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 차르로 등극(1547년)
이반 뇌제의 흉상
발굴된 그의 두개골과 옛 초상화를 바탕으로 조각한 것이다. '강렬'과 '잔혹'으로 표상되는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났다.
광기에 가까운 격정으로 한 시대를 군림한 인물, 이반 4세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양극단의 평가를 내린다. 그는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인 폭군이자, 국가를 단단한 토대 위에 세운 능력 있는 군주였다. 그의 별명인 뇌제(雷帝, 그로즈니)에 이 두 가지 평가가 함께 담겨 있다. 그는 벼락처럼 두려운 군주이면서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군주였다.
그의 통치는 흔히 전후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한다. 전반부에는 능력 있는 군주의 특성이 두드러지고, 후반부에는 폭군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토착귀족들에 대항하여 차르의 권력을 강하는 데 힘썼다.
1533년 이반 4세가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겨우 3살이었다. 그는 예민하고 총명하고 조숙한 소년이었다. 이반은 일찍부터 읽는 것을 배워 눈에 띄는 것은 뭐든지 읽어댔다.
17살 때 이반이 친정에 나서기 전까지는 비엘스키 가와 슈이스키 가의 두 귀족가문이 번갈아가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들은 공중 앞에서는 이반에게 경의를 표했으나 사적으로는 이반을 마치 '하인 다루듯' 했다. 음식도 옷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이반 앞에서 방자한 태도로 다투기 일쑤였다. 살인과 처형, 체포와 투옥이 다반사로 행해졌다. 그러는 가운데 이반은 귀족들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혹독함과 잔인함을 키워갔다.
13살이 되자 이반은 용포를 입고 섭정을 맡은 비엘스키 가와 슈이스키 가의 회의를 주재하기 시작했다. 이때 뜻밖의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한 회의석상에서 이반은 일을 잘못 처리하고 낭비를 했다고 중신들을 가볍게 나무랐다. 이로 인해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이반이 일어서서 섭정 중의 하나인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지적하며 그의 체포를 명했다. 모두들 우물쭈물하는 사이 안드레이가 도망치려고 하자, 평소에 이반이 신임하던 궁전의 개 사육관이 그를 곤봉으로 쳐 죽이고 말았다. 엉뚱한 결과를 낸 이 사건은 이반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주어, 이후 이반의 왕권이 크게 강화됐다.
1547년, 17살의 나이로 이반은 정식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이때 이반은 그에게 비잔틴식 기독교 군주의 이념을 가르쳐준 수도 대주교 마카리의 권유로, 대공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채택했다.
전에 할아버지 이반 3세가 차르를 칭한 적은 있지만 이 칭호로 제위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3주일 후 그는 아나스타샤 로마노프와 결혼했다. 왕비의 가문인 로마노프 가는 명문으로서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반은 결혼에 앞서 사려 깊게 자신의 배필을 골랐다. 그의 선택은 결국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1660년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아나스타샤는 포악함을 숨기고 있던 이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선정을 펴도록 돕는다.
이반 4세는 사족 출신인 알렉세이 아다셰프, 수도 대주교 마카리, 사제 실베스토르 등으로 구성된 '선발회의'의 조언을 받으며 정치했다. 통치 초기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사의 지방 지배, 문벌을 중시한 인재등용 등에서 연유하는 폐단을 개혁에 초점을 두었다.
1549년, 이반 4세는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 중앙과 지방의 고위관리, 사족 및 대상인의 대표로 구성된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했다. 전국회의는 정부가 정책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하는 실권 없는 일종의 신분제 의회였으나, 이후 참가 범주와 권한이 확대되면서 차르의 선출, 국내의 개혁, 전쟁과 강화 등의 중요정책을 심의하는 기관으로 부상한다.
