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격퇴(1812년)
프랑스 혁명을 집어삼키며 1804년 마침내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온 유럽을 손에 놓기 위해 전쟁에 박차를 가한다. 1805년 중부 유럽의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두 황제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 러시아 연합군이 맞붙은 것이다. 이른바 3제 회전이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연합군을 궤멸시키면서 유럽 패권의 기반을 다진다. 전쟁에 진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고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이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신식무기와 뛰어난 전술을 앞세운 프랑스군에게 거듭 패배한 후 1807년 마침내 강화를 맺는다. 나폴레옹의 패권을 굳힌 유명한 틸지트 화약이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시키는 등 큰 타격을 입으나, 러시아의 입지는 오히려 강화된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와 화해하는 대신, 주변의 다른 나라와 싸움을 벌여 핀란드와 그루지야 등을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 많은 곡물을 수출하고 있던 러시아의 귀족들이 곧 대륙봉쇄령에 반발하여 밀무역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그것을 묵인하다가 1810년에 이르러 영국과 공식적으로 무역을 재개하며 프랑스와의 일전을 각오한다. 한편, 중서부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도 이제 러시아가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마침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왔다. 모두 합해 22만밖에 되지 않던 러시아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고육지책으로 강구한 것이 초토화 작전이었다. 후퇴하면서 집과 가축과 식량을 모두 불태워 나폴레옹군이 기식할 곳을 없애버린 것이다.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눈에 비친 것은 8할 이상의 집이 불타버린 폐허였다. 절반 이상이 외국군이던 나폴레옹군의 병력은 급속도로 줄어갔다. 반면에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침략자에 맞서 조국을 수호하는 전쟁에 나서자는 의식이 나날이 고조돼갔다.
알렉산드르 1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노장군 쿠투조프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8월 말 모스크바 근교 보로디노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된 전투는 결국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양군 모두 5만이 넘는 군대를 잃었다. 나폴레옹은 후에 이 싸움을 두고 '생애에 가장 힘들었던 전투'였다고 회고했다.
쿠투조프 사령관과 알렉산드르 1세는 마침내 모스크바를 비우고 후퇴하는 작전을 쓰기로 했다. 9월 초 나폴레옹은 남은 11만의 군대를 이끌고 아무도 없는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런데 그날 밤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더니 4일 만에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폐허로 변해버렸다.
불타는 모스크바
그러나 알렉산드르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해 따라 추위는 더 빨리 찾아와 겨울옷도 없는 나폴레옹군의 괴로움을 가중시켰다. 거꾸로 부하를 보내 알렉산드르에게 강화를 구했으나 묵살당했다.
마침내 1개월 만에 나폴레옹은 퇴각을 결정했다. 나폴레옹군이 퇴각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던 러시아군이 습격을 개시해왔다. 곳곳에서 농민 파르티잔이 일어나 앞길을 막고 옆구리를 쑤셔왔다. 혹독한 동장군도 한몫 거들었다. 이윽고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빠져나와 군대를 돌아보니 파김치가 된 3만의 패잔병 부대뿐이었다.
그 사이에 쿠투조프는 죽었으나 러시아군은 황제를 따라 나폴레옹군을 계속 추격했다. 1814년 3월 러시아군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일등 공로를 인정받으며 전후 처리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알렉산드르는 기독교의 정의와 사랑을 내세우며 신성동맹을 제창하여 유럽의 복고 반동에 앞장선다. 그 부산물로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양도받아 폴란드 왕국을 세우고 그 왕을 겸임하는 소득도 얻는다.
1812년의 나폴레옹 격퇴 전쟁은 러시아에서 '조국전쟁'으로 불린다. 영웅적인 투쟁으로 적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 1813~1814년의 원정 싸움에서까지 대승리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러시아인의 민족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됐다.
러시아 작가와 음악가와 화가들은 조국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어 많은 예술작품을 남겼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그 대표작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선진문물과 사상을 깊숙이 접함으로써, 조국 개혁의 의지를 다지고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 계기를 갖는다.
