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마지막 황제와 혁명가들

구름위 2014. 9. 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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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1898년)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의 지도자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이다.
 
1894년 10월,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아들 니콜라이가 제위를 계승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극우 보수주의자 포베도노스체프에게 교육받으며 자란 그는 전제체제의 수호를 자신의 신성한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무능하고 소심하여, 상황이 전혀 다른 국면으로 치달아갈 때에도 새로운 방책을 내지 못했고, 그렇다고 강력한 수단을 써서 겉으로나마 평온을 가장할 수도 없었다.

 

그의 무소신과 단견, 무감각은 그의 대관식 사건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1896년 5월 대관식이 끝나고 모스크바 근교의 들판에서 축하행사가 열렸다. 50만에 가까운 그의 백성이 관례적으로 행해지는 선물배급을 받고자 모여들었다. 그런데 통제가 졸렬하여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대혼란이 벌어지는 바람에 무려 1,300여 명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쳤다. 그날 저녁, 황제와 황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다. 간단한 조사 후, 단 한 명의 경찰관이 해임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다.

 

점점 심화되는 사회적 위기와는 철저히 유리된 채 황실은 극심한 사치 속에 세월을 보냈다. 니콜라이 2세와 독일인 황후 알렉산드라는 흔히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황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된다. 자기를 도운 사람을 버리는 배은망덕과 표리부동, 완고한 고집 등 니콜라이는 루이 16세를 많이 닮았고, 알렉산드라는 앙투아네트를 빼다 박은 것 같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모두 혁명이라는 천벌을 받아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국민들에게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쳤다.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했고, 교육에도 많은 제한을 가했다.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됐다. 젬스트보의 과세대상도 줄였고, 젬스트보 위원과 고용인의 임명비준을 거부하여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공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종교박해도 더욱 심해졌다. 분리파 정교도가 심한 탄압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그밖의 종파들에도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유태인의 지위도 더 악화됐다. 유태인의 토지매입을 더 엄격히 규제했고, 1903년 베사라비야의 키시뇨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대된 대규모의 유태인 약탈 · 학살을 방조했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던 핀란드에도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권리를 박탈했다. 반대운동이 격화되면서 핀란드는 혁명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경제 면에서는 1900년대 초엽까지 비테를 계속 중용,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큰 성과를 낳았으나, 균형 잃은 산업화는 한편으로 위기를 가져왔다. 1903년 동아시아 정책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는 비테를 버리고 모험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와 함께 러시아는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알렉산드르 3세의 혹독한 탄압 아래에서도 지하활동을 계속하며 세력을 확장해온 혁명가들은 산업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당이 소멸한 후에도 노동자와 청년 · 학생 · 군부 내에서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온 '인민의 의지' 그룹 일파는, 노장 나탄손의 지도하에 1893년 말 정치적 자유와 입헌체제 쟁취를 목표로 하는 '인민의 권리'당을 결성했다. 1894년 봄의 일제검속으로 당은 단명으로 끝났으나, 이 흐름은 계속 이어져 1900년대 초에 사회혁명당과 카데츠로 계승된다. 한편, 인민주의자의 다수가 이 무렵 마르크시즘에 귀의하면서 혁명운동의 중심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로 옮겨갔다.

 

1895년에는 페테르부르크에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이 결성됐다. 레닌의 제창으로 여러 개의 마르크시스트 서클이 하나의 조직으로 뭉친 것이다. '투쟁동맹'은 중앙집권, 엄격한 규율, 대중과의 긴밀한 유대를 조직원칙으로 채택했고, 17명으로 조직의 핵심을 꾸렸다. 레닌 외에도 크르지자노프스키,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크루프스카야, 라드첸코 등 미래의 러시아 혁명운동 지도자들이 핵심 멤버로 참여했다. '동맹'의 기초는 노동자 서클이었다. 1895년 12월 40여 명의 지도자가 체포되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간부들이 계속 검거됐음에도, 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인물 배포, 선동, 파업지도 등, 이전의 소그룹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로 활동을 펼쳤다.

