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혁명의 불길은 타오르고

구름위 2014. 9. 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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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러시아 혁명의 확산(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전국의 노동자들을 혁명의 길에 올려놓았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리가에 이어 바르샤바와 티플리스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났다. 1905년 1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44만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이는 지난 10년간의 총파업 노동자 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파업의 성격도 일변했다. 경제적 요구에 정치적 요구가 긴밀하게 결합됐고, 노동자들의 주장이 차리즘의 타도로 발전했다.

 

메이데이에는 전국 200여 개 도시에서 '전제 타도!'의 슬로건을 내건 동시파업이 일어났다. 폴란드와 바쿠에서는 총파업과 시위가 몇 주 동안 이어졌다.

 

5월에 시작된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의 파업은 무려 72일간이나 계속됐다. 이 파업은 노동자들의 굳은 결의를 안팎에 과시함과 아울러, 파업 중에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파업지도를 위해 노동자 전권대표자 소비에트가 선출됐다. 10~12월에 전국 70여 개 도시에서 인민의 권력기관으로 발전해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효시였다. 이바노보의 파업노동자에 대한 발포는 러시아 전역에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6월에는 폴란드 로지의 노동자가 3일 동안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 · 경찰과 싸웠다. 총파업이 최초로 무장봉기로 이어진 새로운 투쟁양태였다.

 

우랄 지방의 여러 공업 중심지에서 생겨난 파업 지도부는 혁명의 진전과 함께 혁명투쟁 기관으로 변해갔다. 6월에서 8월 사이에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 지방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총파업도 군대와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전국의 노동자 계급은 이제 차리즘과의 일대 결전을 준비해갔다.

 

노동자의 투쟁은 농민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2월에 오룔, 보로네슈, 크루스크 세 현에서 농민소요가 일어났다. 농민소요는 군에서 군으로, 현에서 현으로 차례차례 확대됐다. 봄이 되면서 농민들은 지주의 농지를 빼앗고 지주의 목초지에 가축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볼가 연안, 발트 연안,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폴란드 지방에서 농민들의 세력이 특히 강했다. 농촌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농업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을 석권했고, 가을에는 절반의 지역을 장악했다. 8월 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22개 현의 대표가 모여 전 러시아 농민동맹을 결성했다. 운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구현됐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전제의 지주였던 군대까지도 흔들었다. 러일전쟁의 연이은 패전과 혁명세력의 군부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시켰다.

 

6월, 흑해에 정박 중인 전함 포튬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함의 전 승무원이 혁명의 깃발을 내걸고 차리즘과의 투쟁에 돌입했다. 반란을 일으킨 군함이 오데사에 입항했다. 그러나 오데사의 혁명조직이 준비를 갖추지 못해 노동자와의 조직적인 연대투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병들의 반란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가시권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전함 포튬킨 호
1905년 6월 흑해에 정박 중이던 포튬킨 호의 수병들이 군 최초의 혁명적 반란을 일으켜 차리즘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포튬킨 호의 반란 후 볼셰비키는 군대 내 공작을 강화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병사 · 수병들의 혁명적 행동이 수십 건을 기록했다.

 

차르 정부는 작은 양보를 통해 인민들을 혁명투쟁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8월 6일 입법권이 없는 자문국회(기초자인 장관의 이름을 따서 '불리긴 두마'라 불렸다)를 소집한다는 칙서가 발표됐다. 전쟁의 종결도 서둘러, 8월 말에 일본과의 강화가 조인됐다.

 

불리긴 두마의 소집은 입헌군주제를 가장하여 혁명열기를 가라앉히려는 차리즘의 술책이었다. 노동자는 투표권이 없고 농민도 선거권이 크게 제한됐다. 기회주의 세력은 한때 이 조치에 솔깃했으나, 사회민주당을 비롯해 선진적인 노동자와 농민 · 지식인들의 강력한 보이콧 운동으로 '두마'는 결국 소집되지 못했다.

 

8월 말에는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의 자치권이 인정됐다. 이 조치로 노동자와 시민 · 정당들이 대학구내에서 자유로이 정치집회를 열 수 있게 돼 대학이 혁명의 메카가 됐다.

 

투쟁이 다소 주춤해진 사이, 물밑에서는 정치 총파업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9월 19일에 시작된 모스크바 인쇄공 파업은 대중집회와 시위로 이어졌다. 거리에서 노동자와 군경 간의 무장충돌이 빚어졌다. 이제 대중집회 · 시위 · 무장충돌을 동반한 정치파업이 보편적인 투쟁방법이 됐다. 투쟁과정에서 인쇄공 · 금속공 · 연초제조 노동자 · 지물공 · 철도노동자의 5개 직종 노동자 평의회가 만들어졌다.

