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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1579년 ~ 1582년)
배를 타고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카자흐 부대
1579년 카자흐의 한 부대가 우랄 산맥을 넘었다. 그로부터 70년도 채 안돼 러시아인은 5,000㎞를 달려 동쪽 끝 태평양에 다다랐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실상 주인이 없던 땅을 점령해버린 것이다1). 그 동토의 땅에서 이제 엄청난 자원이 쏟아져나와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으나, 당시 러시아인의 주된 관심사는 모피였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진출의 선봉대 역할을 맡은 것은 카자흐 부대였다. 카자흐란 러시아의 변경에 살던 기마전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15세기 중엽부터 지주와 관리의 압제에 못 이겨 많은 농민들이 변경지방으로 달아나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이들 러시아 도망 농민도 카자흐로 불리게 된다. 이들의 생계수단은 수렵 · 어로 · 약탈행위였다.
에르마크는 볼가 강을 항행하는 배를 습격하여 약탈하는 카자흐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그가 스트로가노프와 만난 것은 1577년의 일이다. 러시아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이름 높은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당시 이반 4세의 특허를 받아 우랄 지방에서 모피산업 · 제염업 · 광산업 · 농림어업 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와 그의 부대에게 후한 대가를 주면서, 당시 우랄 산맥 너머 오브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한국의 쿠춤 칸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는 일을 맡겼다. 2년 뒤에는 다시 에르마크를 불러 시비르 한국을 정복하면 차르께서 후한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유혹했다. 대신 러시아 정부에서 대포 · 식량 · 화승총 등 전쟁물자 일체를 제공키로 했다. 에르마크는 쾌히 승낙했다.
1579년 에르마크는 천여 명의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원정에 나섰다. 오브 강의 지류인 이르티슈 강변에서 벌어진 쿠춤 칸과의 전투에서 에르마크의 부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화승총을 갖고 있던 에르마크 부대는 활과 창을 쓰는 쿠춤칸의 군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에르마크의 부대는 곳곳에서 원주민의 부대를 패배시키면서 영토를 점령해나갔다.
1582년 에르마크의 부대는 시비르 한국의 수도 시비리에서 쿠춤칸과 맞섰다. 쿠춤 칸의 군대는 성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이 거듭됐다. 마침내 에르마크가 후퇴작전을 펴서, 쿠춤 칸의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해낸 후 성 안을 급습하여 시비리를 장악했다. 에르마크는 시비르 한국을 이반 4세에게 헌상하고 후한 상을 받았다. 그러나 1585년 8월 에르마크는 시비르 한국의 잔존세력들에게 기습당해 부상을 입고 도망치다가 이르티슈 강에 빠져 익사했다. 그의 남은 부대는 시비리를 버리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 후 이반 4세는 러시아 정규군을 보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진출에 나섰다. 1588~1589년에 튜멘과 토불스크 요새가 건설되고, 이어 1598년에 보리스 고두노프가 시비르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러시아에 편입시켰다.
에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으로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사는 미국의 서부 개척사와 유사한 데가 많다. 드넓은 대지와 풍부한 자원, 개척자들의 출신과 그 정신, 개척의 파급효과 등등. 그러나 속도는 러시아가 훨씬 빨랐다. 1630년에는 벌써 레나 강 기슭의 야쿠츠크에 도달했고, 1639년에는 카자흐의 작은 부대가 태평양에 다다랐다. 1648년에는 또 다른 카자흐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서 시베리아 북동부 끝을 돌아 베링 해협을 통과했다.
동쪽 끝에 이른 러시아인은 거기서 다시 남하하다가 아무르 강(흑룡강)에서 중국인민들과 충돌한다2). 그 뒤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맺어져 스타노보이 산맥을 따라 국경이 그어졌다.
당시 시베리아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모피였다. 그곳에는 검은 담비 · 족제비 · 비버 등 털과 가죽이 좋은 동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교역에서 모피는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 이어 금은이 발견되면서 광물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서시베리아 지역부터 느린 속도로 농경 정착지도 늘어간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본격적으로 개발의 손길이 미치는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
한편 18세기부터 유형수가 늘어가면서, 시베리아는 러시아인들에게 혹독한 추위와 광막한 벌판에 내던져진 죄수와 반역자들의 한 서린 유형지로 각인되기도 했다.
