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입헌군주제의 시도

구름위 2014. 9. 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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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마의 개설과 스톨리핀의 반동개혁(1906년 ~ 1907년)

 

 

제정 러시아의 의회 두마
1905년 니톨라이 2세의 '10월선언'에 의해 이듬해 설치되었으나 중요 권한은 거의 황제에게 유보되거나 크게 제한되었다.
 
12월봉기 후 혁명은 점차 퇴조했으나, 러시아 인민은 한동안 혁명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차리즘에 줄기차게 저항했다.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파업투쟁을 계속했고 노동조합의 합법성도 쟁취했다. 1907년 중엽까지 650여 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농민운동은 1906년 여름에 절정에 이르러, 215개 군에 농민소요가 휩쓸고 지나갔다.

 

차리즘은 혁명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폭동 진압대와 '검은 100인조'가 발트 연안, 폴란드, 카프카스, 모스크바 카잔 철도, 시베리아 등, 러시아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혁명투쟁에 가담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잡아들여 문초하고 투옥했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총살과 교수형이 다반사로 집행됐다.

 

기세가 오른 자본가들도 '기업가 동맹'을 맺고 노동자와의 전투에 나섰다. 공장주들은 공장폐쇄를 단행하고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으며, 노동운동가들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여 취업을 막았다. 혁명으로 얻은 공장규칙,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벌금이 강화됐다. 자본가들은 "이제야말로 우리 시대가 왔다"고 외쳤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제 190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르정부는 '10월선언'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고, 1905년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은 러시아의 인민들도 이제 어제의 인민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의 지지하에 입헌군주제의 시도가 행해졌다. 1905년 12월 11일 모스크바 봉기 중에 두마 선거법이 공포됐다. 차리즘과 자유주의자들의 선전은 대중들에게 의회를 통해 요구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다.

 

공포된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 자체를 주지 않았다. 여성 전체는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다. 주민 전체를 지주 · 도시민 · 농민 · 노동자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 강하게 남아 있던 의회에 대한 환상과 카데츠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보이콧 전술은 실패했다.

 

1906년 3월의 선거는 정부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은 자유주의 정당 카데츠의 대승으로 끝났다.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10월당은 참패했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보이콧한 가운데 농민동맹, 사회주의 성향의 명망가들, 카데츠 좌파 등 잡다한 사람들이 많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다수 당선됐다. 의회 구성 후 이들은 '근로인민 계급 모두를 통합한다'는 모토 아래 트루도비키(근로파)를 결성했다.

 

1906년 4월 23일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됐다. 차르가 여전히 전제군주로서 행정 · 군사외교 등의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 비상시 입법권 ·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한 '사이비' 입헌군주제였다. 또한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차르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상원인 국가평의회는 황제가 임명하던 종래의 칙선 의원 절반, 젬스트보 · 귀족 · 상인 등이 선출하는 대표 절반으로 구성하도록 했고, 하원인 두마는 이미 선거가 끝나 개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7일, 제1두마가 열렸다. 의석 분포는 카데츠 184명, 트루도비키 107명, 10월당 13명 등등이었다. 카데츠와 트루도비키가 주도하는 의회는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트루도비키는 당시 한창 타오르던 농민운동에 힘입어 '모든 토지의 토지기금으로의 이양, 경작자들에게 토지 균등분배'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카데츠는 이에 맞서 '지주토지의 일부 수용'을 제안하는 법안을 냈다. 정부는 두마에서의 토지문제 심의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발족 2개월 만에 두마는 해산됐다.

 

해산된 두마 의원들은 핀란드 만의 비보르크에 모여 투쟁선언을 하고 국민들에게 납세거부 및 징병거부를 호소했으나,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정부는 호소문의 서명자들을 체포, 투옥했다.

