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이름뿐인 해방이 가져온 것

구름위 2014. 9. 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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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해방(1861년)

 

18세기 중엽 러시아의 인구는 약 6,700만이었다. 그중 5,000만여 명이 농민과 그 가족이었고, 그 가운데에서 일부 자유농민과 특수신분을 제외한 4,000만여 명이 농노로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농노 중에서도 약 2,200만에 달하는 사유지 농노의 생활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두세를 지불하고 병역에 복무하는 등 국가에 의무를 다하면서도 국가로부터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노예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지주는 농노를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었고, 저당도 잡힐 수 있었다. 또한 시베리아 유형을 포함하여 무제한의 형벌을 가할 수 있었고, 매질도 예사로 행했다.

 

농노들은 지주에게 분여지를 제공받아 경작을 하는 대신, 그 대가를 훨씬 넘는 공조(오브로크: 현물 또는 화폐 지대) 또는 부역(바르시치나: 노동 지대)의 의무를 졌다. 지방에 따라 의무의 형태는 달라, 중부와 북부에서는 영주들이 공조를 선호했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의 흑토지대에서는 부역을 선호했으며, 둘 다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부역의 경우, 주 3일 이상 영주의 직영지에 나가 노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국유지 농노와 황실소유지 농노는 사유지 농노에 비해 인격적인 예속은 덜했으나, 농노로서의 의무와 사회적인 지위 면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었고, 황제가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할 경우 그 땅의 농노들은 자동적으로 영주의 사유지 농노로 전락했다.

 

농노들은 대부분 재래의 유산인 농민공동체(미르 또는 오프시치나)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동체는 토지와 연대책임으로 부과되는 의무를 노동력을 기준으로 균등하게 배분하고 그것을 다시 정기적으로 재분배하면서 구성원들의 공동생활을 이끌었다. 공동체는 농노들의 자치조직인 동시에 지주 또는 국가의 지배도구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농노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농노제 폐지 또는 개혁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가장 큰 이유는 농노제를 폐지할 경우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토대를 이루는 귀족계급이 몰락해 버림으로써 사회혁명을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농노제의 존립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농노제를 기반으로 하는 농업이 위기에 처하면서 귀족계급의 붕괴현상이 나타났다. 농노제 농업의 비능률과 낮은 생산성을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농업기술을 개선하는 것이었으나, 귀족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기술투자를 할 생각은 않고 그저 땅이나 농노를 저당잡혀 이전의 생활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그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궁핍해지면서 귀족계급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갔다.

 

꾸준히 발달하는 자본주의 경제 역시 농노의 해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노 노동자들은 자유고용 노동자에 비해 생산성이 낮았고, 더욱이 농번기만 되면 공장을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곤 했다. 공장주들은 계약기간 중 농노 노동자의 이탈 금지, 공장 소유 농노의 해방 등을 정부에 청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발달하는 자본주의와 봉건적인 농노제 사이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농노제에 반발하는 농민폭동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19세기 초 연간 10여 건에 불과하던 농민 폭동이 19세기 중엽에는 매년 50건이나 일어났다. 알렉산드르 2세의 즉위 후 농민폭동은 더욱 빈발해, 가장 심했던 1858년에는 무려 378건의 폭동이 일어나고 수십 명의 지주와 관리가 살해됐다. 그와 더불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농노제를 공박하는 여론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크림 전쟁의 패배는 이런 상황에 불을 질렀다. 농노제하의 러시아와 자본제하의 서유럽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이 여실히 입증됐던 것이다.

 

크림 전쟁 중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이제 더 이상 농노해방을 늦출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전쟁을 끝낸 황제는 1856년, 귀족들에게 자발적으로 농노를 해방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귀족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는 이미 농노제의 폐지는 시대적 요청이라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보수적인 지식인들까지도 농노제 폐지 주장에 가세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57년 1월, 비밀위원회를 가동하여 농노해방의 구체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11월에는 토지의 분배 없는 농노해방을 검토하겠다는 서부 3개 현 지사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각 현마다 위원회를 설치하여 농노해방에 관한 논의를 하도록 했다. 뒤이어 내린 포고령에서, 알렉산드르는 농노해방은 정부의 확실한 방침이며 토지의 분배와 함께 농노해방이 실시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농노제 폐지를 거론하지 못하게 한 언론 제약도 풀었다.