 

1896년 '투쟁동맹'의 지도하에 페테르부르크 섬유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날인 임시휴일에 고용주들이 임금지불을 거부한 데서 발단한 파업은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섬유공장을 비롯해, 기계공장과 고무 · 제지 · 제당공장으로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3만을 넘은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10시간 반 노동, 임금 인상으로 압축됐다. '동맹'은 노동자들에게 굳건히 일어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켜나가자고 호소하는 유인물과 성명서들을 인쇄, 배포했다. 노동자들의 요구사항도 널리 전파했다.

 

파업소식은 러시아의 전 노동자들을 흥분시켰고 나아가 해외에까지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서유럽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지지 편지와 파업기금을 보내왔고, 1896년의 제2인터내셔널 런던 대회는 '유럽 반동세력의 마지막 보루와 싸우고 있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특별 결의문을 채택했다.

 

1897년 정부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에 놀라 하루 11시간 반 노동을 규정한 노동법을 제정했다. 1896년 페테르부르크의 파업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가 정치적 요구로 발전하고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결합한 투쟁으로 이름 높다. 페테르부르크의 '투쟁동맹'을 표본으로 하여 모스크바,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 블라디미르 등등, 여러 도시에 같은 이름의 그룹이 조직됐다. 서부에서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규모 조직이 만들어졌다. 1893년에 폴란드 사회민주당이 창설됐고, 1896년에는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과 리투아니아 노동자동맹, 1897년에는 유태인노동자 총동맹(분트)이 생겨났다.

 

곳곳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국적인 당의 건설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1898년 3월 초에는 민스크에서 9명의 대표자가 모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립했다. 9명의 대표는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예카테리노슬라프의 각 '투쟁동맹', '분트', 키예프의 〈라보차야 가제타(노동자 신문)〉 그룹을 대표했다. 대회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결성을 결의하고 라드첸코, 에이델만, 크레메르를 중앙위원으로 선출했으며, 〈라보차야 가제타〉를 당 기관지로 선포하고 유형중인 레닌을 팜플렛 편집자로, 제네바의 플레하노프 그룹을 해외대표로 임명했다. 그리고 대회의 이름으로 전제 타도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자유 획득을 주장하는 선언이 발표됐다. 당시 걸출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두 유형 또는 망명 중에 있던 까닭에, 선언문은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스트루베에게 의뢰해 작성했다. 선언문 중 널리 알려진 한 구절을 보자.

 

"유럽의 동쪽으로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정치감각이 뒤떨어지고 나약해진다.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되는 문화적 · 정치적 임무는 더욱 막중해진다.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임무를 그 굳은 어깨에 짊어지고 수행해야만 하며, 또 수행해낼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고, 그 어디에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남아 있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며, 그 첫걸음이다."


대회 직후 중앙위원 2명을 포함해 핵심 조직자들이 체포되고 〈라보차야 가제타〉도 압수되어, 러시아 사회민주당 중앙은 사실상 창립선언만 한 채 괴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선언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 창립 소식은 전국 각지의 활동가들을 크게 고무했다. 이후 각지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당의 지역위원회로 자리를 잡고 노동자들 사이에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그와 더불어 운동은 거대한 진전을 보이며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갔고, 간접적으로는 전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 정신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아직 당은 치밀한 조직체계를 못 갖추고, 강령과 규약 · 전술도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사상적 동요가 심해지면서 경제주의와 노동조합주의의 영향이 커졌다. 온갖 기회주의적 요소를 청산하고 당을 굳건히 세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레닌과 러시아 혁명운동

 

〈이스크라〉와 사상투쟁(1900년경)

 

 

울리야노프(레닌) 가
뒷줄 왼쪽부터 올가(누이), 알렉산드르(형), 안나(누이), 앞줄 왼쪽부터 마리야(누이)를 안은 마이야 알렉산드로브나(어머니), 드미트리(동생), 일리야 니콜라예비치(아버지), 블라디미르(레닌).
 
