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사회혁명이냐, 정치혁명이냐

구름위 2014. 9. 1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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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자유(1876년)'와 '인민의 의지(1879년)'

 

'브나로드'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인민주의자들은 혁명운동을 이끌 강고한 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1875년 초 모스크바에서 먼저 결실이 맺어졌다. 취리히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 러시아 사회혁명조직'은 기관지 《노동자》를 매월 발간하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선전활동을 펼쳤다. 조직원이었던 무정부주의자 랄리는 《배부른 자와 굶주린 자》라는 책을 써서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6년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최초의 혁명정당 '토지와 자유'(제2차)가 결성됐다. 나탄손과 미하일로프가 창립을 주도했고, 혁명적 나로드니키들이 대거 참여했다. '토지와 자유'는 인민들에게 추상적인 사회주의를 설득하는 대신, 인민이 이미 자각하고 있는 구체적인 요구, 즉 '토지와 자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의 핵심강령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모든 토지를 농민들에게 이양하여 평등하게 분배한다.
2. 러시아 제국을 각 지방의 요망대로 분할한다.
3. 모든 사회적 기능을 농민공동체에 이양한다.

 

'토지와 자유'는 인텔리겐치아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작업을 벌여나가면서, 혁명의 주력이라고 생각한 농민들과의 결합도 더 튼튼하게 다져나가고자 했다. 농민들에 대한 선전은 스쳐 지나가는 일회성 활동이 아니라 의사, 의사의 조수, 조산원 등 안정된 신분으로 농촌에 정주하며 행하는 '정주' 운동으로 바뀌었다.

 

1870년대 말엽에 이르러 다시 정세가 고양되기 시작했다. 1877~18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전제체제의 심각한 부패와 결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내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다.

 

오데사, 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모스크바에 지식인과 노동자가 결합한 대규모 노동자 조직이 만들어져 위력적으로 활동했다. 그중에서도 1878년 오브노르스키, 할투린 등이 만든 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1879년 악셀로드, 스테파노비치 등이 만든 키예프의 '남부동맹'은 각각 수백 명의 조직원을 이끌고 노동쟁의, 때로는 시위와 경제테러까지 지도했다. 이들은 '토지와 자유' 또는 그 분파와 직 · 간접으로 협력하며 활동을 전개했다.

 

'러시아노동자 북부동맹'의 조직자와 참가자.

스테판 할투린, 빅토르 오브노르스키, 드미트리 스미르노프, 아르벨트 페체르손
 

1877년에 있었던 두 건의 큰 재판, 즉 모스크바의 '전 러시아 혁명조직' 가담자에 대한 '50인 재판'과 '브나로드' 운동 가담자에 대한 '193인 재판'의 탈법적인 진행과 가혹한 판결은 러시아의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1878년 1월 혁명적 나로드니키, 베라 자술리치가 페테르부르크 시장 트레포프를 저격했다. 당시 '193인 재판'의 죄수 하나가 시장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고 태형을 가한 데 대한 보복으로 시장을 저격하여 부상을 입힌 것이다. 베라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의의 화신'으로 환영받았고, 그해 4월에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들은 결정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방면된 베라는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테러리스트의 귀감이 됐다.

 

'가공할 악에 맞선 고귀하고 순결한 잔 다르크'가 돼버린 것이다. 그 후로 전제 타도의 불을 댕기고자 하는 인민주의자들의 바람이 테러 쪽으로 급선회했다.

 

1878년 8월 헌병대장 메젠체프, 1879년 2월 하리코프 지사 크로포트킨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됐고, 1879년 4월에는 급기야 솔로비요프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기도했다.

 

테러리즘의 기운이 만연하면서 '토지와 자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급진파들이 당내에 '자유냐 죽음이냐' 단을 조직했다. 테러를 혁명투쟁의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당내의 정치투쟁파는 1879년 6월 마침내 따로 모임을 갖고 집행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해 8월 당은 결국 정치투쟁과 테러, 제헌의회의 채택 문제를 둘러싸고 '인민의 의지'파와 '토지 총재분배'파로 분열했다.

