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실패로 끝난 근대화의 시도

구름위 2014. 9. 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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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와 초기 개혁정치(1801년 ~ 1812년)

 

 

나폴레옹과 함께 회담하기 위해 배에서 내리는 알렉산드르 1세
1807년 6월 25일. 이 회담에 의해 틸지트 조약이 맺어졌다. 베르사유 미술관 소장
 
1799년 말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무서운 음모가 싹트고 있었다. 황제 파벨의 전횡과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둘씩 셋씩 모여 밀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파벨을 폐위시키고 황태자 알렉산드르를 옹립한 뒤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중심인물은 외무참사회 부총재 파닌이었다. 젊은 파닌은 노련한 정치가 팔렌을 음모에 끌어들였다. 그밖에도 몇 명의 관리와 장교가 음모에 가담했고, 전통적인 협조관계를 깨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황제 파벨에게 불만을 품은 영국대사도 관여했다. 황태자 알렉산드르도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황제 파벨은 파닌을 수도에서 추방해버렸다. 그리고 요새 형태로 꾸민 미하일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01년에 들어 반역의 낌새를 확실히 눈치 챈 황제는 밤 9시부터 수도에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수도의 지사이자 근위대 사령관이었던 팔렌 백작에게 자신의 경호를 강화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바로 그 팔렌이 음모의 주모자였으니, 황제의 목숨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801년 3월 11일 밤, 한 무리의 근위병이 황제의 침실에 뛰어들었다.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며, 한 장교가 스카프를 풀어 황제의 목을 졸랐다. 파벨은 죽고, 아들 알렉산드르가 제위를 계승했다. 러시아 최후의 궁정 쿠데타였다.

 

알렉산드르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총애를 받던 손자로서, 어려서부터 여제의 극진한 관심하에 특별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스위스의 공화주의자 라 아르프에게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그는 진보 사상을 습득하고 자비심도 길렀다.

 

러시아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어느 정도는 파악했다. 불합리한 행정체계와 농노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러시아가 발전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오랜 세월 계속 강화되기만 해온 전제체제의 포로이기도 했다. 귀족들 역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의 소박한 개혁의지를 꺾는 세력이었다.

 

제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는 아버지를 죽인 '공신'들을 물리치고 '젊은 친구들'이라 불린 코추베이, 스트로가노프, 노보실체프, 폴란드인 차르토리스키 등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황제와 함께 비밀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혁 프로그램을 짜나갔다.

 

1802년에 첫 성과가 나왔다. 협의체인 참사회(콜레기아)가 폐지되고 부가 설치됐으며, 각부 장관들의 협의회가 구성됐다. 근대 관료제의 틀을 갖춘 것이다.

 

이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농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귀족들의 자발적인 농노해방이 허가됐고, 발트 연안 지역의 경우, 제한적으로 농노를 해방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대학과 각급 학교도 많이 설립했다. 하리코프, 빌나에 대학이 세워졌고, 이어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 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755년에 세워진 모스크바 대학과 스웨덴인이 1632년에 개설한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을 합쳐 러시아는 모두 6개의 대학을 갖게 된다. 중등학교와 전문학교도 계속 설립됐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나폴레옹 타도를 주장하는 '젊은 친구들'과 황제 간에 충돌이 생겨 1803년 비밀위원회는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고, 1805년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개혁은 중단된다.

 

1807년 프랑스와 강화를 맺고 1808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겨 핀란드를 얻은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다시 국내문제로 관심을 돌린다. 황제는 스페란스키라는 유능한 관료를 중용하여 큰 임무를 맡겼다. 스페란스키는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 출신이었으나 폭넓은 안목과 남다른 기획력을 가지고 있었다.

 

1809년에 완성된 그의 국가 개조안은 이상과 현실을 절충한 것으로서, 법에 기반을 둔 절대권력의 통치를 모토로 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헌법안의 요지는 이러했다. 간접선거로 향 · 군 · 현에 각급 두마를 설치하고, 각급의 두마에서 각각 행정부와 사법부를 선출한다. 그리고 현 두마에서 선출된 후보 중에서 황제가 국회(국가 두마) 의원과 최고 사법부의 법관을 임명한다. 국회는 입법기관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는 각부 장관의 자문에 응하고 장관들에게 권고를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3권 분립의 토대 위에 황제가 서서 전체를 통제한다. 황제를 돕는 기관으로 별도의 국가평의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러시아 국민을 세 계층으로 나누고 계층별로 각각 다른 권리를 주는 안도 들어 있었다. 즉, 귀족에게는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참정권 · 재산권 등 모든 권리를 주고, 중류층에게는 일반 시민권과 제한된 참정권을 부여하며, 농노와 노동자에게는 일반 시민권만 부여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계획은 1810년 국가평의회가 설치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국가평의회는 고위 관리와 장교들 중에서 황제가 임명하는 의원들로 구성되어 황제의 입법권 행사에 자문을 행하는 기관이 됐다. 스페란스키가 초대 의장이 되어 1812년 물러날 때까지 활동했다.

계획이 실현되지 못한 일차적인 원인은 황제에게 있었다. 자유주의와 전제체제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에게, 자유주의라는 이념에는 자치의 개념이 들어 있지 않았고, 그는 또 헌법은 원하되 군주의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지지 않는 헌법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한 귀족계급의 반발도 컸다.

 

스페란스키는 중앙정계에서 황제의 신임 외에는 다른 뿌리가 없는 고립된 존재였다. 1810년 프랑스와의 협조체제가 깨지고 반프랑스 분위기가 강화되는 가운데 스페란스키는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았다. 황제도 마침내 동요하여 1812년 3월 스페란스키는 유형에 처해진다.

 

그와 더불어 그의 원대한 꿈은 깨지고 알렉산드르 1세의 위태롭던 개혁의지도 실종되고 만다. 이로써 19세기 초두에 진행된 근대화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는 기나긴 동면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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