러시아 혁명운동의 발전과 레닌의 발자취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890년대 중엽 이후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격류 가운데로 뛰어들어 탁월한 능력으로 러시아의 운동을 이끌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정글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가기 위한 치열한 이론투쟁 사상투쟁의 중심에는 항상 레닌이 있었고, 레닌의 지도하에 러시아 볼셰비키는 전제체제를 뒤엎고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러시아 혁명의 불이 붙는 20세기 초 역사에 들어가기 전에 레닌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은 러시아 혁명사의 윤곽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레닌'은 그의 필명)는 1870년 4월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실한 교육관료였고, 어머니는 교양 있고 자상한 부인이었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가정환경하에서 여섯 형제자매는 모두 혁명가로 자라났다. 1887년 '인민의 의지' 그룹의 일원이던 형 알렉산드르는 차르의 암살모의에 가담, 체포되어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레닌은 매우 좋아하던 형의 죽음에 깊은 충격을 받고 진지하게 혁명을 생각했다.

 

그해 가을 카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그해 12월에 퇴학당했다. 그 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1890년 여름부터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하여 1891년 가을에 페테르부르크 법과대학의 졸업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초 레닌은 사마라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하여 변호사로 일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이끌었다.

 

1893년 레닌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로 진출했다. 그는 학생과 노동자 서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강의하고 당면과제들에 대한 팜플렛들을 써내면서 페테르부르크 활동을 시작했다. 1894년에는 나로드니키의 반인민적 본질을 폭로한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와 어떻게 싸우는가〉를 젤라틴판으로 지하출판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1895년 여름 레닌은 해외로 나가 독일과 스위스를 돌아보고 플레하노프 등을 만나고 온 후, 동지들과 함께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했다. '투쟁동맹'은 종래의 서클 단위의 소규모 선전활동을 대규모 선전 · 선동 · 투쟁지도 활동으로 한 차원 끌어올렸다. 이때부터 레닌은 이론 · 조직 · 실천적 정치활동을 결합하면서 진정한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5년 12월 레닌은 '투쟁동맹'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미결수로 14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됐다가, 동시베리아 예니세이 현의 슈센스코에로 유형당했다. 레닌이 유배돼 있던 1898년에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됐고, 레닌은 1899년 유형지에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술했다.

 

1900년 형기를 마칠 레닌은 해외로 망명하여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함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신문 〈이스크라(불꽃)〉를 창간했다. 레닌은 〈이스크라〉를 기반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전국적인 노동자당의 창립을 준비했다. 〈이스크라〉의 모토였던 '불꽃에서 큰불이'는 실질적인 창당대회였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사회민주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두 파로 갈라졌다.

 

이 즈음 레닌은 온갖 형태의 기회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볼셰비키 당의 전술을 발전시켰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전한 승리로 이끎과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꾀하는 전술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주도하에 추진해야 하며, 노동자 계급의 제일 동맹자는 부르주아지나 도시의 소시민이 아닌 농민이라는 것이었다. 레닌은 오로지 근로인민의 무장봉기,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확립을 통해서만 차리즘을 타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우리 운동의 긴급한 과제(1902)〉 〈일보 전진, 일보 후퇴(1904)〉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1905)〉 등등의 저작에서 그는 경제주의와 노동조합주의,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멘셰비키 등 온갖 기회주의 요소들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무엇이 진정 혁명에 이르는 길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 후 1차혁명이 최고조에 이른 1905년 11월 레닌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1907년까지 당 중앙위원회의 작업을 직접 지도했다. 1907년 혁명이 퇴조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다시 해외로 망명했다.

