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교회의 성장과 막강한 힘 러시아

구름위 2014. 9. 1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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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의 독립(1448년)

 

블라디미르의 성모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성상으로 자애로움이 넘친다. 러시아인의 신앙은 깊어서 황제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성상을 귀하게 모셨다.
 
러시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얼마 안 돼 교회는 러시아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수백 개의 수도원에서 많은 사제들을 길러냈다. 교육받은 성직자들은 정치에도 관여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교회는 15세기 중엽까지 비잔틴 교회의 관할하에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는 키예프에 러시아 수도 대주교관을 두고 대대로 그리스인을 수도 대주교로 임명했다. 전례나 교회제도도 비잔틴의 것을 그대로 도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의 교회에 민족적인 색채가 가미되고 러시아인 대주교로 나오기 시작했다.

 

13세기 전반에 몽골의 침입으로 키예프를 비롯한 남러시아가 황폐해지면서 러시아의 중심은 북동부로 옮겨갔다. 수도 대주교관도 블라디미르를 거쳐 14세기 전반에는 모스크바로 옮겼다.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족은 기독교에는 관대했다. 따라서 몽골 지배하에서 러시아 교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여러 공국으로 분열돼 있던 러시아에서 뛰어난 조직력, 엄청난 재산과 특권을 가지고 있던 교회는 모스크바의 정상을 돕고 북동부 황무지를 개척하는 등,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까지 중대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 교회에서는 장엄한 종교의식이 중시됐다. 그것은 공을 들이는 성찬식과 예배에서 잘 드러난다. 1년 365일의 약 1/3인 교회의 성일과 연중 행사표는 엄격히 준수됐다. 교회와 국가가 운영하는 공방에서는 화려한 성화상, 비단 예복, 황금 성찬배 등을 대량 생산했다. 작은 마을에도 수준급의 웅장한 남성 성가대가 있었다.

 

14세기 중엽부터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 각지에 수도원이 문을 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1340년경에 성자 세르기가 모스크바 근교에 세운 트로이체(성 삼위일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이후 러시아 정교의 메카가 되고, 성 세르기가 묻힌 수도원 내의 한 교회는 성지가 되어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든다.

 

성 세르기는 겸손 · 친절 · 우애 · 사랑 등의 덕목을 성실히 실천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종교적 묵상과 계율, 일과 배움을 강조했다. 또한 높은 품성과 지혜,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큰 명성을 얻고 세속사에도 깊이 관여했다.

 

일면 종교적이고 일면 사회적인 그의 업적들에서 이후 러시아 수도원이 걸어갈 두 가지 방향이 생겨났다. 하나는 차르를 지지하며 세속사에 깊이 관여하는 길이었고, 하나는 차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깊은 정신세계에 잠겨 세속적인 권력과 부를 포기하는 길이었다. 두 개의 길은 이후 거듭된 종교분쟁의 중심주제가 된다.

 

교회와 수도원의 수가 크게 늘면서 러시아 교회의 세가 커지고 러시아 사회에서 정교회가 차지하는 비중도 커져갔다. 15세기 초에 러시아 정교회에는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외에 15명의 주교가 있었고, 그중 노브고로트, 로스토프, 수즈달의 주교는 대주교의 칭호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러시아의 여러 공들, 특히 모스크바 대공을 도와가며 그 영향력을 키워갔고, 교회의 재산도 크게 늘어 러시아 전 경작지의 1/4을 차지했다.

 

반면에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던 비잔틴의 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함께 점점 그 세력이 줄어갔다. 15세기 초에 이르자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을 받아 존망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비잔틴은 로마 교회와 그 영향하에 있는 서방국가들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1439년의 피렌체 종교회의에서 마침내 로마교황의 최고권을 인정하고 만다. 그리스인이던 당시 러시아의 수도 대주교 이시도로스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예배 중에 피렌체 회의의 결과를 발표하고 교황을 위해 기도한다. 예배 후에 그는 모스크바 대공의 명령에 따라 체포돼 수도원에 감금된다.