 

'인민의 의지'파는 정치투쟁과 테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일련의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토지 총재분배'파는 테러 투쟁은 오히려 혁명을 지연시킬 뿐이며 농촌에서의 선전선동을 통해 사회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하일로프, 티호미로프, 젤랴보프, 크뱌토프스키, 페로프스카야, 피그네르, 니콜라이 모로조프 등, 당의 주류가 '인민의 의지'에 가담했고,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데이치, 악셀로드, 스테파노비치 등이 '토지 총재분배'를 이끌었다. 이후 '토지 총재분배'파는 농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전활동을 하다가, 1880년 핵심 지도자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망명하면서 혁명조직으로서의 생명을 잃는다. 망명 지도자들은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해 '노동자해방'단을 결성하고 러시아에 마르크시즘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한편, 중앙집권 조직을 갖춘 '인민의 의지' 당 실행위원회는 1879년 8월 알렉산드르 2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 기관지 《인민의 의지》에 테러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테러는 정부 내의 가장 위험한 인물을 제거하고 당을 스파이로부터 보호하며 정부의 탄압과 야수성에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정부의 전능을 파괴하고 대 정부 투쟁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인민들의 혁명열을 고양시키고 운동의 승리에 대한 신념을 고취하며 투쟁세력을 튼튼히 세우는 데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이제 '가장 위험한 인물'은 차르였다. 차르의 암살은 사회혁명의 불을 댕길 것이다. '인민의 의지'당은 '황제 사냥'에 나섰다. 1879년 11월에는 차르의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에 지뢰를 매설했다. 1880년 2월에는 할투린이 차르의 겨울 궁전 식당에 대형 폭파장치를 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을 버린 듯했다. 조금씩 오차가 나서 그들은 6번이나 거듭 실패했다. 실패할 때마다 당원과 자금은 계속 고갈돼갔고 남은 당원들은 체포를 피해 지하고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땅도 사람도 온통 얼어붙었다. 그들은 잠시 테러를 접어두고 군대 조직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열성당원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당국이 그들을 내버려둘 리 없었다. 더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어 당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질식할 듯한 공포와 긴장이 얼마 남지 않은 당원들을 최후의 선택으로 몰고 갔다.

 

전제의 상징, 쓰러지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1881년)

 

 

               형장의 '인민의 의지' 당원들
                   젤랴보프, 페로프스카야, 리사코프, 키발리티티, 미하일로프 등

                   5명이 처형되었다. 사형수들의 가슴에 '황제살해'라는 팻말이 달

                   렸다.
 
"그럴싸한 논의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러시아에는 단 하나의 이론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토지를 동반하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도 단 하나, 중심에 발포하는 것입니다."


1880년 11월 말에 체포된 '인민의 의지'의 지도자 미하일로프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옥중서한에서 다시 '황제 사냥'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젤랴보프가 이끄는 6명의 당원은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각오하에 치밀하게 차르의 암살을 준비했다. 그들은 2단계 계획을 세웠다. 차르가 지나갈 길에 지뢰를 매설하여 폭파하고, 그것이 실패할 경우 두 명이 연이어 폭탄을 던진다는 계획이었다.

 

거사 날짜가 잡혔다. 1881년 3월 1일 차르가 기병학교 열병식에 참가했다가 궁으로 돌아갈 거라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그들은 현장을 점검하고 폭탄을 운반해왔다. 그런데 거사 이틀 전 책임자인 젤랴보프가 체포되고 말았다. 나아가도 죽고 물러서도 죽는 막다른 골목에서 남은 대원들은 암살을 강행키로 했다. 27세의 여성당원 페로프스카야가 거사 책임을 이어받았다.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 지도자를 체포한 데 안심한 알렉산드르 2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3월 1일 예정대로 열병식에 참석했다. 그리고는 곧장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황후의 궁전으로 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로 인해 지뢰 폭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폭탄투척뿐이다.

 

잔설이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고 있던 거리의 풍경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1시 45분,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던 차르의 행렬이 운하 옆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을 때, 차르가 탄 마차 바로 밑에서 폭탄이 터졌다. 카자흐 호위병 하나가 즉사하고 행인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부가 급히 마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차르가 마차를 세웠다. 병사들이 폭탄 투척자를 체포하고 행인들이 폭발현장에 몰려들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현장이 보고 싶어진 차르가 마차에서 내려 걸어나왔다. 그때, 한 청년이 차르 앞으로 다가오더니 차르의 발 밑에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에 차르와 폭탄을 던진 청년이 그 자리에 함께 쓰러졌다. 차르는 급히 왕궁으로 실려갔으나 2시간 만에 절명했다.