 

레닌은 1912년 프라하 대회에서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 당을 독립된 당으로 만들었다. 혁명의 기운이 다시 일자 러시아에 좀더 가까이 있기 위해 레닌은 1912년 폴란드 지방의 크라코프로 이주했고, 거기서 볼셰비키 신문 〈프라브다〉의 작업을 지도했다.

 

1914년 이전부터 일체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레닌은 1차대전 동안 스위스에서 전쟁과 평화, 그리고 혁명의 문제에 대한 당의 이론과 전술을 마련했다. 그는 모든 색깔의 사회국수주의자, 조국방위론자들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내 착취자에 맞서는 내전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15년 짐머발트, 1916년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총회에서 레닌은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을 짐머발트 좌익으로 한데 모았다. 이 시기의 제국주의 연구는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로 결실을 보았다.

 

1917년 2월혁명으로 차리즘이 붕괴한 뒤, 레닌은 '밀봉 열차'를 타고 4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가 보기에, 당시 러시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할 수 있는 형태는 소비에트였다. 귀국 직후 발표한 〈4월 테제〉에서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와 빈농에 의한 혁명의 접수를 주장했다.

 

7월 사건 이후 레닌은 잠시 핀란드로 몸을 숨겼다. 은신처에서 〈국가와 혁명(1917)〉을 집필하면서 그는 치밀하게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그의 직접 지도하에 무장봉기가 일어나 마침내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성취됐다. 10월혁명 직후에 열린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서 레닌은 인민위원회 의장(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됐다.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을 살리기 위해 1918년 3월 레닌은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독일과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을 관철시켜 전쟁을 끝냈다. 내전기에 볼셰비키는 그의 지도하에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에 맞서 싸워 소비에트 국가를 지켜냈다.

 

소비에트 정부와 당은 국외 간섭군과 백위군에 승리한 후 그의 지도하에 인민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레닌은 전국 전기화 계획(고엘로)을 발기했고 신경제정책(네프)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창도로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세워졌다. 그 무렵 그는 1918년 8월의 총상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로 인해 몸져 누웠으나,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계획했다. 〈협동조합에 관하여(1923)〉를 비롯해 그가 병상에서 집필한 마지막 저술들에 그러한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소비에트 국가가 단단한 토대 위에 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로서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빼어난 사상가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탄생시켰다. 1월 22일 긴급 소집된 당 중앙위원회 긴급총회에서 채택한 호소문은 레닌을 이렇게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안에 갖고 있는 진실로 위대하고 영웅적인 모든 것, 즉 비할 데 없는 지혜, 어떤 것도 극복하는 강철 같은 의지, 예속과 억압에 대한 성스러운 증오, 태산도 움직이는 혁명에의 정열, 대중의 창조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 조직의 천재, 이 모든 것이 그의 한 몸에 체현돼 있다. 그의 이름은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새로운 세계의 상징이 됐다···.

 

그는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누구보다도 먼저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 역사적 대전환을 예언함과 동시에 극히 미세한 것도 일일이 고려에 넣었고, 또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필요한 경우 맹렬히 공격할 줄도 알았고, 또 필요한 경우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퇴각할 줄도 알았다. 그는 얼어붙은 공식이라는 것을 몰랐다. 모든 것을 투시하는 그의 형안은 그 어느 것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혁명정당의 결성과 분립(1901년 ~ 1904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900~1903년의 세계경제공황은 자립적 기반이 약한 러시아의 경제를 뿌리째 흔들었다. 주요공업 부문의 생산고가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70%까지 격감했고, 수많은 실업자가 농촌으로 귀향했으며, 농촌도 황폐와 기근 속에서 허덕였다.

 

노동자는 정치파업과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900년 하리코프의 메이데이 때는 1만의 노동자가 파업하고 그 절반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를 시발로 전국 각지에서 잇따라 시위가 일어났다. 1901년 2~3월에는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하리코프, 키예프 등지에서 수만의 시위대가 '전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가두로 진출했다.

