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노동운동의 성장과 마르크스주의의 보급

구름위 2014. 9. 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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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해방단 결성(1883년)

 

 

         마르크스의 《자본론》 러시아어 초판(1872년)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의 현실에 접목시킨 플레하노프(1818~1883년). 그는 노동자해방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세기의 마지막 40년간 공업 생산고는 7배 이상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의 비중이 눈에 띄게 커졌다. 19세기 말엽 러시아는 광물연료 채굴, 주철 및 철강 생산, 운송기관, 제조 면에서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 1875년 현재 39개에 이르는 주식은행이 설립되는 등, 신용제도도 정비됐다.

 

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했다. 1865년에는 제조업 · 광업 · 철도에 근무하는 노동자가 70만이었으나, 70년대 말에는 100만 이상, 20세기 초두에는 20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70년대 후반에는 오데사와 키예프의 남부동맹, 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등, 노동자들 사이에 최초의 정치조직도 만들어졌다.

 

기업주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은 해가 갈수록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60년대의 노동운동은 해고를 둘러싼 항의와 소요가 지배적이었으나, 70년대부터는 파업이 속출했다. 노동자들은 집단으로 작업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걸었다.

 

오레호보 주에보에서 일어난 유명한 1885년 파업에서는 1만여 섬유노동자가 임금수준과 고용조건, 임금의 1/3을 넘는 과다한 벌금 등에 대한 국가의 감독을 요구했다. 정부는 결국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에 관한 규칙을 제정했다.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노동자 보호입법도 마련되기 시작했다. 여자와 소년의 노동이 보호되고 노동시간이 다소 줄어들었으며, 공장감독관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기업주들이 갖은 방법으로 탈법을 저지르고 임금수준과 작업환경도 저열하기 그지없어, 노동자들은 여전히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90년대 전반에 이르면 몇 개 기업의 노동자들이 함께 행동하는 집단파업이 운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운동의 주도권도 나로드니키의 농민사회주의에서 마르크시스트의 사회민주주의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1840년대였다. 게르첸이나 벨린스키도 마르크스를 알고 있었고, 체르니셰프스키가 주관하던 《현대인》도 엥겔스의 논문을 소개한 적이 있다. 1869년에는 제1인터내셔널에 관계하던 바쿠닌이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1872년에는 나로드니키인 다니옐손이 《자본론》 제1권을 러시아어로 번역, 간행했다. 이어 경제학자 노베르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유용한 경제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면서 마르크시즘이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마르크시즘은 러시아의 독특한 사회주의인 인민주의와 연계되어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경제이론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엄격한 검열을 행하고 있던 당국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러시아의 현실과는 관계없는 추상적인 사변이라고 단정 짓고 출판을 승인했으며, 이후로도 한동안 '인민의 의지'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탄압정책을 폈다.

 

마르크시즘이 혁명이론과 결부되어 러시아 노동자들의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마르크시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를 통해서다. 1880년 '토지 총재분배'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한 플레하노프는 망명지에서 인민주의를 버리고 마르크시즘으로 전향했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과 유럽의 노동운동을 깊이 연구하고 러시아 혁명운동의 경험을 분석한 결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 속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찾는 마르크시즘이 진실로 올바른 이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883년 플레하노프는 제네바에서 악셀로드, 자술리치, 데이치, 이그나토프 등의 동지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조직, '노동자해방'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나로드니키의 사회주의 직접 이행론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거친 후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여러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 보급했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가 된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의 현실에 접목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1883년 〈사회주의와 정치투쟁〉, 1885년 〈우리 의견의 차이〉라는 저술에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확립하고 러시아 자본주의를 분석했다. 여기서 그는 나로드니키의 주장과 달리 러시아 자본주의는 몰락하지 않고 발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하 러시아의 당면과제는 부르주아 혁명이고,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와 힘을 합쳐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한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해방단과 플레하노프의 주장은 당시 나로드니키들로부터 엄중한 비판을 받았으나, 러시아 자본주의가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급속도로 늘어갔다. 그와 함께, 초기 사회민주주의자(러시아의 마르크시스트들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들의 노력에 힘입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마르크스주의 활동가들이 많이 생겨났다.