 

다시 선거를 치른 후 1907년 2월에 제2두마가 열렸다. 불리한 선거법과 비상사태하 선거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이 65석을 얻었고 사회혁명당도 다수 진출하여, 두마는 한층 더 반정부적이 됐다.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두마와 정부가 다시 대립했다.

 

1907년 6월 3일, 수상 스톨리핀은 두마를 다시 해산하고 개악된 새 선거법을 공포했다. 6 · 3 반동 쿠데타였다. 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새 선거법에서는 이제 선거인단의 2/3를 지주와 자본가들이 뽑았다. 지주의 1표는 대자본가 4표, 중간 계급 65표, 농민 260표, 노동자 540표와 맞먹었다. 소수민족의 대표권도 크게 줄었다.

 

11월에 열린 제3두마에서 차르 정부는 바라던 의회를 얻었다. 지주 · 관료 · 성직자들이 의석의 2/3를 차지하여 두마는 보수화됐다. 제3두마는 차르 정부와 밀월을 누리며 5년의 임기를 채웠다. 제1당이 된 10월당과 그밖의 우익정당들은 이제 다수 여당을 형성하여 스톨리핀의 정책을 지지했고, 제1야당으로 밀려난 카데츠는 간혹 차르정부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으나, 예산과 농업정책, 혁명세력 탄압 등 중요사안에서는 차르 정부를 지지했다.

 

두마를 통제하에 둔 정부는 이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수상 스톨리핀은 '평화'와 '개혁'의 두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그는 1905년에 농민폭동이 극심했던 볼가 유역의 사라토프 현 지사를 지내며 자신의 구상을 다듬었다. 스톨리핀의 '평화'란 혁명가들과의 전면전을 뜻했다. 200여 종의 진보적 신문이 폐간됐고, 반란 혐의자들이 즉결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며, 혁명조직에 비밀경찰요원이 들끓었다. 1907년부터 3년 사이에 정치활동을 이유로 2만 6,000명이 투옥됐고, 5,000여 명이 처형됐으며, 1909년 현재 무려 17만 명이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또 1910년까지 500여 개 노동조합이 해체됐다. 사람들은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불렀다.

 

그의 '개혁'은 자영농을 육성하여 안정된 체제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06년 11월의 행정명령과 1910년 6월의 법령으로 농민공동체를 해체하여 농민이 공동체 내 자신의 분여지를 사유화하고, 흩어져 있는 토지를 한 곳으로 모아 단지를 만들도록 장려하는 정책이 추진됐다. 농민이 공동체에 내던 토지상환금도 폐지됐다. 물론, 체제의 충실한 버팀대인 지주의 토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1914년까지 농가 전체의 24%가 공동체를 나와 사유지를 갖게 됐고, 약 10%가 단지화에까지 성공했다. 부농들은 농민은행의 융자를 받아 빈농의 분여지를 헐값에 사들였다. 농민공동체는 해체됐고 비옥한 토지는 지주와 부농의 손에 장악됐다. 농촌에 남은 농민대중은 더 혹독한 궁핍에 시달렸다.

 

스톨리핀의 농업정책을 통해 차르 정부는 도시의 대자본가와 함께 농촌에서 대지주와 부농이라는 동맹자를 얻었다. 그러나 토지의 절대부족과 농민들의 반발로 자영농의 비율은 기대만큼 늘지 않았다. 토지개혁과 함께 보통교육 제도가 수립되고 농민의 시민권이 인정되며 지방재판소의 관할권이 농촌까지 확장되는 등, 몇 가지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방행정 개혁, 노동자 보험법 등, 더 많은 그의 구상들은 안팎의 반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스톨리핀의 법안은 종종, 하원인 두마에서는 보수적이라고 지탄받았고, 국가평의회에서는 급진적이라고 수정 또는 폐기되곤 했다.