 

1902년, 1903년으로 넘어가면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더욱 빈발하는 속에 정치적 요구가 거세어졌다. 1903년 7~8월의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만의 노동자가 참여, 차르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노동운동의 고양에 놀란 차르 정부는 총칼과 채찍, 투옥과 유형으로 운동의 불길을 막으려 했다. 1903년 3월에는 제철소 노동자들의 경제파업에 발포를 하여 69명의 사망자를 냈다. 정부는 탄압과 병행하여 노동자들을 혁명투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정책도 썼다. 밀정을 투입하고, 관제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경찰의 감시하에 두는, 이른바 '경찰사회주의' 정책을 써서 운동을 교란했다. 그러나 운동의 발전은 이러한 기도들을 일소해버렸다.

 

처절한 빈곤에 직면한 농민들도 그간의 침묵을 깨고 투쟁의 대열에 참여했다. 1902년 폴타바와 하리코프의 대규모 반란에서 농민들은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경찰과 군대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학생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899년 전제권력에 도전한 학생들의 전국적인 동맹휴업에 정부가 제적학생의 강제징집으로 대응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1900~1902년에 학생운동이 격화됐다. 학생들은 대규모 동맹휴업과 시위를 조직했고, 문교장관을 암살했다. 1901년 3월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대로에서 있은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에 카자흐 병이 발포하여 여러 명이 죽기도 했다.

 

핀란드에서는 자치권의 침해와 새로운 병역법에 대항하여 핀란드 총인구의 1/5이 서명하는 등, 거센 저항운동이 일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도 동요했다. 젬스트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유주의자들은 개혁을 주장하고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가까운 장래에 혁명이 도래할 것 같은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불어라, 더 세차게!" 고리키는 〈바다제비의 노래〉에서 임박한 폭풍을 예고했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00년에 발간된 《이스크라》는 '노동자는 경제투쟁, 자유주의자는 정치투쟁'을 기조로 하는 경제주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정치투쟁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강력히 주창하는 한편, 고립 분산된 사회민주주의 서클들을 결집하고 그 활동을 지원하면서 견고한 당의 건설을 준비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당의 이론과 모델을 제시하여 당 조직에 관한 논의에 불을 붙였다.

 

1903년 7~8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사실상의 창립대회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전국의 26개 조직을 대표하여 51표의 의결권을 가진 43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강력해진 '이스크라' 파는 소수로 전락한 경제주의자와 유태민족 대표성을 주장하는 '분트'를 물리치고 대회를 이끌어나갔다.

 

대회는 '이스크라' 파의 강령을 승인했다. 최대 강령은 당의 궁극적인 목표, 즉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며, 이를 위해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확립할 것을 못박았다. 최소 강령은 당의 당면한 임무, 즉 차리즘 타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민주공화국 수립, 8시간 노동제 확립, 모든 민족의 완전한 평등과 자결, 농촌에서의 농노제 잔재 일소 등을 규정했다.

 

