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1853년 ~ 1856년)
세바스토폴 요새에 포격을 가하는 영불연합군 함대
사실, 니콜라이 1세가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며 각국의 내정에 간여하고, 국민들에게 '차르가 인민의 보호자'임을 내세우며 자기를 따르라고 강력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러시아군대는 형편없음이 드러났고 러시아는 유럽에 크게 뒤져 있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낙심한 니콜라이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고, 이제 황실과 보수주의자들까지도 러시아에 대수술을 가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기에 이른다.
크림 전쟁은 본질적으로 근동과 발칸 지방의 패권을 두고 러시아와 유럽 열강이 충돌한 싸움이다. 즉, 전통적인 남하정책을 계속 추진하려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근동지방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가 투르크 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부딪친 것이다.
당시 니콜라이는 투르크가 '중병에 걸린 환자'라면서, 거기서 발생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유럽 여러 나라, 특히 영국에 투르크를 분할 지배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럴 경우 지리적 여건상 근동지방의 패권이 러시아에 넘어갈 것을 우려,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844년 니콜라이는 친히 영국을 방문하여 애버딘 외상과 근동 정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러시아와 영국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투르크를 존속시키되, 만일 투르크가 급속히 붕괴할 경우 양국은 투르크 영토의 분할과 그 밖의 여러 문제에 대해 사전에 약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1850년,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성지에 대한 권리를 둘러싸고 가톨릭과 정교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먼저 손을 써서 투르크 정부로 하여금 가톨릭의 권리를 인정케 했다. 격분한 니콜라이는 1853년 1월 투르크에 최후통첩을 띄웠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정교도들의 주장대로 해결되어야 하며, 투르크 영내 1,200만 정교도들의 보호권이 러시아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투르크는 협상 끝에 첫 번째 요구는 수락했으나, 두 번째 요구는 자주권에 대한 침해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해 7월 니콜라이는 정교도의 보호권을 인정한 1774년의 러-투조약을 상기시키며,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몰도바와 왈라키아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니콜라이는 영국과의 그간의 대화 등에 비추어, 영불 양국이 러시아 투르크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산이었다. 영불 두 정부의 수반 모두 야심만만한 인물로서 러시아의 진출을 그냥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었고, 영불 양국의 여론 또한 러시아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곧 해협으로 출동했다. 마침내 영불 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투르크는 10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다뉴브 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전쟁 초기에 전세는 러시아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1월에는 러시아의 함대가 소아시아의 투르크 기지를 공격하여 초토화시켰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흑해로 진입했다. 1854년 2월 양국은 러시아에게 몰도바와 왈라키아에서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반응이 없자 3월 영국과 프랑스군이 전쟁에 돌입했다. 영 · 불 · 투르크 연합군은 발칸 반도, 흑해 북부 연안, 카프카스 지방의 세 방면에서 러시아군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때 니콜라이가 우방국이라고 믿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보내 몰도바와 왈가키아를 점령해버렸다. 그리하여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완충지대가 형성됐다. 동쪽의 카프카스 지방은 산세가 워낙 험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에는 부적합했다. 자연히 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지게 됐다.
영불 연합군은 곧 바다를 장악하고, 흑해는 물론, 발트 해, 백해, 베링 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러시아 해안에서 함대와 요새에 공격을 가해왔다. 러시아 해군의 목제 범선은 연합군의 증기선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해안의 러시아 요새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연합군은 마침내 결전장소로 크림 반도를 선택했다. 크림 반도의 남서해안에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사령부 세바스토폴 요새가 있었다.
1854년 9월, 6만의 연합군이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6일 뒤 알마 강변의 언덕에서 연합군과 멘슈코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맞붙었다.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은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수천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했다.
10월, 연합군의 포격과 함께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시작됐다. 병참선이 끊긴 가운데에서도 러시아의 흑해 함대는 나히모프, 코르닐로프, 토들레벤 같은 헌신적인 장교들의 지휘하에 사력을 다해 요새를 방어했다. 연합군의 포격으로 요새는 폐허로 변해갔고, 매일같이 수백 명이 죽어 나뒹굴었다. 무려 349일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투의 참혹상은 톨스토이가 쓴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톨스토이는 포병 장교로 이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다른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러시아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성능 좋은 대포와 소총에 계속 밀렸다. 철도도 없고 도로망도 부실하여 식량도 증원군도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농노들이 주축을 이루는 러시아군의 사기는 날로 떨어져갔다. 전비 조달을 위한 가혹한 징세와 지폐 남발로 인플레가 격화되고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갔다.
1855년 초에는 사르디니아까지 연합국에 가세했다. 각국의 통신원들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전황을 본국에 전보로 알렸다. 크림 전쟁은 전투 진행상황이 참전국의 국민들에게 곧바로 전해진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선에서는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50만을 넘긴 사망자들의 대다수는 전사자라기보다는 병사자였다. 전선마다 전염병이 돌아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갔고, 부상병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나이팅게일과 자원 간호사들이 새로운 형태의 야전병원을 세워 헌신적으로 부상병을 치료한 것이 바로 이 크림 전쟁에서였다. 크림 전쟁의 내막은 몰라도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패색이 짙어가던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는 무력감 속에 눈을 감고, 그 아들 알렉산드르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연합군은 아조프 해 입구의 케르치까지 함락시키고 세바스토폴을 죄어들어 왔다. 그해 9월, 세바스토폴의 러시아군은 마침내 남은 함정들을 침몰시키고 요새를 폭파한 뒤 세바스토폴을 버렸다.
10월에는 부크 강 어귀의 러시아 요새가 쑥밭이 됐다. 11월에는 스웨덴이 연합군에 가담했다. 12월에는 그때까지 중립을 지키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게 공격을 중지하고 베사라비아에서 퇴각할 것과 흑해 중립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왔다. 러시아는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었다.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베사라비야의 일부를 투르크에 할양하고, 사실상 러시아의 내해였던 흑해 중립화를 인정했다. 그에 따라 러시아는 더 이상 흑해 함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됐다. 투르크 제국 내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도 철회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그 당당하던 위세를 잃고 처참한 굴욕을 맛보았다.
경찰통치의 중심지주였던 러시아군대는 허수아비임이 밝혀지고, 관료들의 무능력과 부패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후진적인 농노제와 비효율적인 관료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서유럽과의 경쟁은 고사하고 러시아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농민폭동은 더욱 잦아지고 각계에서 개혁여론이 비등했다. 크림전쟁의 패배는 주저주저하며 구체제에 안주하려던 러시아의 지배층에게까지 일대 각성을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