한편으로 조국전쟁은 사람들에게 국민, 특히 그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병사들이 대부분 농민의 자제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앞장선 것도, 전제와 농노제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바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
데카브리스트의 반란(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1825년 12월 14일, 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서 일어난 청년장교들의 반란. 카 코리만 작. 1830년대
나폴레옹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정치를 일임하고 국제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한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나폴레옹 전쟁 때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의 공기를 흠뻑 쐬고 돌아온 청년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이 같은 반동정치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여기서 입헌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운동이 생겨난다. 애국 청년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 트루베츠코이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결사 '구제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뒤떨어진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동맹은 '복지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국의 스파이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군관구가 있는 남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결사'로 갈라졌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페스텔 자신이 기초한 것으로써, 농노해방, 신분제 폐지, 공화제 등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뒤에 이 결사에 슬라브 민족들의 연방을 목표로 하는 '통일 슬라브 결사'와 '폴란드 애국 동맹'이 합류한다.
북방결사에서는 니키타 무라비요프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1823년에 들어서면서 북방결사에도 시인 릴레예프와 베스투제프 형제 등, 공화주의자들이 가입하여 의견이 갈라진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 연안의 요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일설에는 신비주의에 빠져 은둔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18세기 말 파벨 치세에 제정된 제위 계승법에 따르면, 바로 아래 동생 콘스탄틴이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카톨릭 교도인 폴란드 백작의 딸과 재혼한 뒤 제위 포기 의사를 비쳐 형 알렉산드르의 승인을 받은 바 있었다. 따라서 제위는 다음 동생 니콜라이가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이 중대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니콜라이도 몰랐고, 국가평의회도, 장관들도 몰랐다. 임종에 입회한 측근들도 아무 말을 듣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콘스탄틴의 즉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로원과 군대는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바르샤바에 있던 콘스탄틴이 제위 포기 의사를 거듭 확인하고 1822년에 쓴 알렉산드르의 비밀성명이 공표된 후 니콜라이가 제위를 수락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826년 봄에 거사할 계획이었던 모의자들은 이 혼란을 틈타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계획을 숙의했다. 현재 동원 가능한 3개 연대가 각기 다른 한 연대씩을 끌어들여 모두 6개 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남은 군대들은 압도되어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 뒤 공격에 나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장악한 다음, 니콜라이에게 헌법제정의회를 소집케 하고 그 사이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이 속출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장교의 배신으로 거사계획이 니콜라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모자들은 다급해졌다.
시인 릴레예프는 거사의 지도자로 뽑힌 트루베츠코이 공에게 지금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실패한 것이라면 앉아서 당하느니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다가 죽자."
옆에 있던 동료가 릴레예프를 얼싸안으며 외쳤다.
"우린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런 죽음이다."
마침내 즉각 봉기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12월 14일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 선서식 날, 베스투제프 형제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권력을 찬탈한 니콜라이에 맞서 콘스탄틴을 지키자고 호소하여, 약 3,000의 병사를 이끌고 원로원 광장으로 왔다. 소수의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이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트루베츠코이 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자가 없는 반란군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선 채로 광장을 지켰다. 몇 배에 달하는 정부군이 광장 주위를 포위했다. 양군은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서서 대치했다.
새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첫날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진무에 나선 밀로라도비치 장군은 민간인 카호프스키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겨울의 짧은 낮은 벌써 저물고 있었다. 이윽고 니콜라이가 발포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만에 광장은 깨끗이 정리됐다.
남러시아에서도 페스텔 등 지도자가 체포된 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와 류민의 지도하에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됐다.
니콜라이는 반란 관여자 약 600명을 체포하여, 그중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 이렇게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운동에는 엘리트 귀족청년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을 무시했다. 거사에 민중을 끌어들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뜻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하급장교가 주축을 이루던 이들은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고립된 귀족청년들의 무모한 항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그러나,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차르의 전제체제를 타도하고자 했다.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가 전제체제를 대체해야 했다. 이런 뜻에서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러시아 최초의 혁명운동이었다. 이들의 봉기와 처형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생을 전제정치에 대한 투쟁에 바쳤던 러시아 혁명운동의 선구자 게르첸은 항상 '다섯 명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순교의 죽음으로 찬양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계획을 가지고 일으킨 이 첫 번째 혁명운동의 의의와 도덕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론은 확신을 불러일으키고 본보기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받은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이후, 푸시킨과 네크라소프의 시에 등장하여 널리 애송되고, 러시아의 뜻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깊이 각인되면서 러시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르첸과 바쿠닌 (0) | 2014.09.13 |
---|---|
유럽의 헌병 (0) | 2014.09.13 |
실패로 끝난 근대화의 시도 (0) | 2014.09.13 |
폴란드, 지도에서 사라지다 (0) | 2014.09.13 |
성난 카자흐와 농민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