그런데 당 규약 제1조, 당원자격에 관한 조항을 둘러싸고 '이스크라' 파 내에서 격한 대립이 일어났다. 레닌의 안에 따르면 '당원은 반드시 당 조직의 하나에 참여해야' 했고, 마르토프의 안에 따르면 '당 조직의 지도하에 정규적으로 협력하는' 사람은 당원이 될 수 있었다. 논쟁 끝에 벌어진 표결에서 경제주의자와 '분트'의 지지를 받은 마르토프의 안이 채택됐다. 레닌의 '잘 조직되고 훈련된 직업혁명가들의 당'이라는 개념이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크라' 그룹을 유일한 해외조직으로 승인하고 '분트'의 요구가 부결되면서 경제주의자와 '분트'의 7표가 탈퇴하는 바람에 전세가 역전됐다. 그에 따라 중앙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진과 당 중앙위원회가 레닌의 뜻대로 구성됐다. 이때부터 레닌을 지지하는 '강경 이스크라 파'가 볼셰비키(다수파), 마르토프를 지지하는 '온건 이스크라 파'가 멘셰비키(소수파)로 불리게 됐다. 플레하노프는 대회 당시에는 레닌을 지지했으나 폐회 후에 멘셰비키로 돌아섰고, 저명한 해외 망명자들이 거의 멘셰비키에 가담한 반면에, 국내의 전투적인 활동가들의 다수는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1905년 1차혁명 후 잠시 통합이 모색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독립된 조직으로서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갈수록 틈이 벌어진 초기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주된 차이는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의 주도권 문제와 농민에 대한 태도, 당 조직의 성격 등에 관한 견해 차였다.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과 맥을 같이하던 멘셰비키는, 혁명 제1단계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있고 노동자 계급의 역할은 그들을 도와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대중적인 노동자당의 개념을 선호하고 농민을 경시했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성과 러시아 혁명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볼셰비키는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의 허약함과 비겁함을 공격하면서 혁명의 제1단계부터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전투적 당의 지도하에 노동자 계급이 농민과 동맹을 맺고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레하노프가 멘셰비키에 가담하고 1904년 《이스크라》와 중앙위원회마저 멘셰비키의 손으로 넘어가자, 레닌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수파 위원회 국'을 세우고 기관지 《전진》을 발간했다. 이리하여 사회민주당은 실질적인 창립과 동시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진 상태에서 1905년을 맞는다.

 

한편, 혁명적 나로드니키의 전통을 재생시키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1901년에 사회혁명당(SR)이 결성됐다. 당 기관지 《혁명 러시아》는 체르노프와 고츠 등이 편집했다. 당은 전제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열망하나 정치적으로 충분히 자각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회혁명당은 테러를 통해 전제와 투쟁할 것을 주장하여 열혈청년들의 공감을 얻었다. 게르슈니가 조직한 당 전투단은 1902년에 시퍄긴 내무장관, 1904년에 플레베 내무장관 등 반동적인 관료들을 암살하여 차리즘을 크게 동요시켰다.

 

'토지의 사회화'를 주장한 사회혁명당의 농업강령은 많은 농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19세기 후반의 인민주의자들이 주장한 '농민공동체는 사회주의의 모체'라는 슬로건에다 서유럽의 '소경영자론'을 보완한 것이었다. 노동자의 일부도 그들을 지지했다. '노동자 · 농민 · 사회주의 인텔리겐치아의 3자동맹'에 의한 사회주의 주장이 나름대로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은 토지소유 농민과 도시소부르주아의 관점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발전해갔다.

 

다른 한켠에서는 자유주의자의 세도 점점 불어났다. 체제의 혁명적 파괴에는 찬성하지 않으나 전제권력의 횡포와 탄압, 지나친 검열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 사이에 자유주의적 견해가 확산돼갔다. 혁명의 기운이 일면서 자유주의 경향의 변호사 · 의사 · 기술자 · 교수 등 전문 직업인과 차르 정부에 반대하는 지방 젬스트보 의원들이 자신들의 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02년 해외에서 잡지 《해방》이 발간됐고, 1903년 말에는 《해방》이 확대개편되어 자유주의자의 비밀결사인 해방동맹이 발족됐다. 젬스트보의 입헌파 의원들도 '젬스트보 입헌주의자 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의 핵심주장은 입헌의회군주제의 확립, 지주토지의 유상 수용 등이었다. 두 단체에 모인 사람들이 1905년에 결성되는 카데츠(입헌민주당)의 주축을 이룬다. 지도자는 역사학자 밀류코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자 스트루베 등이었다.

 

많은 지식인이 참여한 자유주의 운동은 반정부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자유주의자들은 막상 혁명이 고조되자 혁명의 불길을 두려워하면서 인민대중의 이익에 등을 돌린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이제 당당한 혁명세력으로 자라난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농민 · 지식인들의 지지하에 전제권력의 폭압에 맞서서 결전의 태세를 갖추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