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300년 왕조의 서막 러시아

구름위 2014. 9. 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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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출현(1613년)

 

폴란드에 붙잡혀 갔다 돌아온 모스크바 총주교 필라레트
 

동란이 끝난 후 1613년 초 전국회의가 소집됐다. 차르를 선출하여 정통성 있는 정부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회의에는 성직자 · 귀족 · 사족 · 도시민의 대표들과 약간의 농민대표가 참가했다. 먼저 외국인은 일단 차르 후보에서 배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얼마 후 미하일 로마노프가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로마노프 가는 러시아인에게 인기 있는 가문이었다. 이반 뇌제의 훌륭한 황후 아나스타샤가 로마노프 가 출신이었고, 차르 선출 당시 폴란드에 포로로 붙잡혀 있던 미하일의 아버지 필라레트도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다. 미하일이 당시 16살의 어린 나이였다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동란에 휩쓸려 폴란드인이나 차르 사칭자들을 섬기거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주교 게르모겐이 천거했다는 것도 신망을 높이는 요소가 됐다.

 

차르를 결정할 전국회의는 전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지방 여론을 살폈다. 국민들이 결정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전국회의는 마침내 미하일 로마노프가 러시아를 통치할 차르로 선출됐음을 공표했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1613년 7월에 차르로 즉위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열린 것이다. 플라토노프의 표현에 따르면 "전체의 뜻에 따라서 신 자신의 군주를 뽑았고, 그리하여 온 러시아가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국민이 세운 로마노프 왕조는 초창기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300여 년을 혹독한 전제정치로 일관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한다. 신의 생각에 러시아인이 정의로운 통치자를 갖기에는 아직 일렀던 모양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기는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로, 미하일과 알렉세이의 통치하에 전제권력을 재건하고 왕조의 기반을 다진 시기다. 이 시기에는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의 사회구조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졌다.

 

17세기 말에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면서 러시아는 크게 달라진다. 광범한 개혁이 행해져, 러시아는 구태를 쇄신하고 유럽 열강의 하나로 부상한다. 얼마간의 혼란기를 거쳐 18세기 후반에는 걸출한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등장하여 러시아의 위상을 다시 드높인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모든 면에서 후진적인 모습을 탈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유럽의 여러 나라가 봉건제로부터 벗어나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시민의 자유를 신장시켜가고 있던 이때, 러시아에서는 농노제와 전제권력이 더 강화돼가고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연 미하일 로마노프
그러나 군주 자질이 부족, 아버지가 실권을 잡았다. 

여제의 사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3세기가 시작된다. 이때에는 제위 계승의 원칙이 확립되어 황제 자리를 둘러싼 싸움은 없어지나, 러시아의 후진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면서 개혁과 반동이 급격하게 교차하고 지식인과 인민들 간에 개혁과 혁명의 거센 바람이 인다. 이윽고 20세기로 넘어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는 종식된다.

 

어린 나이로 즉위한 미하일에게는 그야말로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동란시대에 어지럽혀진 권위와 제도를 하루빨리 수습하고, 외국과의 전쟁도 마무리 짓고,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해야 했다. 미하일은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를 거의 매년 열어 중요한 일들을 토론에 부치고, 귀족회의(보야레 두마)에도 수시로 자문을 구하면서 러시아를 수습해나갔다. 한동안은 미하일의 아버지 필라레트가 총주교 겸 대군주가 되어 미하일과 함께 러시아를 통치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신분제 의회를 가진 제한군주제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전국회의와 귀족회의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630년대에는 한때 사족대표가 전국회의의 상설화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미하일의 뒤를 이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치세하에서 신분제도가 정착하고 관청의 수가 50개로 늘어나는 등 중앙행정기관이 정비되면서 전국회의는 점점 유명무실해져 갔다. 의회제도가 정착할 수 있는 국민적 토대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신분제 의회를 가진 제한군주제 국가에서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가혹한 전제국가로 이행해갔다.

1649년에는 전국회의의 비준을 얻어 〈회의 법전(울로제니예)〉이라는 새로운 법전이 제정됐다. 이 법전에서 군주권이 최고의 권위로 규정됨과 아울러, 사족의 영지 보유가 보장되어 토착귀족과 사족의 직위가 거의 대등해졌다.

 

한편, 법전은 도망친 농노의 추적기한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여 농노제의 법적 토대를 완성했다. 농노와 그 가족이 완전히 영주의 소유물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 농노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해갔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에 러시아는 동부 우크라이나를 손에 넣었다. 러시아의 발상지 우크라이나는 당시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강화되는 농노제와 기근을 피해 폴란드와 러시아로부터 도망친 많은 농민들이 속속 드네프르 강 하류의 카자흐 무리에 합류한다. 그리하여 그곳에 강력한 집단이 형성되니, 곧 '자포로제(급류 건너편) 카자흐'다.

 

폴란드 지주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저항이 높아가는 가운데, 1648년 드네프르 강의 모래섬에 본영을 두고 있던 자포로제 카자흐가 카자흐 고유의 자치를 부정당한 데 반발하여 들고일어났다. 지도자는 폴란드 정부에 등록된 상층 카자흐의 아타만(수령), 보그단 흐멜니츠키였다. 반란은 곧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지지 속에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나, 1651년 폴란드군에 패하고 말았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에 원조를 청했다. 차르 알렉세이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흐를 러시아의 보호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1654년 우크라이나 카자흐는 모스크바의 차르와 군신 협정을 맺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문제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쟁으로 변했다. 1667년 양국은 휴전협정을 맺고 키예프와 드네프르 강 동쪽과 우크라이나 땅이 러시아 령으로 편입됐다.

 

한편, 교회도 커다란 진통을 겪었다. 모스크바 총주교 니콘이 신앙심 깊은 차르 알렉세이의 후원하에 전례개혁에 착수했다. 1654년 주교회의는 그리스 관행에 따른 니콘의 전례개혁을 승인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사제 아바쿰을 중심으로 라스콜니키 파(분리파, 고의식파)를 형성했다.

 

1666~1667년의 공의회에서는 교권의 강화를 둘러싸고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한 니콘 총주교가 파면당했다. 이로써 교권이 완전히 차르의 권력 밑으로 떨어졌다.

 

파문당한 분리파는 정교회와 함께 국가에도 저항하는 자세를 취했다. 분리파의 거점들은 분쇄되고 지도자 아바쿰은 1682년에 화형당했다. 분리파는 분신으로 저항하여 2만 이상의 신도가 자기 몸을 불살랐다. 그 후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우랄이나 시베리아 등 벽지로 도피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간다. 교회의 분열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그때, 돈과 볼가 유역에서는 반역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카자흐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역에 도망 농민들이 가세하고, 전국에 걸친 농민들의 분노가 더해져 반란을 잉태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는 전설적인 영웅 스텐카 라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