이반 4세는 전국회의에서 대귀족의 횡포를 비난하고 개혁의지를 표방했으며, 새로운 법령 제정, 지방제도 개혁 등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중에서 지방제도의 개혁은 특기할 만하다. 개혁의 결과,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일정액의 세금을 바치는 지방에서는 중앙에서 지사를 임명, 파견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관리를 선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지사들이 있는 곳에서도 지사들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고 필요한 경우 지사를 탄핵할 수도 있는 보좌역을 선출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1551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많은 주교가 참가하는 공의회(스토글라프 회의)를 열어 교회제도를 개혁하고 교회의 지위와 권한을 통제하려 했으나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550년경에는 전국에서 선출된 천여 명의 사족에게 모스크바에 가까운 봉토와 중앙관청의 공직을 주어 사족층을 육성했다. 토착귀족 세력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군사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여 포병을 증강시키고, 스트렐치, 즉 소총부대로 알려지는 상설 정규연대도 설치했다.
이반은 대외정책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52년 차르는 카잔 한국을 공략하고자 볼가 방면으로 출진했다. 카잔의 굳게 닫힌 성문 앞에 높이 15m 포대가 설치되고 거기서 쉴 새 없이 포탄이 쏟아져 나와 성 안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카잔이 함락되고 동쪽 장벽이 뚫려, 러시아는 시베리아까지 넘볼 수 있게 됐다. 이반은 민중의 환호 속에 모스크바로 개선했고, 승리를 기념하여 대성당을 짓는다.
1556년에는 볼가 하류를 장악하고 있던 아스트라한 한국도 러시아군에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투르크어로 '강'이라는 뜻을 지닌 볼가 강 전체가 아시아인의 강에서 러시아인의 강이 됐다.
북서쪽으로는 발트 해로 나가는 출구를 얻고자 리보니아 기사단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북극해를 통해 영국과 교역하고 독일과의 교류도 늘고 있던 러시아로서는 발트 해로 나가는 출구가 꼭 필요했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처음에는 러시아군이 승리했으나 이후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든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개혁 작업도 계속됐다. 1555~1556년에 영지의 규모에 따른 군역의 규모를 표준화했다. 영지의 규모를 기준으로 국가가 요청할 때 바쳐야 하는 무사와 말 등의 수를 정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지위가 세습되는 토착귀족과 봉공의 대가로 지위가 하사되는 사족의 구분도 희박해졌다. 차르에게 봉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지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리보니아 전쟁이 난항 속으로 빠져들고 사족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토지가 필요해지던 차에, 1560년 이반이 몹시도 사랑하던 왕비 아나스타샤가 죽는다.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믿은 이반 4세는 이후 대귀족들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피를 말리는 공포정치 끝에 이반은 대귀족들의 세력을 크게 삭감하고, 대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족들을 키워 막강한 전제권력을 확립한다.
피로 물들인 이반의 칼
오프리치니나 체제(1565년 ~ 1572년)
16세기 모스크바 공국의 보야레들
얼마 안 가 이반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면서 문제는 해소됐다. 이후 모든 일이 순순히 풀리면서 이 사건은 잊혀진 듯했으나, 이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귀족들에 대한 불신감이 계속 커갔다.
1560년, 이반이 몹시도 아끼던 왕비 아나스타샤가 죽었다. 그 여파로 아다셰프와 실베스토르 등 측근들이 직위에서 쫓겨나고 선발회의도 폐지된다. 후에 이반은 이들이 귀족들과 공모하여 왕비를 독살했다고 비난했다. 선발회의의 멤버와 그 친지들이 재판 없이 죽어갔다. 피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즈음 리보니아 전쟁이 스웨덴,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가세로 격화되면서 러시아가 점점 수세에 몰린다. 1563년 리투아니아의 요새인 폴로츠크가 함락됐으나, 다음 해 봄부터는 러시아군이 거듭 패했다. 그 와중에 선발회의의 멤버였던 대귀족 쿠르프스키가 리투아니아로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무려 15년간에 걸쳐 이반 뇌제와 쿠르프스키 간에 유명한 왕복서한이 교환된다. 이반 4세는 쿠르프스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그의 전제정부가 신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고, 설령 자신이 폭군이라 하더라도 그대는 충실한 신하이자 기독교도로서 이를 묵묵히 견뎌냄이 옳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반 4세가 오프리치니나 체제를 도입한 것은 이때다. 1564년 12월 차르는 수도원에 간다고 해놓고, 시종 몇 명만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북쪽의 작은 마을 알렉산드로프로 잠적했다. 다음 해 1월 모스크바로 두 통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한 통에서는 대귀족, 고위 성직자와 관리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의 착복과 배반, 적과의 싸움을 등한시하는 것 등을 규탄했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는 모스크바의 상인, 수공업자 등 민중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했다.