 

해외의 노동자 해방단과 별도로 국내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결성됐다. 1883년에는 '블라고예프단'(스스로는 '사회민주당'이라 부름)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885년에는 노동자들의 조직인 '토치스키 그룹'이 생겨났으며, 1889년에는 '브루스네프단' 노동자 동맹이 결성됐다. 이들은 소규모의 노동자 서클들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자기발전을 도우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했다. 브루스네프 단은 1891년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최초의 정치적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모스크바, 하리코프, 키예프, 오데사, 로스토프 나 도누, 카잔, 블라디미르, 리가, 민스크, 빌나, 티플리스 등지에서도 페도세예프, 아브라모비치 등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 노동자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장기적인 투쟁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은 노동자 해방단과 전혀 별개로 진행됐으나, 노동자 해방단이 발간한 출판물들을 받아보고 플레하노프가 쌓은 이념의 토대를 받아들이면서 차츰 간접적인 유대관계를 맺어나간다.

 

5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낸 1891~1892년의 대기근과 역병은 러시아의 사회운동을 크게 활성화시켰다. 그 후 1890년대 중엽에 이르면 전 러시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소규모 조직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당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나로드니키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운동의 새로운 단계가 펼쳐진다.

 

깨어나는 시베리아

 

시베리아 철도 착공(1891년)

 

 

러시아 극동진출의 동맥이 된 시베리아 철도
프랑스의 금융자본으로 1891년에 착공. 25년 만인 1916년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오늘날 모스크바에서 급행열차에 몸을 싣고 7일 밤낮을 동으로 달리면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다. 시베리아 철도의 종주 코스다.

 

모스크바를 출발, 꼬박 하루 동안 드넓은 러시아 평원을 달린 기차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우랄 산맥을 넘고 서시베리아의 광막한 벌판을 지나 최첨단의 과학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이른다. 기차는 이어 낮은 대지와 구릉지대를 끝없이 달려 유서 깊은 도시 이르쿠츠크에 닿고, 거기서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름답다는 호수, 바이칼 호를 남쪽으로 우회한 후, 이제 고원과 산맥지대를 지나 아무르 강변에 이른다. 그리고는 아무르 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리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방향을 꺾어 우수리 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면,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와 태평양이 여로에 지친 기차를 맞는다.

 

철도의 길이가 무려 9,300㎞. 4시간 남짓의 서울 부산 간 450㎞ 기차 여행이 고작인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거리다. 물론 모스크바부터 태평양까지 줄곧 기차로 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장거리 승객은 이제 비행기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17세기까지 모피 수집이 주산업이었고 18~19세기에야 군데군데 금광 · 은광이 발견되면서 광산 개발이 시작된 곳, 유형수들이 가슴에 맺힌 한을 땅속에 묻으며 죽어간 곳, 19세기 중엽까지 원주민을 포함해 총 주민이 200만에 불과했고, 살을 에는 혹한과 거친 대지와 울창한 원시림 속에 늑대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리던 그 불모의 시베리아 땅에 철도부설의 대역사가 시작된 것은 1891년의 일이다.

 

당시 러시아가 열악한 기술과 자본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러시아는 급속도로 늘어나는 농촌인구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농민들의 1인당 경작지는 줄어만 갔고, 그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해줄 탈출구가 필요했다. 당시의 활발한 공업화 추세도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베리아 개발은 인구분산에 큰 효과를 가져올 게 틀림없었다.

 

공업화의 추진에도 시베리아의 철과 석탄 · 목재 등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다. 또한 철도부설 자체가 러시아의 자본주의화 · 공업화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시베리아 철도는 동아시아 정책의 생명선이기도 했다. 1860년 연해주까지 얻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해군기지를 건설한 후, 러시아는 이제 만주에서 세력권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경쟁국인 영국은 해상을 장악,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있었다. 그와 경쟁하는 방법은 철도를 부설, 육지를 통해 진출하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당시 러시아가 당면해 있던 정치 · 경제 · 사회의 제반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묘책으로 보였다.