 

스톨리핀은 헌법 제87조, 비상시 입법권을 써서 두마를 일시 휴회시키고 황제의 칙령으로 법률을 공포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는 두마와 국가평의회를 허수아비로 만들 뿐 아니라 차르의 권한까지를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반발을 샀다. 스톨리핀의 정치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1911년 9월 혁명단체의 일원으로 경찰스파이였던 한 유태인 청년이 스톨리핀을 암살했다.

 

스톨리핀의 반동개혁하에서 노동운동의 물결은 급격히 잦아들었다. 1907년 74만이던 파업자 수가 1910년에는 5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농촌의 격렬했던 투쟁도 일거에 평정됐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스톨리핀이 죽을 즈음, 한동안 잠잠했던 혁명운동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민중의 아들, 고리키  

 

혁명 전야의 문학과 예술(1910년경)

 

 

               막심 고리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면서 온갖 밑바닥 인생을 두루

                   경험한 후, 러시아의 문호가 되었다.
 
1913년 5월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무용가 니진스키가 안무한 발레 〈봄의 제전〉이 첫 선을 보이고 있었다. 청중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음악과 우아한 발레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바순이 연주하는 높은 톤의 도입부가 불길한 무엇을 예고했고, 이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막이 오르고 머리를 길게 땋은 안짱다리의 소녀들이 무대를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청중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폭동'이 벌어졌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예술로서의 음악을 파괴하려는 불경스런 행동이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음악이냐, 의사를 불러와라, 발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외쳐댔다.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표현의 자유가 위기에 처했다고 느낀 사람들이 맞고함을 치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것은 저녁의 휴식을 위한 예술에 대한 반란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소동이 잠시 뜸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무희들은 그들이 들었다고 상상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운율에는 다소 벗어났지만 춤은 아름다웠다.

 

내 뒷자리에는 젊은 신사가 있었다. 그는 발레를 더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음악의 강렬한 힘에 취해 몹시 흥분한 그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음악에 심취해 있어 얼마 동안 그 타격을 느끼지 못했다. 남은 청중들은 이제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불현듯 머리에 통증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충심으로 사과했다. 둘 다 제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음악이 탄생하는 한 장면에 대한 묘사다. 유럽 세계에 충격을 던진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새 시대의 다이나믹한 감각을 자유롭고 참신한 소리로 담아내어 현대음악을 창시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중년 이후 그는 러시아를 떠나 해외로 나갔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러시아를 잊은 적이 없는 '러시아인'이었다. 그의 청년기 작품에서는 시대의 불안한 공기, 혁명 전야 러시아의 긴박한 공기가 서유럽의 새로운 사조와 결합되어 혁신적인 음악을 창출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사회는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가 계급과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유럽과의 교류가 늘면서 사회와 문화도 유럽에 발걸음을 맞추게 됐다. 1905년의 혁명으로 형식상의 입헌체제가 갖춰짐과 함께,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이 전보다 훨씬 커지고 서유럽과의 연관도 더욱 긴밀해졌다. 그와 더불어 노동자 계급이 늘고 혁명운동이 고조되면서 진보진영과 노동자 · 농민의 자기 주장도 더 강렬해졌다.

 

문학과 예술은 그 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당시 어느 나라보다도 변화의 템포가 빨랐던 러시아에서 문학예술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세기말의 각종 시대사조가 물밀듯이 밀려와 사람들을 혼미케 하는 한편, 전통적인 러시아 리얼리즘도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다양한 변종들을 발생시켰다.

 

그 와중에서 러시아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다시 한 번 세계에 강렬한 빛을 던졌다. 블로크, 마야코프스키, 아흐마토바를 필두로 한 거대한 시인 군단은 당대 세계의 시단을 풍미했고, 체호프와 고리키의 소설은 러시아의 현실을 작품 속에 농축시켜 담아냄으로써 국내에 큰 영향을 미침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과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세로프와 베누아와 샤갈과 칸딘스키의 그림, 스타니슬라프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연극도 국내외에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또한, 댜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 파블로바와 니진스키 등의 명 무용수들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러시아 발레를 온 세계에 선보였다.

