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극동

구름위 2014. 9. 1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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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영토의 완성(1860년대 ~ 1870년대)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러일전쟁까지의 영토 확장(1260~1904)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산업혁명을 완수한 유럽 열강은 원료의 새로운 시장을 찾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후진적인 농업사회를 이루고 있던 다른 지역들은 유럽 강국들의 신식대포와 소총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고 차례차례 식민지로 전락해갔다.

 

그 선두에 선 것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개척의 선발주자였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차례로 격파하고 프랑스까지 굴복시킨 후, 무적함대를 앞세우고 5대양을 누비면서 식민지를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 영국은 서쪽의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중국과 오세아니아에 이르는 전 세계의 요소 요소를 장악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도 세계 각지에 적지않은 식민지를 확보했다. 이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1860~1870년대에 각각 통일국가를 세우고 식민지 확보 싸움에 뛰어든다. 미국은 한 세기 동안 서부개척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 라틴 아메리카에 상당한 영향력을 심은 후, 19세기 말에 세계무대에 나선다. 바야흐로 제국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반면에, 아직 산업혁명을 겪지도 않은 채로 유럽 열강의 대열에 끼어 있던 러시아는 19세기 중엽까지도 드넓은 제국의 주변에 정복할 땅을 남겨두고 있었다.

 

남서쪽으로는 '유럽의 환자' 오스만 투르크가 골골거리고 있었고, 카프카스 방면에서는 산악부족들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넓은 땅에서도 이슬람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러시아의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중국의 관할하에 있던 극동의 아무르 강 유역에서는 청조의 약화와 함께 그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러시아의 진출에 좋은 조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안으로 개혁의 추진과 혁명세력의 제압에 골몰하면서도, 밖으로는 제국의 확장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남서쪽의 대 투르크 정책은 유럽 열강의 저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세 방면에 걸친 아시아 정책은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의 치세 말기에 러시아 제국은 몇 군데에 미세한 국경 조정 문제만을 남긴 채로 사실상 최대판도를 이룬다. 14~15세기부터 시작된 역대 차르들의 집요한 영토 확장욕이 이제야 그 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크림 전쟁의 패배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던 러시아에 마침내 좋은 구실이 생겼다. 1875년, 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발칸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인들 사이에 남슬라브인 형제들을 구하자는 소리가 높아갔다. 1876년에는 불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투르크군은 무자비한 학살로 그에 화답했다. 이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다. 범슬라브주의의 신봉자였던 체르냐예프 장군이 세르비아로 가 최고사령관에 취임했고, 귀족에서 농민에 이르는 5,000명의 러시아 의용군이 파견됐다.

 

분쟁에 깊숙이 말려든 러시아는 1877년 4월 투르크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투르크 군도 완강히 맞섰으나, 전쟁은 마침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개병제를 도입하면서 다시 태어난 러시아군의 승리였다. 1878년 3월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러시아는 남부 베사라비야를 얻고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독일 비스마르크의 중재로 그해 6월에 열린 유럽 열강들의 베를린 회의에서, 발칸 반도는 러시아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재편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여론은 외교상의 패배를 분개했고, 러시아 정세는 긴장을 더해갔다.

 

그에 반해, 아시아 세 방면으로의 진출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카프카스 지방은 카프카스 산맥 주변의 그다지 넓지 않은 땅에 수십에 달하는 민족이 각양각색의 언어를 쓰며 사는 독특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민족의 전시장' 또는 '언어의 숲'으로 불렸다. 고대와 중세에는 러시아보다 앞선 문화를 누리기도 했던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과 부딪친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다.

 

러시아는 남쪽의 투르크, 페르시아와 싸우고, 소수민족들의 강렬한 저항을 제압하면서 카프카스 지방을 조금씩 먹어들어 갔다. 북카프카스의 초원지대는 1800년까지 거의 러시아 영토에 편입됐다. 이어 19세기 전반에 자카프카스(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일부가 러시아에 합병됐다.