 

1890년경, 청사진 속에만 머물러 있던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추진할 계기가 왔다. 1888년 프랑스로부터 대규모 차관도입이 성사된데다가 영국이 만주에 철도부설을 기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1891년 초 마침내 황제의 칙령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을 공표했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의 제일 주역은 비테였다. 1889년 철도국장, 1892년 2월 운수장관을 거쳐 그해 8월에 재무장관이 된 비테는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의 절대 신임하에 철도건설과 공업화의 추진에 심혈을 쏟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다음 6구간으로 나뉘어 건설됐다. 모스크바에서 우랄 산맥까지는 1880년대에 이미 철도부설이 완료돼 있었다.

 

1. 서부 시베리아 구간: 첼랴빈스크 노보시비르스크
2. 중부 시베리아 구간: 노보시비르스크 이르쿠츠크
3. 환바이칼 구간: 바이칼 호 남쪽을 우회하는 구간
4. 자바이칼 구간: 바이칼 호 동쪽 스트레텐스크
5. 아무르 강 구간: 스트레텐스크 하바로프스크
6. 우수리 강 구간: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공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근 2,000㎞의 아무르 강 구간은 난공구가 많아 1895년이 되도록 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바이칼 호 동쪽의 치타로부터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의 건설을 검토하게 됐다. 이 노선은 또한 거리를 500㎞ 가까이 단축시키는 이점도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비테는 청일전쟁에 패하여 위기감에 빠져 있던 청국정부에 접근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을 움직여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만든다. 또한 청이 일본에 지불하기로 한 전쟁배상금을 빌려주면서 청을 구슬려, 1896년에 러청조약을 체결하고 북만주 경유 철도의 부설권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동청(東淸)철도다.

 

러시아는 새로 설립한 러청은행에 철도부설을 관장케 하고 1897년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또한 1898년에는 동청철도 중간지점인 하얼빈에서 요동반도의 여순에 이르는 남만지선의 부설권까지 얻어 만주에서 세력권을 크게 확장한다.

 

이 즈음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때다. 우리나라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된(을미사변) 지 1년 후인 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아관파천), 1년 동안 러시아의 보호하에 정무를 관장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1897년에는 재정고문 알렉세예프를 시켜 조선의 재정을 장악케 하고 한러은행도 설립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팽창은 역시 조선과 만주를 넘보고 있던 일본의 팽창욕과 충돌하여 1904년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로 육군병력과 전쟁물자를 수송했다. 그러나 환바이칼 구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시베리아 철도는 전략상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전쟁 중에 환바이칼 구간의 마무리 공사를 서둘러 마침내 북만주를 경유하는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결국 일본에 참패의 굴욕을 당한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만주에서 힘을 잃은 러시아는 곧 러시아 영내를 통과하는 아무르 강 구간의 공사를 재개하여 1916년 시베리아 철도의 전 구간을 완성한다.

 

완공된 시베리아 철도는 기대만큼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20세기 초엽 시베리아 지역에서 생산된 공업제품은 전 러시아 생산량의 3%에도 미치지 못했다. 동아시아 정책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베리아 철도가 러시아 경제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직접적으로는 공사 중에 대규모금광이 발견되어, 시베리아의 광업이 활기를 띠고 1897년 금본위제채택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철도건설과 함께 시베리아 이주민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갔다. 1880년대에 연간 10만 명 정도이던 이주민이 1890년대 후반 이후 연간 20만 이상으로 늘었고, 시베리아의 총 인구는 1897년에 490만을 기록했다. 그와 더불어 서시베리아로부터 점점 동쪽으로 개발의 손길이 뻗쳐나갔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하에 시베리아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소련 성립 후인 1928년에 제1차 5개년계획이 시행되면서부터다. 그 뒤 3차 대전 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 시베리아 총 지부가 세워지고,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가 건설되면서 시베리아 개발에 박차가 가해졌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외국자본까지 끌어들이면서 시베리아 개발의 제3단계가 시작됐다.

 

시베리아는 오늘날 석탄 · 석유 · 천연가스 · 각종 광물 등 지하자원의 보고이며, 울창한 냉대림에서 나오는 질 좋은 목재로도 이름 높다. 더욱이 시베리아에 매장된 자원 중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2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일찍이 1960년대에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시베리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베리아의 자원은 소련이 미래와 우주를 정복할 비밀병기다."

 

오늘날 질곡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러시아를 무시 못하는 요인들 중에 시베리아의 이 무한한 잠재력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