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2세, 개혁 착수(1857년)
농노해방의 날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황제의 아우 콘스탄틴과 해군성이 개혁파 관료들을 모아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교수와 지식인 · 관료들 사이에서 개혁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번져나갔다.
1857년에 들어서면서 개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1월에는 비밀위원회를 설치하여 농노해방의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그해 말에는 토지의 분배를 동반하는 농노해방이 정부의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그와 더불어 1857년 1월 철도건설에 관한 칙령을 내려, 당시 총 연장 1,000㎞가 채 안 되던 철도를 곧 4,000㎞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철도건설에는 자재의 수입이 불가피했다. 그에 따라 5월에는 우랄 지방의 제철업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던 고율 관세를 대폭 인하했다. 7월에는 관영 신용기관의 예금 이율도 내렸다. 주식과 회사채 구입 쪽으로 자금을 유도하기 위한 개혁조처였다. 1866년 이 기관은 폐지되고 국립은행이 설립됐다.
2년간의 의견수렴과 귀족들의 반발 무마, 2년간의 법제화 작업 끝에 1861년 2월 19일 농노해방이 선포됐다. 다시 2년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농노는 지주에게서 인격적으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지주들의 요구가 대폭 수용된 나머지, 농노해방은 매우 불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절반 이상의 토지가 지주의 소유로 남았고, 나머지 토지도 높은 가격으로 농민공동체에 분배됐다. 농민들은 공동체의 연대책임으로 49년간에 걸쳐 과중한 토지대금을 분할 상환해야 했다. 해방된 농민들은 또한 자유의사로 공동체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농노해방은 러시아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서 다른 여러 개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농노제가 폐지됨에 따라 종래에 지주가 농노들에게 행사하던 사법권이 자동 소멸됐고, 지방에서 지주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들에도 큰 타격이 왔다. 지방귀족들에게 일임되고 있던 지방행정이 시급하게 재조직되어야 했다.
1864년, 젬스트보라는 지방자치기관이 설립됐다. 군 단위에서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들이 각기 자신의 대표들을 뽑아 군회를 구성하고, 군회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현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군회와 현회에서 각각의 집행부인 참사회를 선임했다. 젬스트보는 도로정비 · 의료 · 초등교육 · 우편 등 주민복지 업무를 관장했고, 일반 행정과 공권력은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들이 집행했다.
법원도 개혁됐다. 1864년 11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하에 종래의 신분별 제도를 철폐하고 모든 신분에 대해 동등한 제도를 확립했다. 사법부는 행정부에서 독립했고, 재판의 공개원칙이 세워졌다. 재판관은 종신제가 보장되고 보수도 좋아져 권력이나 금력에 굽신거리지 않을 수 있게 됐고, 치안판사제와 배심원 제도, 변호사 제도도 도입됐다. 그러나 농민들의 향 재판소 · 종교 재판소 · 군법회의는 그대로 존치됐다.
교육제도에도 개혁이 가해졌다. 1863년의 대학령으로 교수회를 핵심으로 하는 대학자치의 원칙이 부활됐고, 1864년 7월과 11월의 학교령으로 초등학교와 7년제 중등학교의 개설이 촉진됐다. 1856년에는 사전 검열제도도 다소 완화됐다.
도시 제도도 달라졌다. 1870년에 도시법이 공포되어 귀족 · 상인이 지배하던 도시행정 대신에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는 도시자치의 원칙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의회(두마)의 선거에서 소유재산에 따라 대표권에 차등을 두어, 대부르주아지와 특권신분의 대표가 의회를 주도했다.
군 제도에서는 밀류틴 육군장관이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1864년에 군관구제를 도입하고 사관양성 제도를 개혁했다. 이어 1874년에는 국민개병제를 도입하면서 군복무 기간을 25년에서 6년으로 단축하고 복무조건도 개선했다. 그와 더불어 병사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진행된 일련의 이 개혁을 흔히 '대개혁'이라고 한다. 황제 권력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공업화를 진전시키고 일련의 근대적인 사회제도를 도입했다. 당연히, 전제권력은 권력 자체의 개혁, 즉 정치개혁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개혁파 관료들은 전제권력이야말로 개혁을 보증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그 한계가 분명하긴 했으나, 대개혁은 러시아에서 종래의 확고한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다. 자본주의 경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주 귀족들의 세력이 약해지는 대신 부르주아지가 중심 세력의 하나로 등장했고, 전문 관료 · 기술자 · 교사 · 교수 · 문인 · 언론인 · 의사 · 법률가 등의 전문직업 종사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학생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새로운 세력인 전문직 종사자들과 학생들 가운데에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려는 사회혁명에 관심을 갖는 급진주의자들이 늘어갔다. 급진주의자들은 점점 차르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던 반동세력들은 1863년의 폴란드 반란, 1866년의 황제 암살 기도, 급진주의자들의 강력한 도전에 거듭 놀란 황제를 부추겨 반격에 나서게 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르 2세 치세의 후반기에 개혁은 상당 부분 후퇴한다. 개혁으로 혁명의 기운을 누르고자 한 초기의 의도가 뒤집힌 것이다. 검열이 다시 강화되고 정치사범은 배심제 판결에서 제외됐으며, 젬스트보는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전제체제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가치의 확대를 꾀하는 시도는 물론 그에 관한 언급조차도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개혁의 물꼬는 이미 터졌고, 사회 전반에서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새롭게 형성된 급진주의 그룹 역시 그 정도의 억압에 자신의 신조를 포기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정세는 이제 전제권력과 혁명가들의 정면대결로 치달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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