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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의 개혁(18세기 초)
귀족의 수염을 자르는 광경 표트르는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턱수염을 자르게 하고 수염에 세금을 매기게 했다.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박력 있고 개성적인 군주 표트르 1세는 실권을 잡은 뒤부터 죽어서 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끊임없이 러시아를 개혁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의 군대와 정부, 재정과 산업, 교육과 문화와 국민생활, 그 모두에 걸쳐 행해졌다. 표트르가 모델로 삼은 것은 서유럽이었다. 그는 뒤처진 러시아를 혁신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치세 말기부터 러시아는 구태를 벗고 새롭게 도약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추동력은 군사적인 필요였다. 당시의 유럽 열강들, 특히 스웨덴과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군대가 강해져야 했고, 강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튼튼해야 했고,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산업이 발달해야 했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행정체계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야 했고, 근대적인 행정을 유지하려면 교육을 증진시켜야 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목적과 별 관계없는 개혁조치도 많이 행해졌고, 군사적인 필요에 앞서서 개혁이 단행된 것들도 많다. 요컨대 표트르는 짧은 기간에 군사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러시아를 유럽 열강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유럽 시찰을 마치고 온 직후 표트르는 자기 손으로 귀족 몇 명의 수염을 잘라버리고 전국에 수염 삭발령을 내렸다. 분리파 정교도들과 전통주의자들은 사람의 수염을 깎는 것은 신을 거스르는 행위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표트르는 거추장스런 수염을 자르는 데서부터 개혁은 시작된다고 믿어 강제로 수염 삭발을 집행했고, 그래도 수염을 깎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수염 세'를 물렸다. 더불어 귀족과 군인들에게 서유럽식 옷을 입도록 명령하고 국민들에게도 긴 소매를 자르고 간편한 옷을 입도록 권장했다.
표트르의 개혁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사부문이다. 그는 싸움이 있을 때에만 소집되는 종래의 러시아군을 가지고서는 유럽 열강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상비 육군을 강화하고 상비 함대를 새롭게 만들었으며, 전 국민에 공평하게 부과되는 징병제도를 확립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교관들을 초빙하여 새로이 마련한 교범으로 부대를 훈련시켰고, 무기도 근대적으로 개량했다.
행정기구도 합리적으로 개편했다. 업무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던 40여 개의 관청을 없애 새롭게 정비하고, 중앙에 집중돼 있던 행정권한을 지방으로 분산시킨 것이 그 골격이다. 중앙에서는 사실상 소멸해버린 전국회의와 귀족회의 대신에 9명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을 발족시켜 행정 · 사법 · 재정의 모든 면을 감독케 하고, 각각 12명의 위원(외국인이 한 명 이상)으로 이루어진 9개 참사회(콜레기아)를 구성하여 군사 · 사법 · 외무 · 재무 · 경제기획 등의 임무를 맡겼다.
지방에는 현(구베르니야) 제도를 도입, 전국을 8개 현으로 나누어 지방의 자잘한 문제를 처리케 했으며, 도시에도 부분적으로 자치권을 주었다. 뒤에 현의 수가 늘어나고 현 밑에 군(우에즈드)이 설치된다. 지방제도 개혁의 주된 목적은 세수를 늘리는 것이었으나, 제도 자체가 곧 기능마비 상태에 빠지고 만다.
교회도 탈바꿈시켰다. 총주교를 없애고 종무원을 발족시켜 한 명의 세속인의 감독하에 10명의 성직자가 모여 교회 일을 결정케 했다. 그로 인해 교회의 조직과 방침, 교회 재산 등이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됐다.
늘어가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관 · 수염 · 꿀벌 · 목욕탕 등에까지 과세를 했으며, 농민과 농노들이 한지붕 밑에 모여 살아 과세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는 호구세를 폐지하고 인두세 제도를 확립했다. 그와 더불어 6년간에 걸쳐 인구조사를 실시, 과세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500만 명의 성인 남자를 장부에 등록시켰다.
산업을 육성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공장 수십 개가 국비로 세워졌고, 그보다 훨씬 많은 공장이 특권을 얻은 민간인의 손으로 건립됐다. 우랄 산맥에서 구리와 철광산을 개발했고, 직물 · 유리 · 피혁공업 등을 발전시켰다.
교육과 문화에서도 많은 혁신이 이루어졌다. 청년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국내에도 학교를 세웠다. 초기에 세운 학교는 산술 · 기하 · 지리 · 항해술 등 주로 군사상 필요한 과목들을 가르치는 일종의 전문학교였으나, 뒤에 가서 전국에 수십 개의 초등학교를 세웠다. 그와 더불어 사관학교와 의학교 · 공공 도서관 · 박물관도 세우고, 대학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설립도 준비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러시아 최초의 신문을 편집하고 문자도 쓰기 편하게 개량했으며, 슬라브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꾸고 각종 서적도 간행했다. 역법도 개정하여, 성서를 기준으로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햇수를 세고 9월부터 새해를 시작하는 종래의 달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을 새 달력으로 채택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 전까지 시행된 러시아 구력이다.
표트르의 개혁은 국민생활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다. 여성이 밖에 나서지 않는 관습을 폐지하여 남녀가 모임에서 자유롭게 교제토록 했고, 사람들의 예의와 복장 등에까지 세심한 지시를 내렸다. 농가의 구조에 대해서도 칙령을 내려 화재에 방비케 하고 국민보건을 위한 규칙도 하달했다.
표트르는 계몽 전제군주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견해로는 전체가 잘 되려면 개개인은 국가에 복종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국민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때로는 무서운 벌칙을 두어 강제로 집행했다.