 

그러나 북카프카스의 산악민족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50년을 버텼다. 이들은 이슬람교의 전설적인 지도자 샤밀의 영도하에 이맘 국가를 건설하고 러시아를 상대로 해방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864년, 끝까지 저항하던 체르케스와 다케스탄 민족들이 마침내 러시아의 군화 아래 무릎을 꿇으면서 카프카스 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 후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의 일부를 더 확보하여 카프카스 지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민족문제가 복잡하게 뒤얽힌 카프카스 지방은 그 후로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아, 러시아 제국과 그 뒤를 이은 소련정부의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최근 1980년대 말에 일어난 소요는 소련 붕괴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투르크계의 이슬람 교도들이 살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러시아가 진출을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였으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접어들어서다.

 

세 개의 오르다로 나뉘어 있던 카자흐스탄 지역 중 18세기부터 러시아에 조공을 바쳐오던 중 · 소 오르다가 1822년과 1824년에 각각 병합됐고, 1847년에는 남쪽의 대오르다까지 합병됐다. 카자흐인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이에 맞섰다.

 

이어 크림 전쟁 패배의 울분을 대외적 승리로 풀려는 국수주의 군인들의 관심이 중앙아시아에 집중되면서 투르케스탄 공략이 개시됐다. 오렌부르크 지사의 참모장 체르냐예프가 1864년 독단으로 호칸드 한국에 쳐들어가 타슈켄트를 점령했다. 이것이 중앙정부의 추인을 받으면서 침략의 속도는 빨라졌다. 1867년 타슈켄트에 투르케스탄 총독부가 설치됐고, 1868년에는 부하라 한국이 군사적 압력하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됐다. 1873년에는 히바 한국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고, 1876년에는 호칸드 한국이 러시아에 합병됐다. 러시아는 계속해서 투르크멘 지방의 정복에 나서 1884년 서투르케스탄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러시아는 각지에 총독부를 두고 면화 등의 단일경작, 러시아인의 식민, 기독교화 정책을 강행하여 중앙아시아를 제정 러시아의 가장 전형적인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식민지 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아시아인들은 러시아 혁명 전야인 1916년에 대반란을 일으킨다.

 

극동지역에서는 1689년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정한 후, 더 이상의 남하정책을 유보하고 동쪽으로 향했다. 러시아인들은 18세기 초에 캄차카 반도를 손에 놓고 베링의 해협 탐험 후 알래스카로 건너갔다. 알래스카를 장악한 이들은 그곳에 러시아 아메리카 회사를 세우고 모피 교역에 힘썼다. 한때는 캘리포니아 남부에까지 러시아의 교역소가 세워졌다. 그러나 사업이 부진해지고 영국 · 미국과의 마찰까지 빚어지자, 1867년 러시아는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미국정부에 팔아넘기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철수했다.

 

19세기 중엽에 들어 중국이 두 차례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시달리는 틈을 타서, 러시아는 다시 남방으로 손을 뻗쳤다. 1858년 청과 아이훈 조약을 맺어 아무르 강 북쪽 지역을 손에 넣고,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차지했다. 러시아는 연해주의 남쪽에 블라디보스토크('동방 정복'이라는 뜻)라는 해군 항을 만들어 극동의 중심기지로 삼았다. 이어 1875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차지하는 대신 쿠릴 열도를 일본에 내주었다. 이로써 러시아의 극동영토가 완성됐다.

 

이렇게 아시아의 세 방면에서 세력을 확장한 러시아는 이제 세계열강들과 국경을 맞대다시피 하면서 국제역할 관계에 더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서부국경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관계, 발칸 지방의 복잡한 국제관계에 덧붙여,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영국과 부딪치고, 극동에서는 일본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복잡해진 국제관계와 국내의 유동적인 정세가 상호작용하면서 러시아 제국을 점점 미궁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