 

10월 6일 사회민주당 모스크바 위원회는 모스크바 정치 총파업을 결의했다. 모스크바 총파업은 즉각 모든 공업 중심지로 파급되어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파업의 전국 확산을 주도한 것은 4월에 이미 전국단위의 조합을 만들어 긴밀히 협력해온 철도노동자였다. 10월 6일 카잔 행 열차가 멎은 것을 시작으로 8일까지 모스크바 철도 분기점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10일 다른 철도노선에서도 파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2일에는 페테르부르크 분기점에서도 조업을 완전 중단했다. 16일 핀란드 행 열차가 멎은 것을 끝으로 모든 철도가 마비됐다. 정거장마다 파업위원회가 조직되어 열차왕래를 중단시켰다.

 

10월 12일까지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대부분의 공장노동자와 우편 · 전신 · 전화 노동자, 전문 직종 종사자, 각종 고용인들까지 파업에 들어갔다. 양수도가 주도한 파업은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전국적으로 기차가 멎고, 공장이 서고, 통신이 마비됐다. 8월의 유화정책과 전쟁종결로 한동안 뜸했던 파업과 시위가 다시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10월 총파업의 열기와 노동자들의 요구는 1월과도 사뭇 달랐다. 제국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무장봉기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절정(1905년 말)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대표들이 소비에트를 조직, 발행하기 시작

                  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소식(이즈베스티야)〉
 
10월 총파업은 급속히 전국으로 확대됐다. 10월 한 달 동안 러시아 전역에서 50만 공업노동자 외에 공공기관과 다른 산업 종사자들을 포함하여 무려 200만 명이 총파업에 가담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총파업의 슬로건은 전제 타도, '불리긴 두마' 보이콧,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투표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 민주공화제 수립, 8시간 노동제 등이었다. 학생들과 사무원 · 변호사 · 의사 · 기술자들이 노동자들의 파업에 동참했다.

 

러시아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도 총파업에 적극 호응했다. 폴란드인, 핀란드인, 발트 3국인,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 유태인과 타타르인 등이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손잡고 공동의 적인 차르 전제정부에 대항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정부의 힘은 마비됐다. 혁명은 점점 더 큰 규모로 발전해갔다. 수도에서 4일 동안 무정부 상태가 계속됐다.

 

급박한 정세하에서 정부는 마침내 '굴복'했다. 10월 17일 차르는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 개설을 약속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언론 · 집회 · 결사 · 조합결성의 자유, 인권보장이 선언됐다. 헌법제정, 투표권의 확대도 약속했다.

 

온 러시아에 승리감이 팽배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반혁명 측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0월선언'에 만족한 대지주와 대자본가들은 10월당(10월 17일 동맹)을 결성했다. 젬스트보 동맹과 해방동맹의 다수 자유주의자들은 카데츠(입헌민주당)를 결성하고, '선언'에 찬사를 보내면서 정부에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다.

 

러시아 국민동맹 등, 전제를 옹호하는 반동적인 집단도 생겨났다. 차르에 충성을 맹세한 '검은 100인조'는 혁명가와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폭행 · 살해했다. 2, 3주 사이에 수백 개 도시에서 2만여 명이 살상당했다.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유태인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포그롬의 열풍이 다시 러시아를 휩쓸었다.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거나 현혹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다. 총파업 기간중인 10월 13일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500명당 1명 꼴로 선출된 노동자대표 40여 명이 파업 지도부를 구성하고 첫 회합을 가졌다. 10월 15일에는 노동자 대표 226명과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의 대표 3명씩이 모여 좌익계 변호사 노사르를 상임의장으로 선출했다. 10월 17일 대표들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공식 출범시키고 임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으며,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소식(이즈베스티야)〉이라는 신문을 발행키로 했다. 그 시간에 차르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다음 날, 소비에트는 러시아인의 정치적 권리가 확고한 발판 위에 설 때까지, 민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무장을 풀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내에서의 군대와 경찰의 철수, 러시아 전역에서의 계엄상태 해제, 정치범의 완전사면,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투표에 의한 제헌의회의 소집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파업지도를 위해 조직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시간이 흐르면서 혁명운동을 대표하는 정치기구로 변해갔다. 파업이 끝난 후에도 소비에트는 일종의 노동자 의회로서, 혁명권력으로서 계속 존속하며 혁명을 이끌어갔다.

 

저명한 혁명가들 중에서는 트로츠키의 활약이 돋보였다. 소비에트의 결성 때부터 탁월한 연설과 필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트로츠키는 11월 말 노사르의 체포 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공동의장이 되어 투쟁을 이끌었다.

 

10~12월 사이에 전국 50여 개 도시에서 유사한 성격의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혁명의 절정기에 각지의 소비에트는 차르 권력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법령을 제정하고 명령을 내렸으며, 자체 결정으로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확립했다. 몇몇 소비에트는 봉기의 지도부가 되어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농민들의 투쟁도 점점 더 격화됐다.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러시아 농민동맹 제2차 대회는 제헌의회의 소집과 완전한 자유, 모든 토지의 농민 이양을 결의했다. 11월 중순부터 한 달 사이에 농민동맹의 향 · 촌 단위 조직이 200여 개 결성됐고, 농민들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지역이 절반을 넘어섰다.