 

귀족들의 반발과 의견차이로 인해 농노해방에 관한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1858년 황제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현위원회에서 농노해방에 소극적인 귀족들을 직접 설득했다. 빈발하는 농민폭동은 정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해 말, 정부는 공동체의 존속, 토지의 유상분배라는 농노해방의 원칙을 제시했다.

 

1859년에는 법전편찬위원회가 설립됐다. 위원회는 각 현 귀족대표들의 의견을 결집하여 법 조문을 만들어갔다. 2년간의 토론과 법제화 과정에서, 지주귀족들의 요구가 대폭 수용됐다. 개혁파 관료들은 개혁의 뼈대를 지키고자 애를 썼으나, 귀족들의 반발이 워낙 드세어 많은 부분이 귀족들의 요구대로 관철됐다.

 

1861년 2월 19일, "지주의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민과 가내 농민들에 대한 농노제는 영원히 폐지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농노해방령이 공표됐다. 2년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농노는 지주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

 

농노제 폐기를 선포하는 알렉산드르 2세

 

그러나 농노해방은 여러 면에서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절반 이상의 토지가 지주의 소유로 남아,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해방 이전의 경작지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부족한 토지마저도 지역에 따라서는 시가의 2배 가까운 높은 가격으로 농민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분배됐다. 정부는 지주에게 주는 배상금의 20%를 농민들에게 부담시키고, 80%는 국가가 지불한 후 농민들에게 공동체의 연대책임으로 49년간에 걸쳐 국가에 분할 상환케 했다. 농민들은 과중한 토지상환금을 이자까지 쳐서 완불한 뒤에야 비로소 토지의 공동 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농노 해방과 더불어 농민공동체는 더욱 강화됐다. 종래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촌이 만들어지고 몇 개의 촌이 모여 향이 조직됐다. 촌에는 경제적 기능이, 향에는 행정기능이 부여됐다. 공동체에 부여된 연대 책임은 농민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공동체에 붙들어 매었고, 거기에 덧붙여 종전에 영주가 갖고 있던 권리 중 징세 · 징병 · 재판 등의 권한이 공동체에 위임됐다. 이런 제약 속에서 농민들은 독립 자영농이 될 수도,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로 변신을 할 수도 없었다. 설혹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자기 몫의 의무와 상환금은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게다가 농촌인구가 늘면서 분여지가 계속 줄어드는 바람에 농민들의 생활은 농노해방 이전보다도 더 악화됐다.

 

결국 농노들이 인격적 예속으로부터의 자유와 함께 얻은 것은 공동체에의 예속, 늘어난 경제적 부담, 더 심한 궁핍, 그리고 첨예화된 계급의식이었다. 농노해방의 실체를 파악한 농민들은 크게 반발하여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나 여지없이 진압됐다.

 

한편, 황실소유지 농노는 1863년, 약 30종류에 달하던 국유지 농민은 1866년에 해방됐다. 이들의 해방조건은 사유지 농노보다는 조금 나았으나, 이들 역시 과중한 토지상환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복잡하게 꼬여가던 상환금 문제는 농노해방이 완전한 실패였음이 분명해진 후인 1905년에 이르러 결국 폐기되고 만다.

 

그러나 '매우 불충분한' 농노해방은 러시아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왔다. 4,000만여 인구가 인격적인 예속상태에서 풀려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농민들의 몸에 배어 있던 노예근성을 뿌리 뽑고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그와 더불어 많은 농노들이 지주귀족들의 전횡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종래의 행정과 사법질서가 뿌리째 흔들렸다. 그로 인해 행정과 사법 등 여러 면에 걸친 개혁이 잇따랐다.

 

농노해방은 또한 귀족계급의 몰락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촉진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지와 전문직업인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각종 제도가 근대적으로 정비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뿌리를 내려간다.

 

불철저한 농노해방은 한편으로 농노제의 잔존물에 대한 투쟁을 촉발했고, 농노해방에 뒤이은 각종 개혁은 사회 문화운동의 지반을 넓혔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진보적인 사상과 뛰어난 문화예술이 꽃을 피우고,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는 치열한 혁명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농노해방 이후 러시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두 축은 자본주의와 혁명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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