 

전능의 전제군주 차르가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터질 것 같은 긴장과 초조 속에 날을 지새고 있던 '인민의 의지'의 남은 당원들은 이제 전제정치의 악몽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기 위해 들고 일어설 것이다. 아니 적어도, 혁명의 진전을 돕는 광범한 자유주의적 개혁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테러리스트들에게 내심으로 찬사를 보내던 자유주의자들도 침묵으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할 뿐이었다.

 

3월 10일, 남은 '인민의 의지'의 지도자 티호미로프는 작은 수확이라도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실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새로운 차르 알렉산드르 3세에게 사려 깊은 공개서한을 띄웠다. 거기서 그는 테러리즘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혁명가는 상황의 소산이다. 인민들 전반에 걸친 불만, 새로운 사회제도를 도입하려는 러시아인의 열망의 반영인 것이다. 전 인민을 몰살하거나 또는 억압을 강화하여 불만을 더욱 조장할 뿐이다. 곧, 처형된 대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민들 속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에 정치범을 모두 석방하고 러시아 전 국민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단, 대표자의 선거는 언론 · 출판 · 집회 · 선거 강령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는 속에서 치러져야 한다. 그와 더불어, 그렇게 선출된 의회에 '인민의 의지'는 무조건 복종할 것이며, 의회가 승인한 정부에 대해서는 장차 어떠한 무력저항도 하지 않겠노라고 전국민과 세계 앞에 엄숙히 서약했다.

 

실행위원회의 공개서한은 그 온건한 내용으로 전 러시아에 공명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 서유럽의 보수적인 신문들까지도 그 합리적인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나 새로운 차르 알렉산드르 3세는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전제체제를 계속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차르는 곧, 극우보수주의자인 종무원 총재 포베도노스체프를 고문으로 임명하고 자유주의자 로리스 멜리코프를 파면했다. 전 황제가 암살되기 직전에 로리스 멜리코프가 작성한 극히 제한적인 개혁안 인텔리겐치아와 부르주아 일부를 체제 내로 흡수해들이려는 안도 폐기됐다.

 

이어 반동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경찰력이 강화되고, 스파이가 크게 늘고, 자유주의적인 신문조차도 금지되고, 도서관의 장서가 정비되고, 대학의 자치가 삭감되는 등, 압제와 속박의 족쇄가 더욱 강화됐다. 3년간의 잠정조치로 제정된 치안유지법 헌병과 경찰에게 정치범의 체포 및 추방, 군사재판, 대학 폐쇄, 신문 · 잡지의 발행정지 등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임시법 은 1917년 혁명 때까지 폐지되지 않고 모든 반정부 활동 탄압에 악용된다.

 

젤랴보프, 페로프스카야 등 5명의 젊은 혁명가는 신속한 재판을 거친 후 4월 3일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죽었다. 당시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던 다른 한 명은 감옥에서 아이를 낳은 후 얼마 안 있어 옥사했다.

 

결국, 수년간에 걸친 '인민의 의지'와 정부 간의 혈투는 수백명의 당원들을 차르 한 명의 목숨과 바꾼 채 그 1막을 내렸다. 러시아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장면 중 하나인 '인민의 의지'의 황제 암살이 가져온 것은 사회혁명도, 입헌정부의 수립도 아닌 극심한 반동정치였다.

 

과거로의 회귀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치(1881년 ~ 1894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장소에서 거행된 추모식(3월 13일)
암살된 부왕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로 일관했다.
 
1881년 알렉산드르 3세는 충격 속에 차르로 즉위했다. 세자 때부터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새 차르는 부왕의 암살에 직면하여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혔다. 신성한 황제의 주권에 대한 모든 도전은 가차없이 격퇴, 진압돼야 한다.

 

새 차르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에서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전제왕정을 수호하고 강화할 것'임을 선포했다. 알렉산드르 3세 정부는 초지일관 반동정책을 폈고, 아들 니콜라이 2세에까지도 그 전통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책을 착상하고 구현한 것은 포베도노스체프였다. 그는 차르의 소년시절부터 국사로서 알렉산드르를 가르쳐온 인물로서, 이제 종무원 총재이자 황제의 고문이라는 실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반동적인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반동정치의 이론가이기도 한 그는 의회민주주의, 언론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심지어는 보편 교육까지도 생기 있고 건전한 국민생활을 파괴하는 커다란 오류들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악들로부터 러시아는 구제돼야만 했다. 그의 영향하에서 '정교, 전제정치, 국민성'의 삼두마차가 다시 새롭게 제기됐다.