 

군대에서도 소요가 잦아졌다. 하리코프, 키예프, 타슈켄트, 바르샤뱌 등지에서 병사소요가 일어났고, 크론슈타트, 블라디보스토크, 세바스토폴에서 수병반란이 일어났다. 11월의 세바스토폴 봉기는 노동자 · 수병 · 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지도했다. 12월 초에는 모스크바에서 로스토프 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다른 부대를 규합하는 데 실패해 진압되고 말았다.

 

10월 총파업과 그 후의 투쟁으로 러시아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자유를 얻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언론 · 출판의 완전한 자유를 누렸고, 가혹한 검열제도는 간단히 무시됐다. 당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주창하는 신문들이 자유롭게 거리에 나돌았다.

 

12월 2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와 농민동맹 ·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명으로 발표된 '재정 선언'은 그렇잖아도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던 차르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선언은 국민들에게 일체의 세금을 내지 말 것, 급료를 금으로 달라고 할 것, 은행에서 모든 예금을 금으로 인출할 것을 제안하고, 차르 정부가 인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 정부가 진 일체의 외채를 인정할 수 없음을 천명했다.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가 아우성을 쳤고 외국과의 차관제공 협상에 제동이 걸렸다.

 

다음 날, 정부는 소비에트 회의장을 덮쳐 트로츠키 등 267명의 대표를 체포하여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무너뜨리고 농민동맹도 해체시켰다.

 

혁명세력과 차르 정부 간의 대결전이 시작됐다. 12월 6일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즉각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결의했다. 새로 구성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부도 총파업을 결의했다. 8일부터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의 총파업은 10일에 9만 명이 참가하여 절정에 이르렀으나, 새 지도부가 미숙하고 철도파업에 대한 정부의 엄포에 굴복,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세가 점점 약화됐다. 혁명의 중심은 볼셰비키가 강한 모스크바로 이전됐다.

 

12월 7일 모스크바 총파업이 시작됐다. 8일에는 가담자가 15만으로 불어났다. 시내 곳곳에서 대중집회와 시위, 군경과의 충돌이 벌어졌고,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12월 10일 파업과 시위는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봉기의 중심지는 모스크바 최대의 노동자 지구인 프레스냐였다. 무장한 노동자 부대는 정규군의 공격을 잘 버텨냈다. 로스토프 연대의 반란 이후 로스크바 수비대 내에는 다소 불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모스크바 사령관은 페테르부르크에 지원을 요청했다.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간 철도로 새로운 군대가 도착했다. 군대는 노동자들의 거점을 포위하고 연일 포격을 퍼부어댔다. 고립된 싸움에서 사상자가 계속 늘어가자, 12월 19일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마침내 무장투쟁을 중지했다. 천여 명이 혁명의 불꽃으로 산화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봉기의 횃불이 올랐다. 돈바스 탄전의 광부와 하리코프의 노동자가 무기를 들었다. 로스토프 나 도누에서는 8일간, 노보로시스크에서는 2주간 반란이 계속됐다. 니주니 노브고로트, 우랄 지방의 페름과 우파에서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가전을 벌였다.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치타에서는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어 한동안 도시의 권력을 장악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나 산발적인 충돌로 끝났다.

 

폴란드, 발트 연안, 카프카스, 크림 반도, 핀란드 등지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차르 정부는 잔인하게 봉기를 진압했다. 고립 분산된 형태로 진행된 각지의 봉기는 정부군에게 무참하게 각개 격파당했다.

 

12월 모스크바 봉기를 정점으로 하여 제1차 혁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혁명의 파고는 1906년을 지나 1907년 중엽까지 이어지다가 반동기를 맞아 동면 속으로 빠져든다.

 

차르 전제의 타도와 민주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한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은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세계 최초의 민중혁명이기도 했다. 민중들의 세 가지 핵심요구, 즉 전제타도, 8시간 노동제, 지주토지 몰수는 체제의 완전한 변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을 주도한 것도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었다.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은 시종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혁명이 절정에 이르자 반혁명으로 돌아섰고, 노동자들이 농민과 함께 전제의 기반을 계속 강타했다. 초기의 일상적이고 개별적인 요구는 점차 체제 전반을 뒤흔드는 경제적 정치적 요구로 발전해갔고, 탄원이나 청원 등의 미온적인 방법은 파업 · 시위 · 무장봉기로 이어지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방법으로 발전했다. 또,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농민동맹의 새로운 민중권력이 등장하여 정부기관을 제치고 러시아의 상당부분을 장악했다.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러시아의 혁명세력과 노동자 · 농민들은 1905년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혁명은 또한 여러 사치계급과 집단들의 속성을 극명하게 밝혀주었다. 12년 후인 1917년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1905년의 경험을 살려 바로 소비에트를 만들고 무장봉기를 준비한다.

 

1905년 한 해 동안 280만 노동자를 포함하여 무려 500만 명의 러시아 인민이 파업에 가담하여 혁명을 선도했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이 새 시대의 주역임을 만방에 선포했고,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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