그의 급격한 개혁과 끝없는 전쟁, 그리고 잔인한 성격은 광범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과단성 있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인 결과 새로운 러시아의 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의 러시아는 표트르와 연관짓지 않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개혁은 러시아에 깊고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대국으로 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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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성립(1721년)
표트르 대제의 치세에서 그 무대가 되었던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모습 1721년 북방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그해 10월 스웨덴과 니슈타트 조약이 체결됐다. 원로원 의원들은 감사와 찬탄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군주에게 '조국의 아버지, 황제(임페라토르)'의 칭호를 증정했다. 이로써 러시아 제국이 탄생했다. 이제 러시아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주변의 강국과 싸우던 시대에서 벗어나,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대국으로 안팎에 세력을 팽창시켜나가게 된다.
러시아 제국의 토대는 농노제였다. 표트르는 1718년부터 시작된 인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다양한 범주의 농민들을 영주 휘하의 농노와 국유지 농민의 두 가지로 정리하고 인두세 제도를 시행에 옮겼다. 세금의 징수는 비장에 분산 배치된 군대에 맡겨졌다. 1722년에는 공장을 경영하는 상인들에게 농노와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를 구입할 수 있게 했다. 농노의 노동력을 이용, 공업화를 추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국가에 대한 의무봉직 제도와 관료제였다. 1722년 관등표가 제정됐다. 문관 · 무관 각 14등급의 관등이 정해지고 승격의 기준이 작성됐다. 토착귀족(보야레)과 사족(드보랴네)의 구별이 없어져 모두가 같은 귀족이 됐고, 귀족이 아닌 자도 일정 관등에 이르면 세습귀족이 될 수 있었다.
표트르가 죽은 직후에 그가 준비한 제국 과학 아카데미가 창설됐다. 과학 아카데미는 수학 · 역사학 · 물리학 등의 전공과정을 갖춘 대학의 전신으로서 러시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와 더불어 각급 학교가 설립되고 광범한 문화 · 교육사업이 행해지면서, 러시아에 근대화의 기반이 다져짐과 동시에 러시아 민중이 서서히 자각적인 존재로 성장해나가게 된다.
표트르는 1725년 2월, 53살의 나이로 정력적인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예컨대 슬라브 파에게 표트르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배신한 자였고, 서유럽파에게는 비길 데 없이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듯이, 그는 위대한 애국자로서 러시아인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고 러시아를 대국으로 성장시킨 사람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찬미자이며 우파 지식인이었던 역사가 포고진은 편향된 시각이기는 하나, 표트르 개혁이 국민생활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위해 대단한 일을 했다. 눈에 보여도 믿기지 않고 한없이 나아가도 끝에 다다를 수가 없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집에서, 거리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법정에서, 군부대에서, 산책로에서, 그야말로 도처에서 그와 맞닥뜨리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뜬다. 오늘이 며칠인가? 1841년 1월 1일 표트르 대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탄생을 기점으로 하여 해를 세도록 명했고 1월부터 달을 세도록 명했다.
옷 입을 시간이다. 우리의 옷은 표트르 대제가 정한 모양과 기준에 따라 만들어지고 옷감은 그가 세운 공장에서 만들며 양털은 그가 기르기 시작한 양으로부터 깎은 것이다.
책이 눈길을 끈다. 표트르 대제가 그 글자를 도입했고 자신이 직접 그 글자체를 도안했다.
신문이 들어온다. 표트르 대제가 신문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산다. 비단 목도리로부터 구두 밑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표트르 대제를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표트르 대제가 제작을 지시한 것이고, 어떤 것은 그로 인해 쓰이게 되거나 개선된 것들이며, 그 모든 것이 그의 배에 실려 그의 항구로 오고, 그의 운하와 도로를 통해 이곳까지 온다.
저녁을 먹는다. 소금에 절인 청어로부터 그가 재배하도록 명한 감자와 그가 재배하기 시작한 포도로 빚은 포도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식들이 표트르 대제에 관해 말할 것이다.
대학에 가본다. 교회학교 아닌 일반학교는 표트르 대제가 처음 만들었다.
우리는 한 등급을 부여받는다. 표트르 대제의 등급표에 따라서. 고소장 하나를 제출한다. 표트르 대제가 그 서식을 정했다. 그것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정의의 거울 앞에서. 외국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유럽 국가들 가운데에 서게 했고, 그들에게서 러시아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으므로."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일구어놓은 이러한 토양으로부터 새로운 야심과 희망을 부풀리고 문화와 군사와 과학 모든 면에서 새로운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19세기의 잔혹한 압제와 20세기의 대변동으로 이어지는 길도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이제 첫발을 내디딘 데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판도에서도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흑해 연안과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지방, 극동지방이 아직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와 있지 않았고, 특히 서부와 남부에서는 세계의 강국들과 마주하여 아직도 영토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제위 계승의 원칙도 확립되지 못하여, 제정 러시아는 18세기가 다 가도록 왕조의 틀을 다지지 못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40년도 못 되는 기간에 3명의 여제를 포함하여 무려 7명이 제위에 올랐다. 행정기구도 아직 부실하여 각 기관의 권한이 명확하게 설정되지 못한 상태였고, 표트르가 설치한 참사회도 얼마 안 가 그 기능이 소멸하고 말았다. 지방행정체계는 더욱 부실하여 많은 혼선을 초래했다.
문화생활 면에서도 아직은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옛 러시아 문화가 파괴된 뒤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서유럽과의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뚫리면서 서유럽의 문화가 엄청난 속도로 흘러들어왔으나, 1755년에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한 위대한 과학자이자 인문학자 로모노소프 등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차례차례 해결되고 표트르 대제로부터 시작된 근대화 정책이 현저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의 걸출한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시대를 지나면서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