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러시아 혁명의 확산(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전국의 노동자들을 혁명의 길에 올려놓았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리가에 이어 바르샤바와 티플리스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났다. 1905년 1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44만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이는 지난 10년간의 총파업 노동자 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파업의 성격도 일변했다. 경제적 요구에 정치적 요구가 긴밀하게 결합됐고, 노동자들의 주장이 차리즘의 타도로 발전했다.
메이데이에는 전국 200여 개 도시에서 '전제 타도!'의 슬로건을 내건 동시파업이 일어났다. 폴란드와 바쿠에서는 총파업과 시위가 몇 주 동안 이어졌다.
5월에 시작된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의 파업은 무려 72일간이나 계속됐다. 이 파업은 노동자들의 굳은 결의를 안팎에 과시함과 아울러, 파업 중에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파업지도를 위해 노동자 전권대표자 소비에트가 선출됐다. 10~12월에 전국 70여 개 도시에서 인민의 권력기관으로 발전해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효시였다. 이바노보의 파업노동자에 대한 발포는 러시아 전역에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6월에는 폴란드 로지의 노동자가 3일 동안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 · 경찰과 싸웠다. 총파업이 최초로 무장봉기로 이어진 새로운 투쟁양태였다.
우랄 지방의 여러 공업 중심지에서 생겨난 파업 지도부는 혁명의 진전과 함께 혁명투쟁 기관으로 변해갔다. 6월에서 8월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 지방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총파업도 군대와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전국의 노동자 계급은 이제 차리즘과의 일대 결전을 준비해갔다.
노동자의 투쟁은 농민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2월에 오룔, 보로네슈, 크루스크 세 현에서 농민소요가 일어났다. 농민소요는 군에서 군으로, 현에서 현으로 차례차례 확대됐다. 봄이 되면서 농민들은 지주의 농지를 빼앗고 지주의 목초지에 가축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볼가 연안, 발트 연안,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폴란드 지방에서 농민들의 세력이 특히 강했다. 농촌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농업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을 석권했고, 가을에는 절반의 지역을 장악했다. 8월 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22개 현의 대표가 모여 전 러시아 농민동맹을 결성했다. 운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구현됐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전제의 지주였던 군대까지도 흔들었다. 러일전쟁의 연이은 패전과 혁명세력의 군부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시켰다.
6월, 흑해에 정박 중인 전함 포튬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함의 전 승무원이 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차리즘과의 투쟁에 돌입했다. 반란을 일으킨 군함이 오데사에 입항했다. 그러나 오데사의 혁명조직이 준비를 갖추지 못해 노동자와의 조직적인 연대투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병들의 반란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가시권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전함 포튬킨 호
차르 정부는 작은 양보를 통해 인민들을 혁명투쟁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8월 6일 입법권이 없는 자문국회(기초자인 장관의 이름을 따서 '불리긴 두마'라 불렸다)를 소집한다는 칙서가 발표됐다. 전쟁의 종결도 서둘러, 8월 말에 일본과의 강화가 조인됐다.
불리긴 두마의 소집은 입헌군주제를 가장하여 혁명열기를 가라앉히려는 차리즘의 술책이었다. 노동자는 투표권이 없고 농민도 선거권이 크게 제한됐다. 기회주의 세력은 한때 이 조치에 솔깃했으나, 사회민주당을 비롯해 선진적인 노동자와 농민 · 지식인들의 강력한 보이콧 운동으로 '두마'는 결국 소집되지 못했다.
8월 말에는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의 자치권이 인정됐다. 이 조치로 노동자와 시민 · 정당들이 대학구내에서 자유로이 정치집회를 열 수 있게 돼 대학이 혁명의 메카가 됐다.
투쟁이 다소 주춤해진 사이, 물밑에서는 정치 총파업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9월 19일에 시작된 모스크바 인쇄공 파업은 대중집회와 시위로 이어졌다. 거리에서 노동자와 군경 간의 무장충돌이 빚어졌다. 이제 대중집회 · 시위 · 무장충돌을 동반한 정치파업이 보편적인 투쟁방법이 됐다. 투쟁과정에서 인쇄공 · 금속공 · 연초제조 노동자 · 지물공 · 철도노동자의 5개 직종 노동자 평의회가 만들어졌다.
10월 6일 사회민주당 모스크바 위원회는 모스크바 정치 총파업을 결의했다. 모스크바 총파업은 즉각 모든 공업 중심지로 파급되어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파업의 전국 확산을 주도한 것은 4월에 이미 전국단위의 조합을 만들어 긴밀히 협력해온 철도노동자였다. 10월 6일 카잔 행 열차가 멎은 것을 시작으로 8일까지 모스크바 철도 분기점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10일 다른 철도노선에서도 파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2일에는 페테르부르크 분기점에서도 조업을 완전 중단했다. 16일 핀란드 행 열차가 멎은 것을 끝으로 모든 철도가 마비됐다. 정거장마다 파업위원회가 조직되어 열차왕래를 중단시켰다.
10월 12일까지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대부분의 공장노동자와 우편 · 전신 · 전화 노동자, 전문 직종 종사자, 각종 고용인들까지 파업에 들어갔다. 양수도가 주도한 파업은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전국적으로 기차가 멎고, 공장이 서고, 통신이 마비됐다. 8월의 유화정책과 전쟁종결로 한동안 뜸했던 파업과 시위가 다시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10월 총파업의 열기와 노동자들의 요구는 1월과도 사뭇 달랐다. 제국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무장봉기
|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체의 늪을 건너서 (0) | 2014.09.15 |
---|---|
입헌군주제의 시도 (0) | 2014.09.15 |
추락하는 러시아 제국 (0) | 2014.09.15 |
마지막 황제와 혁명가들 (0) | 2014.09.15 |
비테와 공업화 (0) | 2014.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