 

적어도 한동안은 혁명분자들의 활동이 근절된 듯했고,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엄하게 문책받고 묵살당했다. 검열이 다시 강화됐고 행정추방 및 유형제도가 간소화됐다. 전제체제에 대한 반대자들은 대중들의 시야로부터 조용히 사라졌다.

 

1884년의 대학령으로 대학의 자치는 사실상 폐지됐으며, 학생들은 학교의 단순한 '방문객'으로 간주됐다. 고전어 교육이 강조되고 여성의 고등교육 기회가 축소됐으며, 초등교육에서 교회의 역할이 확대됐다.

 

1889년에는 지방관리관 제도를 두어 농민 지배를 강화하고 농민들에 대한 감시를 상설화했다. 지주귀족 중에서 임명된 지방관리관은 행정권 외에 어느 정도의 사법권까지도 보유하여 농민들 스스로가 선출해온 치안판사의 권한을 무력화시켰다.

 

1890년에는 젬스트보 법을 개정하여 농민들의 대표 선출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젬스트보를 정부의 엄중한 감시하에 두었다. 1892년에는 시 자치체에서도 유권자의 최저 재산 한계를 높여 유사한 반개혁을 실시했다.

 

지방제도의 반개혁으로 농민들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는 대신, 귀족들의 권한은 대폭 확대됐다. 전제체제의 기둥인 귀족들이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수행케 하기 위해서는 상실한 그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정교에 대한 지지는 분리파 정교도와 이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표출됐다. 분리파 정교도와 일부 신교도, 이색 종파는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지하로 들어갔으며, 카톨릭 교도와 루터교 신자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정교의 우선권을 지지하는 시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대우로도 연결됐다. 표어는 '진정한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였다.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까지도 대러시아인보다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으니, 다른 이민족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변방지역에서는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이 펼쳐졌다.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그들 고유의 전통을 포기하고 러시아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케 하고자 갖은 노력이 다 기울여졌다. 1863년 반란의 실패 후 약간의 자치권마저 상실한 폴란드 민족에게 특히 심한 압력이 가해졌다.

 

그러나 가장 큰 고난을 겪은 것은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 살도록 허용한 '유태인 거주구역'의 범위를 더욱 좁혔고, 타 지역 거주를 금하는 법령을 엄격히 시행했다. 토지를 취득하고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도 크게 제한했다. 게다가 유태인들을 살육하고 재산을 빼앗는 반유태인 폭동, 즉 포그롬까지도 방조했다. 심각한 위기가 빚어질 때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곤 하던 포그롬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의 유태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혁명가들이 배출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책은 형편없는 시대착오였다. 그것은 재활의 가능성도 없는 과거를 회복하려는 무모한 시도였다. 전제왕정과 귀족계급의 동맹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발상은 러시아 사회의 발전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이었다. 농노제의 폐지와 함께 귀족 권력의 기반은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돼버렸던 것이다.

 

다양한 민족들의 정치적 결속체로서의 제국이라는 포괄적인 개념 대신,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채택한 것도 장래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전제왕정이 몰락의 과정에 접어들면서 제국 관념마저도 상실해버린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결국, 급속도로 전진해도 모자랄 시점에 과거로 돌아가 안주하려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그의 13년 치세는 평온을 유지한 채 지나갔으나, 그의 아들이 그의 몫까지 더해 가혹한 고통을 겪는다. 매서운 반동의 칼날 아래, 가장된 평온하에서 혁명의 기운이 용틀임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독한 고난을 겪고 새롭게 태어난 '인민의 의지'는 알렉산드르 3세 치세에도 한 손에 총과 폭탄을 들고 한 손에 선전책자를 들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뛰쳐나와 정치투쟁의 깃발을 쳐들었고, 이제 강력한 세를 형성한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임무를 조금씩 자각해가면서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토지에 굶주리고 생활이 더욱 피폐해진 농민들 역시 계속 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차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무서운 힘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