경악한 민중들은 귀족회의에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귀족회의가 나서서 차르에게 귀환을 간청할 것이며, 배반자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직자와 대귀족들이 대표를 파견하여 차르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차르는 두 가지 조건을 붙여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첫째로 반역자들에 대한 판정과 처벌 권한은 자기에게만 있고, 둘째로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반 4세는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오프리치니나에 편입된 토지를 자신이 오프리치니크, 즉 오프리치니나 대원으로 임명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많은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여 자신이 총애하는 사족들에게 주었다. 얼마 안 돼 오프리치니나는 전 국토의 절반으로 늘어났다.
오프리치니크는 차르에게 충성을 서약한 대귀족 일부와 다수의 사족, 외국인들로 별도의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검은 옷에 검은 말을 타고 빗자루와 개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서 온 나라를 누볐다.
오프리치니크의 군대는 이반의 수족이 되어 대규모 테러를 자행했다. 테러 대상은 배반을 꾀한 자, 차르에게 반항한 자로부터 차르의 기대에 따르지 않는 자, 차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 그들의 가족과 친지에까지 이르렀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희생자들의 재산은 가차 없이 몰수 또는 약탈됐다. 고문과 처형방법도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이에 1568년, 수도 대주교 필리프가 감히 차르에게 충고를 하고 나섰다. 이반은 그가 전에 원장으로 있던 수도원을 조사, 허위증언을 수집하여 주교회의에 고발했다. 주교회의에서 유죄가 선고되어 그는 감금됐다가 살해당했다.
1570년에는 대규모의 오프리치니크 군대가 노브고로트에 몰려왔다. 도시주민들이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였다. 곧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어 3만 주민의 약 절반이 죽임을 당했다. 그해 7월에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크림 한국,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등의 혐의로 100여 명이 학살됐다.
오프리치니나의 설치와 공포정치로 토착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몰락했으며, 이반 4세의 전제권력은 크게 강화됐다. 그 과정에서 이반은 계급 간 대립을 이용했다. 일부 귀족과 다수의 사족(궁정귀족 · 관료), 외국인들로 오프리치니크를 만들어 토착 대귀족들과 대립케 한 것이다. 귀족들과의 기나긴 싸움에서 이반 4세가 결국 승리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반이 오프리치니나를 폐지했을 때 정치세력으로서의 세습귀족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귀족들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끝내는 이들의 자손이 궐기해 다시 이반의 후계자들과 싸우게 된다.
아직도 대규모 테러가 행해지고 있는 1571년 말, 크림 한국의 군대가 몰려와 모스크바를 불질렀다. 10여 만의 시민이 학살되어 모스크바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에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군대와 젬시치나 군대의 혼성군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7월 혼성군은 크림 한국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폐지한다는 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반의 테러는 계속됐다. 그는 계속 음모가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황태자 이반만이 유일하게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1581년 11월 이반 뇌제는 30세가 된 황태자 이반의 말에 격노하여 지팡이로 그를 내리쳤다. 황태자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급히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피의 부름이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까지도 데려가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582년과 1583년에 맺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웨덴과의 협정은 이반 뇌제에게 참담한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 협정으로 러시아는 결국 리보니아와 발트 연안을 포기하게 된다. 차르의 오랜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국토만 황폐화된 채 리보니아 전쟁이 끝을 맺은 것이다. 1584년 이반 뇌제는 며칠 동안을 울부짖으며 궁 안을 헤매다가 죽었다. 후세에 소련에서 그의 시체를 검시한 결과 독살로 판명됐다. |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0년 왕조의 서막 러시아 (0) | 2014.09.13 |
---|---|
시베리아로 진출하다 러시아 (0) | 2014.09.13 |
목공예술과 석공예술의 절묘한 조화 (0) | 2014.09.13 |
교회의 성장과 막강한 힘 러시아 (0) | 2014.09.13 |
작은 마을이 대공국으로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