시베리아에 진출한 러시아인은 원주민들에게 대체로 우호적으로 대했다. 원주민들은 당국에 모피 세금을 바치는 대신 보호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원주민에게는 러시아인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관리들과 일부 러시아인의 전횡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주계급이 없고 도망자들을 위한 무한한 공간이 있어 시베리아는 농노제도의 질곡을 면할 수 있었다. 원주민과의 통혼을 통해 원주민의 동화가 진전되고, 유럽 러시아에서 이민이 증가하고 정부가 주민들의 생활에 신경을 쓰면서 시베리아 사회는 점점 발전했다. 그에 따라 시베리아 사회는 우랄 산맥 너머의 유럽 러시아보다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발전시켜갈 수 있었고, 그와 더불어 미국의 서부를 연상시키는 강인함과 독립성 등의 특질을 지니게 됐다.
각주 |
국민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다
보리스 고두노프와 동란시대(1604년 ~ 1613년)
보리스 고두노프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 테러 · 기근 · 질병에 못 이겨 남부와 동부로 대거 도주해갔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농민의 이주를 금지하여 토지에 묶어두는 정책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반 뇌제의 말기에 전후 2주일 동안 농민의 이주를 허용하는 '유리의 날'을 폐지하는 칙령이 발동됐으나, 보리스는 그것을 항구화하고 도망 농민에 대한 지주의 수색 · 연행기간도 5년으로 늘렸다. 이로써 러시아의 독특한 농노제가 사실상 완성됐다.
1591년 표도르의 하나뿐인 동생 디미트리가 죽었다. 항간에 보리스 고두노프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는 설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1598년 표도르가 죽은 후에 열린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선출됐다.
왕위에 오른 보리스는 로마노프 가와 슈이스키 가 등 명문귀족들을 정계에서 추방하고, 사족들을 축으로 삼아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는 유능한 젊은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웃 나라들과 화평을 유지하는 한편, 시베리아를 경략하고 무역을 장려하는 등, 의욕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1601~1602년 이태 동안 연이어 냉해와 혹한으로 수확이 격감하더니, 1603년에는 대기근이 닥쳐왔다. 국민의 1/3 가량이 죽어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굶주린 이들이 고양이와 개, 심지어는 사람의 시체까지 먹어댔고, 나무껍질이나 풀로 연명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농민도 노예도 다투어 도망쳐 카자흐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
사람들 사이에 구세주를 기다리는 기대가 높아갔다. 디미트리 왕자가 보리스에게 살해된 것이라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소문은 "디미트리는 살아 있다. 곧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라는 기대로 발전했다. '구세주 차르'의 신앙이 대두한 것이다. 이윽고 1604년 폴란드에서 한 청년이 자기가 바로 디미트리 왕자라면서 카자흐와 폴란드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로써 러시아어로 '스무타'라 불리는 동란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두 명의 가짜 디미트리를 비롯해 차르와 왕자를 참칭하는 자가 여럿 나타나 러시아인을 현혹시키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며, 외국군이 러시아 국토를 유린하는 등, 기괴스러움과 파괴가 극에 달했다. 말 그대로 동란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동란시대는 러시아 국민의 힘으로 진정되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
'디미트리 왕자'가 러시아 영내에 들어오니 사람들은 열광하여 그를 맞았다. 보리스는 "그 사람은 가짜다. 수도원에서 도망친 사제 그리고리 오틀레피예프다"라고 외쳐댔지만 사람들은 보리스의 얘기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1605년 1월 5,000으로 늘어난 가짜 디미트리의 군대는 보리스의 군대에 패하여 밀려났다. 그러자 더 많은 러시아인이 그에 가담하여 세가 더욱 불어났다. 가짜 디미트리는 보리스의 권력과 대귀족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민중들에게 '자유'를 약속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10년간 세를 거두지 않겠다고 포고했다.
그해 4월 보리스가 급사하면서 보리스 진영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6월에는 왕비와 왕자가 크렘린에 난입한 민중들에게 살해됐다. 차르 참칭자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7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가짜 디미트리도 난국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끌고 온 폴란드인들은 사사건건 러시아인들과 충돌했다. 그 사이에 남쪽에서는 한 청년이 있지도 않은 전 차르 표도르의 아들을 참칭하고 나서 '표도르 왕자'로 행세했다. 가짜 디미트리를 차르로 받들어 모시고 있던 대귀족들은 민중의 불만에 편승하여, 1606년 5월 폴란드인들을 죽이고 가짜 디미트리를 처형했다.
