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게르첸과 바쿠닌

구름위 2014. 9. 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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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혁명가의 등장(1840년대)

 

게르첸이 출판한 잡지 《북극성》의 표지에 실린 처형된 5인의 데카브리스트
 
1827년 모스크바 교외의 참새 언덕. 15살쯤 되는 두 소년이 데카브리스트의 뜻을 이어받아 조국 러시아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굳은 맹세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맹세를 실천하여 죽을 때까지 전제와 농노제의 타파,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이들이 바로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게르첸과 그 평생의 친구 오가료프다.

 

1812년 귀족의 서자로 태어난 게르첸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농노제 질서를 증오했다. 모스크바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클을 만들어 정치와 철학을 논했다. 그들은 데카브리스트와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선전하고, 당시 러시아에 유입된 생시몽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깊이 검토했다. 1834년 게르첸은 반정부적 언동을 이유로 오가료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졌다.

 

1839년 모스크바에 돌아온 게르첸은 당시 헤겔 철학의 보수적 해석에 빠져 있던 스탄케비치 서클 멤버들과 논쟁을 벌이고, 독자적인 연구 끝에 '혁명의 대수학'으로서의 헤겔 해석에 도달했다. 슬라브 파와 서유럽 파의 논쟁에서는 서유럽 파의 편에 섰으나, 서유럽 파 주류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관점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 무렵 게르첸은 철학 · 사회평론 · 문학에 관한 많은 저작을 발표했고, 그를 통해 농노제를 격렬히 공격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에도 비판을 가했다. 게르첸은 1847년 해외로 출국, 망명한다.

 

한편, 평론계에서는 벨린스키가 대활약을 했다. 대학에서 쫓겨난 그는 저널리즘에 짧은 생애를 바쳤다. 점점 심해지는 검열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 · 사회 · 철학 · 역사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긴급하고도 절박한 문제들을 빼놓지 않고 다루었다. 1840년대 초에 이르러 그의 저작은 혁명적 민주주의의 색채가 농후해졌다.

 

당시 벨린스키의 지도하에 편집되고 있던 《조국의 기록》과 《현대인》 지는 민주주의 사상의 연단이 됐고, 이를 매개로 진보 그룹들이 형성돼갔다. 그러는 가운데 벨린스키는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러시아에서 혁명의 필요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가 쓴 많은 글 중에서도 특히, 전제와 농노제를 날카롭게 공격하면서 인민혁명이 반드시 일어나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사회가 올 것임을 예언한 〈고골리에게 보내는 편지〉는 필사본으로 유포되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벨린스키는 또한 귀족 아닌 잡계급 출신의 첫 혁명가(군의관의 아들이었다)로서도 큰 의의를 남겼다.

 

1844년경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뒤에 페트라셰프스키 단으로 불리는 지하 그룹이 형성됐다. 그룹의 주요 멤버는 페트라셰프스키, 스페슈네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등이었고, 관리 · 교사 · 작가 · 예술가 · 학생 · 장교 등 하층귀족과 잡계급 출신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들은 푸리에의 사회주의와 포이에르바흐의 철학, 벨린스키와 게르첸의 저술들을 연구 · 검토하고 국내의 여러 문제들을 토론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신봉했으나 그 견해가 다양했고, 실천적으로는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그룹 내에 더 급진적인 소그룹이 몇 개 만들어졌다. 이들은 농민봉기와 비밀문서의 인쇄 · 배포를 논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무르익기 전인 1849년 4월, 밀고로 주도자들이 체포되고, 9월까지 250여 명이 취조를 받았다. 재판 결과 21명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으나, 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황제의 특별명령이 떨어져 시베리아 유형 또는 징역으로 감형됐다.

 

1848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반동이 더욱 강화됐으나, 타오르기 시작한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진보적인 청년들은 혁명사상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해외에 있던 게르첸은 다시 가열차게 혁명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853년에는 런던에서 '자유 러시아 출판사'를 열어 러시아의 긴급한 사회 · 정치문제들을 다루고, 니콜라이 체제의 결함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유인물과 논문들을 인쇄 · 배포했다.

 

게르첸은 한편으로, 1848년 혁명의 좌절을 겪은 뒤 서유럽 형의 역사발전에 의문을 품고 러시아의 독자적인 발전 기능성을 탐구했다. 그 결과로 독특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이 창출됐다.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공동체(미르)에 토지를 넘겨, 토지에 얽매인 농민들을 해방함과 동시에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게르첸의 이 '농민사회주의'는 뒤에 좀더 다듬어져 나로드니키의 교의인 인민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게르첸은 또한 1855년에 정기 논문집 〈북극성〉을 간행하고, 1857년에는 오가료프와 함께 정치잡지 〈종(코로콜)〉을 발행하여 전제와 농노제를 가차없이 비판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운동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다. 한편, 국내에서는 네크라소프, 체르니셰프시키, 도브롤류보프 등이 《현대인》 지 주변에 모여 러시아의 현실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니힐리즘의 창시자이자 무정부주의의 사도' 바쿠닌은 1840년까지 스탄케비치, 벨린스키와 사귀면서 독일철학을 공부했다. 1840년 베를린 대학 재학 중 헤겔 좌파가 됐고, 이어 프루동 등과 접촉하면서 무정부 사회주의자가 됐다. 그때부터 그는 러시아 및 전 세계의 국가 · 사회 · 경제 · 문화 전반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는 초기의 한 논문에서 "파괴에의 정열은 그 자체가 창조적 정열"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존질서의 파괴를 강조했다.

 

1848년 게르첸이 파리에서 혁명의 붕괴를 씁쓸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는 각국을 뛰어다니며 봉기를 호소하다가, 다음 해 독일 드레스덴 봉기에서 체포됐다. 1851년 러시아 정부에 인도된 그는 수감 · 유배 · 탈주 · 망명생활을 거쳐 1861년 런던으로 왔다. 런던에서 그는 입장은 비록 달랐지만 게르첸의 《종》 발행에 협력한다. 그 역시 농민공동체를 러시아의 희망으로 간주하게 됐던 것이다.

 

이후 그는 러시아 인민주의의 한 조류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러시아 사회주의의 한 분파를 이끌다가, 그 뒤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무정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다.

 

1840년대와 1850년대를 거치며 러시아에는 혁명적 민주주의와 러시아 사회주의의 씨가 뿌려졌다. 사람마다 그룹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이 뿌린 씨는 1860년대의 더 깊숙한 논의로 기름진 자양분을 얻어 1870년대에 다시 인민주의라는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이 뿌리는 곧 엄청난 에너지로 러시아의 대지를 타고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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