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폴란드, 지도에서 사라지다

구름위 2014. 9. 1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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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팽창과 폴란드 분할(1772년 ~ 1795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의 풍자도
제목은 〈국왕들의 과자〉. 왼쪽부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폴란드의 스타니슬라브,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파리, 폴란드 도서관 소장
 
제국으로 발돋움해가던 러시아를 가로막는 나라가 셋 있었다. 북으로는 스웨덴, 남으로는 투르크, 서로는 폴란드가 버티고 서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하나, 스웨덴 문제는 표트르 대제가 해결했다. 이어 예카테리나 대제가 다른 두 문제를 해결했다. 여제의 치세하에 러시아는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판도를 넓혀 오랜 숙원을 이룬다. 당시 유럽의 정세도 러시아의 팽창을 도왔다.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미국) 문제를 몰두해 다른 곳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모든 시선을 파리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흑해 연안과 남부의 초원지대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역대 왕과 황제들이 이를 시도하여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그곳의 대부분은 여전히 투르크의 영향권하에 있었다.

 

1768년부터 6년간 벌어진 제1차 러시아 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투르크를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774년 7월에 체결된 조약에서 러시아는 흑해 북동부 연안과 크림 반도의 일부를 손에 넣었고, 러시아 상선이 투르크 해역에서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또한 투르크 영토 내의 교회와 정교도의 보호권을 인정받아 향후 투르크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1783년에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크림 한국을 병합하여 몽골 지배의 마지막 잔재를 없앴다. 이어 1785년에는 세바스토폴을 기지로 꽤 큰 규모의 흑해함대를 구축했다.

 

당시 예카테리나 여제와 그 애인 포튬킨은 원대한 '그리스 계획'을 꿈꾸고 있었다. 투르크를 정복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기독교 제국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와도 교감을 거친 이 야심적인 안은 추진자인 포튬킨이 죽으면서 결국 종이 위의 계획으로 끝나고 만다.

 

1787년 투르크와의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됐다. 굴욕을 씹고 있던 투르크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영국 · 프랑스 · 프로이센 · 스웨덴 등 유럽 열강의 비호하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이에 맞섰다. 5년간의 싸움에서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대는 연승을 거두며 발칸 반도 깊숙이 쳐들어갔다.

 

1792년 1월의 이아시 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 북서부 연안을 얻고 크림 합병도 인정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의 남쪽 영토는 자연 경계선에 이르렀고, 투르크 문제는 사실상 종결됐다.

 

서쪽의 폴란드 문제는 투르크 문제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폴란드는 오랜 옛날 폴란드 평원에 뿌리를 내린 이래 주변의 넓고 기름진 땅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동유럽의 대국이었다. 게다가 주변 3국, 즉 러시아 외에도 당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미묘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1569년의 루블린 연합으로 사실상 리투아니아를 합병하면서 동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폴란드는 17세기 들어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방 귀족들의 힘이 점점 강화되면서 선출된 왕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됐고, 지방의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세임, 즉 의회는 거부권의 남발로 그 기능을 잃어갔다. 한 의원만 거부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음은 물론, 의원 한 사람의 발의로 세임이 해체되면서 이전에 통과시킨 법안들마저도 폐기되는 체제였던 것이다. 당시의 폴란드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였다.

 

게다가 폴란드의 영토에는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종교를 믿으며 살고 있었다. 폴란드의 모든 권리는 국민의 약 8%를 차지하는 중상층이 장악하고 있었고, 국민의 대부분은 최악의 농노 상태에 있었다. 인접한 세 강국은 호시탐탐 폴란드를 노렸다.

 

주변 3국 중에서도 폴란드에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던 나라가 폴란드에 의해 국토가 동서로 양분돼 있던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팽창을 묵인해주면서 폴란드의 노른자위를 노리고 있었다. 폴란드의 지배층이 러시아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도 결단을 앞당기는 한 요인이 됐다. 마침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폴란드 영토의 일부 분할을 제의해왔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제의를 수락했다.

 

1772년의 제1차 분할로 러시아는 서드비나 강과 드네프르 강 동쪽의 길쭉한 영토를 얻었고,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와 그 인근의 땅을 차지했다. 프로이센은 폴란드 프로이센 지역의 대부분을 얻었다. 땅은 가장 작았지만 프로이센은 이로써 동서 영토를 하나로 연결하는 가장 알찬 성과를 올렸다.

 

폴란드인들은 이에 자극받아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1791년 5월 새 헌법이 통과됐다. 군주는 세습제가 됐고, 왕에게 행정권이 주어지고 내각이 구성됐으며, 입법권을 부여받은 의회는 다수결 원칙을 채택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이 헌법을 인정했으나, 구체제하의 폴란드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러시아는 폴란드의 일부 지도층을 선동하여 분란을 일으킨 후 폴란드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러자 프로이센도 입장을 바꿔 침략에 합세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국내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1793년 1월 제2차 분할이 행해졌다. 러시아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손에 넣었고, 프로이센은 서부 폴란드를 차지했다.

 

1794년 3월 폴란드인들은 코시우스코의 지도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서 용감히 싸웠으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오스트리아도 다시 동맹국에 합세했다. 1795년 세 나라에 의해 제3차 폴란드 분할이 행해지고, 폴란드는 지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폴란드인은 이후 120여 년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으며 처절한 싸움을 계속한다.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로 옛날 키예프 러시아가 영유하던 서부지역의 거의 전부를 다시 손에 넣었고 거기에다 리투아니아까지 지배하게 됐다. 이로써 러시아는 서로는 리투아니아, 남으로는 흑해와 아무르 강, 동으로는 태평양에 이르는 대제국을 완성했다.

 

19세기 러시아의 역사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마련한 이 무대, 즉 드넓은 영토, 특권을 가진 귀족의 지배, 전제정부, 더 가혹해진 농노제, 폭넓게 유입된 서유럽 문화의 토대 위에서 그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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