새로이 차르에 오른 것은 대귀족 바실리 슈이스키였다. 그가 즉위함으로써 대귀족의 입지는 크게 강화됐으나 민중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고통을 겪었다. 사람들 사이에 다시 "디미트리는 죽지 않았고, 죽은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각지의 도시들의 슈이스키에게 충성을 거부했다.
노예 출신의 이반 볼로트니코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때다. 볼로트니코프의 군대는 농민과 카자흐, 노예, 일부 사족의 지지를 받아 급속히 팽창하여 수만으로 늘어났고, 10월에는 모스크바 진공을 개시했다. 한때 모스크바 성문 앞까지 진입했으나 슈이스키군의 반격에 밀려 후퇴했다. 이후 사족들이 이끄는 군대가 떨어져나가 세력이 약해진 볼로트니코프는 이번엔 '표도르 왕자'의 군대와 합세하여 툴라에서 정부군에 맞섰다. 1607년 네 달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반란군은 결국 정부군에 항복했다. 볼로트니코프의 거사는 러시아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일컬어진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두 번째 가짜 디미트리가 나타났다. 작년에 귀족들에게 죽은 디미트리는 다른 사람이고 자신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해 도망쳤다면서, 제2의 가짜 디미트리는 급속히 세를 규합해갔다. 어느 모로 봐도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가짜 디미트리의 왕비였던 폴란드 귀족의 딸은 그를 자기 남편이라고 인정했고, 얼마 후에는 그의 아들까지 낳았다.
카자흐와 폴란드 귀족의 도움을 받고 있던 제2의 가짜 디미트리는 러시아 깊숙이 진공해 들어와 서부의 많은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는 모스크바에서 그리 멀지 않는 투시노에 본영을 두고, 1610년까지 슈이스키와 러시아를 양분했다. 많은 귀족들이 투시노의 가짜 디미트리에게 붙어 그를 섬겼다.
이어 외국의 직접 간섭이 시작된다. 슈이스키는 스웨덴 왕과 동맹을 맺었고, 가짜 디미트리 2세 측의 귀족들은 폴란드 왕과 결탁했다.
가짜 디미트리 측 러시아 귀족들은 1610년 가짜 디미트리를 버리고,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에게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 왕자를 차르로 맞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모스크바의 지배를 노리고 있던 폴란드 왕은 이에 모스크바 공략군을 파견했다. 그해 7월 슈이스키는 퇴위되고 모스크바의 대귀족은 폴란드 군의 모스크바 점령을 허락했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폴란드 수중에 들어갔다.
폴란드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돼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에 해방투쟁을 부르짖는 격문이 나붙었다. 모스크바 총주교 게르모겐은 모두 일어나 정교 신앙을 지키자고 전국에 회신을 발송했다. 각지에서 농민 · 카자흐 · 귀족 · 사족 · 상인들이 일어나 해방군(국민군)을 결성하고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빈약하게 무장한 해방군을 무참히 살육하여 퇴각시키고는 크렘린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해방군마저 분열하여 힘을 잃었다. 북쪽에서는 스웨덴까지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는 그야말로 캄캄한 암흑 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던 1611년 가을, 니주니 노브고로트의 상인들이 장로 쿠지마 미닌의 제창에 호응하여 군자금을 각출한 것을 계기로 제2차 해방군이 결성됐다. 포자르스키 공작이 이끄는 러시아 국민군은 1612년 10월 마침내 폴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모스크바는 해방됐고, 1613년 전국회의가 소집되어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면서 300년 로마노프 왕조의 막이 올랐다.
이로써 동란시대를 거치며 국가관념과 국민의식이 러시아인들 속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전제정부였다. 국민의 힘으로 다시 세워진 전제권력은 향후 더 힘을 굳히면서 국민들 위에 절대자로 군림하게 된다.
한편, 사회적인 의미에서 동란은 각 구성원들에게 현저히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외국세력과 결탁하고 여러 차르에게 번갈아 충성을 바친 토착귀족이 몰락하면서, 신흥귀족인 사족과 도시의 상인층이 크게 대두했다. 이들은 미하일 시대에 빈번히 열린 전국회의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와 더불어 교회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인정받아 권위와 위신을 높여간다.
북부의 농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과 카자흐는 동란기간에 볼로트니코프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가짜 황제들을 위해 싸운 탓에 그 입지가 더 악화됐다. 이후 농노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농민들은 심한 예속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들의 요구는 압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그러기에는 아직도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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