행의 융자를 받아 빈농의 분여지를 헐값에 사들였다. 농민공동체는 해체됐고 비옥한 토지는 지주와 부농의 손에 장악됐다. 농촌에 남은 농민대중은 더 혹독한 궁핍에 시달렸다.
스톨리핀의 농업정책을 통해 차르 정부는 도시의 대자본가와 함께 농촌에서 대지주와 부농이라는 동맹자를 얻었다. 그러나 토지의 절대부족과 농민들의 반발로 자영농의 비율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다. 토지개혁과 함께 보통교육 제도가 수립되고 농민의 시민권이 인정되며 지방재판소의 관할권이 농촌까지 확장되는 등, 몇 가지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방행정 개혁, 노동자 보험법 등, 더 많은 그의 구상들은 안팎의 반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스톨리핀의 법안은 종종, 하원인 두마에서는 보수적이라고 지탄받았고, 국가평의회에서는 급진적이라고 수정 또는 폐기되곤 했다.
스톨리핀은 헌법 제87조, 비상시 입법권을 써서 두마를 일시 휴회시키고 황제의 칙령으로 법률을 공포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는 두마와 국가평의회를 허수아비로 만들 뿐 아니라 차르의 권한까지를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반발을 샀다. 스톨리핀의 정치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1911년 9월 혁명단체의 일원으로 경찰스파이였던 한 유태인 청년이 스톨리핀을 암살했다.
스톨리핀의 반동개혁하에서 노동운동의 물결은 급격히 잦아들었다. 1907년 74만이던 파업자 수가 1910년에는 5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농촌의 격렬했던 투쟁도 일거에 평정됐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스톨리핀이 죽을 즈음, 한동안 잠잠했던 혁명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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