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비테와 공업화

구름위 2014. 9. 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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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산업혁명(1890년대)

 

1830년대에 방적공업에서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산업혁명은 1860년대의 개혁 이후 본궤도에 올라 189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와의 연관하에서 완수된다. 그리하여 농노제와 자본제가 공존하던 러시아는 1890년대를 거치며 자본제 사회로 전환된다.

 

대개혁 이전에 러시아 자본주의를 선도한 분야는 섬유공업, 그중에서도 면공업이었다. 1830~1840년대에 면공업은 먼저 방적부문에서 기계화를 선도하며 양모공업과 아마공업을 따돌리고 섬유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어 1840~1850년대에 날염공정에서도 기계화가 진척됐고, 1850~1860년대에는 직포공정에서도 공장제 기계공업이 정착하여 자본주의 생산체계를 갖춘다.

 

186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은 철도업과 관련 산업으로부터 시작됐다. 1860년까지 1,600㎞에 불과했던 철도는 1870년 전후의 철도 붐으로 연평균 2,000㎞가 개통되면서 1875년에 전장 1만 9,000㎞에 이른다.

 

철도는 정부의 적극 지원하에 주로 민간기업에 의해 건설됐다. 설립이 완화, 장려된 주식회사의 대부분은 철도회사와 은행이었으며, 정부는 주식과 사채 구입에 안전판을 제공해주고 국립은행의 정관외대부를 통해 주식회사를 지원해줌으로써 철도업의 자본축적을 적극 도왔다. 그 결과, 철도업이 자본주의 발전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철도업의 발전은 관련 용재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거의 수입에 의존하던 기관차 · 차량 · 레일 등의 국내생산이 추진되어 1860년대 말부터 푸틸로프, 콜로멘스키, 네프스키 등 대형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부문 역시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 80년대 초에 이들 기업이 생산한 기관차는 국내수요의 4/5, 차량은 5/6를 충당하기에 이르렀고, 레일은 1870년에 자급을 달성했다.

 

그와 더불어 석탄 · 철강 등 관련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석탄업의 경우 1880년에 국내수요의 약 60%를 충당할 수 있게 됐고, 18세기에 한때 세계 제일의 생산고를 자랑하던 제철업도 1880년대 후반 이후 자본제적 산업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일찍 산업혁명이 시작된 방직공업의 경우, 1870년대 이후 방적 · 직포 · 날염의 일관 제조 시스템이 갖추어지면서 기계화가 더욱 진전됐다.

 

이와 같이 러시아 자본주의는 1860년대 이후 철도업을 중심축으로 정부의 막대한 지원하에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다. 근대적인 은행과 신용대출 기구가 다수 세워져 자본제적 발전을 지원했다.

 

1890년대에 이르면 세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 추세와 연관하여 러시아에도 큰 변화가 일면서 러시아 자본주의가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1894년 러불동맹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에 대거 유입됐다. 1897년에 금본위제가 채택되어 상거래가 안정되고 러시아 화폐의 교환성이 확립되면서 외국자본의 유입속도가 빨라졌다.

 

1892년에는 비테가 재무장관으로 취임하여 러시아의 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렇다 할 정치적 신념은 없었으나 두뇌회전이 빠른 현실주의자였던 비테는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러시아의 산업화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의 주장에 공감하고 이를 러시아에 적용코자 했다.

 

비테는 철도건설과 외자도입에 힘을 쏟는 한편으로 러시아의 공업발전을 위해 많은 조처를 취했다. 곡물 등의 수출을 강력히 장려하고 소비상품에 간접세를 부과하며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본위제를 확립하여 중공업 지원에 필요한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보호주의에 입각한 관세정책, 정부의 보증과 보조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공업을 지원하는 한편, 175개에 달하는 상공업 학교를 설립하는 등, 기술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조처들에 힘입어 러시아는 1890년대에 공업부문에서 연평균 8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공업국의 기반을 다졌다. 같은 기간에 프랑스는 1.6%, 영국은 2.4%, 미국은 3.3%, 독일은 4.9%의 성장률을 보였다.

 

1890년대의 10년 동안 철로의 총 연장은 두 배로 늘었고, 관련산업도 크게 촉진되어 선철 · 철강 · 석탄 생산량이 모두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면방직공업도 영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프랑스 · 벨기에 · 독일 · 영국 등 유럽의 자본가들은 고율의 이윤에 매료되어 러시아에 속속 자본을 투자했다. 러시아 산업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1890년 2억 루블에서 1900년 9억 루블 이상으로 늘어났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총 자본 중 외국자본은 30%를 넘었고, 공업부문에서는 무려 45%에 이르렀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금속, 독일은 화학과 전기, 영국은 석유분야를 독점했다.

 

외국자본과 국가 주도하에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러시아 자본주의는 해외자본과 국가에 대한 종속이 심화되는 한편으로 고도의 기업집중 현상을 보였다. 종업원 100명 이하의 소기업이 전 기업의 1/5에도 못 미친 반면, 1,000명 이상의 대기업이 무려 2/5에 달했다.

 

산업 간 불균형도 극심했다. 철도와 관련산업이 크게 성장한 반면에 일반기계 제조업은 보잘것없었고, 식료품 등의 소비재 산업도 매우 취약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농업이었다. 농업의 희생을 기반으로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그렇지 않아도 빈사상태였던 러시아의 농촌은 이제 위기상황으로 치달아갔다. 인구가 늘면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졌고, 과중한 토지상환금과 세금은 농민들의 어깨를 계속 짓눌렀으며, 무리한 곡물수출은 농촌에 기근을 만연시켰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어쨌든 러시아를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시켰고, 그 결과로 자본가와 노동자가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대두됐다.

 

러시아의 자본가 계급은 형성 초기부터 독립적인 성격을 갖지 못하고 차리즘에 끌려다녔다. 생산품의 상당 부분을 정부의 주문에 의존하고 국가의 보호관세 · 보조금 등 각종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탓에,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는 차리즘과 투쟁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보다는 정부에 시종 굴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에 반해, 1900년 현재 300만에 육박한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점점 혁명성을 띠어갔다. 생계유지조차 힘든 저임금, 1897년에야 하루 11시간 반 노동법이 제정될 만큼 열악한 노동조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업환경, 게다가 노동조합도 허용되지 않고 순수한 경제파업까지도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받는 속에서, 노동자들은 차리즘 타도의 깃발 아래로 속속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기업집중의 심화로 절반 이상의 기업에 500명 이상의 노동자가 모여 일하는 상황도 노동자들의 단결에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거의 대부분 농노 출신이거나 그 아들딸인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환경하에서 자신들의 어깨에 드리워진 임무를 자각해갔다. 혁명가들 역시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에 큰 힘을 기울였다. 이제 러시아 역사의 주무대는 차리즘과 노동자의 대결장으로 옮겨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