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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진의 난(1670년 ~ 1671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라진과 아우 프롤(왼쪽 끝)
15세기 중엽부터 농노제가 강화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자유를 찾아 카자흐의 세계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16세기가 되면, 전에 유목민들이 지배하던 드네프르 강과 돈 강의 하류, 볼가 강의 중 · 하류 등지에 막강한 카자흐 집단이 형성된다1).
카자흐 집단에는 도망 농민 외에도 도망 노예, 범법자, 비러시아계 유목민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독립정신이 왕성한 카자흐들은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시했다. 카자흐가 모두 모이는 집회(크루크)에서 선거로 자신들의 수령(아타만)을 뽑았고, 자유를 찾아 도망 온 사람들을 관대히 받아들였으며, 교회 분열 후에는 분리파 정교를 승인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수렵 · 어로 · 양봉 그리고 약탈행위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들의 약탈행위는 유명하여, 강과 강에 가까운 평야지대는 물론 저 멀리 흑해와 카스피 해 건너편까지도 거친 카자흐들의 활동무대였다.
카자흐는 중앙정부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정부는 이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물자를 제공하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으로 전투와 국가방위에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온 나라를 소용돌이에 빠뜨리곤 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카자흐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시베리아 개척의 선두에 선 것도, 동란시대에 볼로트니코프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된 것도,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의 주역도 모두 이들 카자흐였다. 그 뒤를 이어 카자흐 역사의 최대 영웅이 등장하니, 이가 곧 스테판 라진이다.
'스텐카'라는 애칭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스테판 라진은 돈 카자흐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층 카자흐나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난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반역을 결심한 것은 카자흐의 아타만이었던 형이 모스크바의 군사령관에게 처형당했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의 러시아는 농노제의 강화와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빈곤과 물가고, 가혹한 세금징수가 반란과 폭동을 부채질했다. 1650년에는 프스코프와 노브고로트에서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다. 프스코프에서는 한때 민중들이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1655년에는 전국에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각지에서 폭력이 난무했다.
1662년에는 은전 대신 동전을 주조하면서 고위층이 축재를 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모스크바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도가 폭도들의 손에 떨어지고 차르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폭동으로 7,000명이 처형당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각종 형벌에 처해졌다. 농민들의 대규모 탈주는 계속됐다. 이들은 줄기차게 변경으로 빠져나와 카자흐에 가담했다.
스텐카 라진의 반란은 농노, 하층 도시민, 가난한 카자흐, 억압당하던 소수민족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민요와 서사시에 그 행적이 생생하게 기록되고, 때로는 과장되어 초자연적인 영웅으로까지 승화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연유한다.
라진은 1667년 봄에서 1669년 말까지 도망 농민들인 하층 카자흐를 이끌고 카스피 해로 대규모 원정을 다녔다. 이 원정은 카스피 해 연안의 부유한 페르시아인 정착지 약탈에서 절정을 이룬다.
널리 애송되는 민요에 따르면, 스텐카 라진은 이 원정에서 페르시아 공주 하나를 포로로 잡아온다. 라진은 공주가 하도 어여뻐 늘 가까이에 두고 그녀와 정을 나누었다. 어느 날 라진은 돈 카자흐 부하들이 자신의 뼈까지 녹아내릴 것 같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라진은 조용히 일어서더니 공주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유로운 사나이 동지들 속에 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볼가여, 어머니 같은 볼가여, 당신은 우리에게 금은보화를 주었나이다. 이제 우리의 귀한 선물을 받아주소서."
그러고는 그녀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고대의 영웅 설화와 스텐카 라진의 전설이 혼합되어 생겨난 민요지만, 후대의 러시아인이 스텐카 라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막대한 전리품을 싣고 돌아오던 라진은 길을 막는 차르의 관리와 군대들을 내쳐버린다.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돈과 볼가 지방의 카자흐 지도자로 떠오른다. 그의 주위에 카자흐와 농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제 그의 생각은 페르시아의 부귀영화로부터 러시아인의 형제애로 바뀌었다. 평범한 카자흐의 모험이 카자흐와 농노를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투쟁으로 변한 것이다.
1670년 라진은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가 행동을 개시하자 농민과 하층 도시민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수비대 병사들도 그의 편이 됐다. 라진은 돈 강을 거슬러 올라가 차리친(볼고그라드)을 손에 넣은 뒤 그것에 본영을 설치했다.
스텐카 라진은 사람들에게 "귀족들에게 살해당한 알렉세이 왕자가 실은 죽지 않고 우리 곁에 있다. 모두 일어나서 그 귀족 배반자들과 지방관리들을 쓸어버리자"고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전 러시아에 '카자흐의 자유'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라진의 밀사가 그에 앞서 전국을 누비면서 그의 뜻을 전파했다. 전국이 술렁거렸다.
볼가 하구의 아스트라한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것이 돼 있었다. 이어 사라토프와 사마라가 이 카자흐 영웅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러시아의 지배자들에게 자기네 땅을 빼앗긴 바슈키르, 추바슈, 마리, 모르드바 등의 소수민족들도 그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 중앙부터 오카 강 유역에서도 학살과 약탈이 광범하게 행해졌다. 저 멀리 백해 연안의 솔로베츠키 수도원도 호응했다. 차르가 통치하는 전 지역에 반란의 불길이 타오른 것이다.
라진은 볼가 중류의 심비르스크(울리야노프)를 포위했다. 그의 부대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 그들의 앞길을 예비했다.
그러나 당시 20만에 이른 반란군은 돈 카자흐 부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정부군은 좋은 무기와 잘 훈련된 부대들을 갖고 있었다. 개중에는 서유럽 사관들에게 최신식 훈련을 받은 부대도 있었다. 정부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니주니 노브고로트가 반란군에서 정부군으로 넘어왔다. 정부군은 카잔을 거쳐 심비르스크로 공격해왔다. 라진의 군대는 참패를 당하고 차리친의 본영으로 철수했다. 스텐카 라진의 마술 같은 전설이 깨져갔다. 이윽고 상층 카자흐의 배신으로 1671년 4월 그는 체포당했다.
라진은 그의 아우 프롤과 함께 모스크바로 압송돼 붉은 광장에 던져졌다. 그는 뼈를 하나하나 부러뜨리는 가혹한 고문을 당당하게 견뎌냈다. 끔찍한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사지를 찢기고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한동안 반란의 불길은 계속 타올랐다. 수많은 마을이 재로 변했고 곳곳에 교수대가 세워져 반란군들이 처형됐다.
스텐카 라진은 죽은 후에 더 위대한 영웅이 됐다. 그를 소재로 한 민요가 만들어져 러시아 전역에서 애송되고,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그는 전설 속의 인물로 추켜올려져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영웅으로 윤색됐다. 러시아 민중들은 그가 살아 돌아와 자기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라진은 반란의 지도자였을 뿐 혁명가는 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지배자에 대한 강한 분노와 사람들을 떨쳐 일어나게 하는 호소력은 있었으나,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자신이 직접 통치자가 되겠다는 야심도 없었다. 결국 러시아의 차르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광범한 개혁을 추진하여 유능한 사람들을 길러냄으로써 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손들의 목을 맬 줄과 교수대를 마련하는 사람이 라진이 죽은 바로 다음 해에 태어나니, 곧 표트르 대제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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