 

이들은 온갖 것들이 뒤섞인 진흙탕 속에서 러시아 혼의 정수를 뽑아 찬란한 보석을 만들어내서는 러시아 인민과 세계 앞에 바쳤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 문화는, 전제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 러시아 사회가 부르주아 사회와 인민대중의 사회의 둘로 갈라져 있었듯이,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충돌하며 발전했다. 한편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형식주의'를 표방하는 모더니즘과 데카당스의 사조가 풍미했고, 한편에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통을 새로운 러시아 현실에 접합시키며 민중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지점에 두 진영 사이에서 고민하는 다양한 흐름들이 있었다. 두 가지 조류가 가장 극명한 대비를 보인 분야는 역시 문학이었다.

 

세기가 바뀔 즈음,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 두 거장이 나타났다. 체호프와 고리키가 바로 그들이다. 뛰어난 극작가였던 체호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함께 호흡하며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 불멸의 희곡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한 단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택해 러시아의 비틀린 현실을 응축된 표현으로 명쾌하게 묘사해냄으로써 근대 단편소설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얻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꼽히는 '민중의 아들' 고리키는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고초를 겪었고, 혁명의 전 과정에서 줄곧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매섭게 공격하며 러시아 인민의 삶을 옹호했다. 그는 러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발전시켜 문학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었다.

1907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어머니〉는 혁명적 노동자와 노동자계급 운동의 발전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운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은 〈어머니〉를 자신들의 문학적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책장이 다 해지도록 돌려 읽었으며, 거기서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발견했다.

 

1901년에 발표한 그의 산문시 〈바다제비의 노래〉는 혁명의 횃불이 됐고, 희곡 〈소시민〉과 〈적〉은 혁명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의 자전 3부작 〈유년 시절〉 〈세상 속으로〉 〈나의 대학〉 속에 그의 삶의 궤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한 작가는 러시아 민중과 고리키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민중은 자신들의 삶, 학대당하고 억압받고 추방당하는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살'로 고리키의 '입'을 만들었다."


19세기 전반에 '황금시대'를 구가한 바 있는 시 분야에서도 세기가 바뀔 즈음 '은의 시대'가 펼쳐졌다. '은의 시대'는 데카당스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던 상징주의 시인 군단들로부터 비롯됐다. 민스키, 메레슈코프스키, 브류소프, 발몬트 등 전기 상징파 시인들은 리얼리즘과 혁명적 민주주의에 저항하면서 극단적인 형식미와 유아론, 악마성에 탐닉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블로크, 벨리, 이바노프 등 후기 상징파 시인들은 '생의 창조'를 중대한 과제로 삼아 극단적인 관념성을 극복하고 민중문화의 발견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문화의 위기의식에서 탄생한 모더니즘 경향의 아크메이즘(구밀료프, 만델슈탐, 아흐마토바 등), 미래파(흘레브니코프, 마야코프스키, 파스테르나크 등)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크메이즘 시인들은 구체적인 언어로 사물을 정확히 표현하고자 애썼으나 사회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미래파 시인들은 기존의 언어에 대해 증오를 내쏟으며 '저절로 쏟아지는, 가치 그 자체로서의 언어 만세!'를 외쳤다. 아흐마토바가 쓴 주옥 같은 서정시는 러시아인들 사이에 널리 애송됐고, 조국에 대한 애정이 절절이 배어나는 예세닌의 농민시도 유명하다.

 

청년시절 한때 모더니즘에 푹 빠져 있던 블로크와 마야코프스키는 혁명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아름다움과 공리성의 조화에 눈을 돌려 목놓아 혁명을 외치는 혁명시인이 됐다. 다가오는 혁명의 세찬 고동소리가 위대한 시인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고발한 서사시 〈전쟁과 평화〉를 높은 톤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부르고 있는 자유로운 인간은···
온다
나를 믿으라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