 

1448년 러시아 주교회의는 교회일치(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연합)를 옳지 않은 것으로 비난하면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승인 없이 이시도로스를 퇴위시키고 러시아인 요나스를 수도 대주교로 임명한다. 이로써 비잔틴의 러시아 교회 관할권은 무시되고, 러시아 교회는 비잔틴으로부터 독립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러시아 교회에서는 한때 모스크바 제3 로마론이 대두되어 관심을 끌었다. 3개의 로마에 관한 이야기인데, 첫째는 로마의 교회로서 이단 때문에 몰락했고, 둘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이교도에 의해 무너졌으나, 셋째 로마인 모스크바의 교회는 태양과도 같이 온 세계를 비추리니 넷째 로마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정교회에서 주교 이상의 성직자는 수도사 중에서 뽑게 돼 있어 교회정치에서 수도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졌다. 때로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황제한테까지 대항했다. 몇몇 황제가 수도원을 약화시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번영의 그늘에서는 모순이 확대되고 있었다. 16세기 초, 수도사 닐 소르스키가 수도원의 지나친 토지소유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는 청빈한 수도생활, 교회와 국가의 분립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 교회와 국가의 결합을 강조하는 요시프 볼로츠키와 논쟁을 벌였다. 이른바 '소유파'와 '무소유파'의 논쟁에서 소유파가 승리한 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진다.

 

그 후 1589년에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가 총주교로 승격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명실공히 그리스 정교회의 적자임을 주장한다. 다른 4개의 총주교관은 당시 모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1654년 복잡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을 둘러싸고 교회가 크게 둘로 분열하고, 18세기 초에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의해 교회가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러시아 교회는 영광의 시대를 마감한다. 그러나 교회와 수도원은 계속 불어나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더 깊숙이 파고든다.

 

몽골, 초원으로 물러나다

 

몽골 지배의 종식(1480년)

 

킵차크 한국의 공납청구 서간을 찢어버리는 이반 3세
칸은 대노하여 모스크바 정벌군을 일으켰으나 우그라 강가에서 회군, '타타르의 멍에'가 벗겨졌다.
 
1380년 9월 8일 돈 강변의 쿨리코보 벌판. 디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15만의 러시아 연합군과 마마이 칸이 이끄는 20만의 킵차크 한국군이 벌판을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정오경 짙은 안개가 걷히자 킵차크 한국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곳곳에 개울이 흐르는 얕은 구릉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날렵한 기병대를 주축으로 하는 몽골군의 예봉을 꺾기 위한 러시아군의 작전이었다.

 

몽골군은 러시아군을 간단히 포위하지 못하고 러시아군 진지 안으로 깊숙이 뚫고 들어와야 했다. 이윽고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후 3시경 양편 군대 모두 태반이 죽고 남은 병사들도 탈진했다. 그때 숲속에 매복해 있던 러시아의 마지막 예비부대가 몽골군을 덮쳤다. 마마이 칸과 남은 몽골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쿨리코보 전투다.

 

전투는 몽골군의 참패로 끝났으나 러시아 연합군의 피해도 막심하여 군대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디미트리 자신도 전투 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싸움이 끝난 후 시체더미 속에서 걸어나왔고, 싸움터에서 치른 장례식만도 8일이나 걸렸다.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은 리투아니아의 군대는 이틀 후에 돈 강에 도착했으나 그때는 이미 싸움이 끝난 뒤였다. 그들은 군대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 싸움으로 '몽골 불패의 신화'는 깨졌고, 러시아는 실로 오랜만에 하늘이 터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러시아 연합군의 중추 역할을 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고, 모스크바 대공 디미트리 돈스코이는 러시아의 영웅이 됐다. 돈스코이라는 별명도 이때 얻은 것으로, '돈 강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그로부터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몽골의 힘이 아직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2년 후인 1382년에 토크타미슈 칸이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해와 시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디미트리는 다시 킵차크의 칸을 대군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고, 칸은 디미트리를 러시아의 대공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쿨리코보 전투 이후 몽골의 지배는 그전 같은 견고함이 없었다. 디미트리 돈스코이가 1389년에 죽었을 때 그의 아들 바실리는 킵차크 칸의 승인 없이 대공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많은 러시아 공들이 때때로 조공을 선물로 대신했다.

 

150년간이나 러시아를 지배해온 킵차크 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같은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 티무르 제국이었다. 제국의 창건자 티무르는 1368년 중국대륙에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멸망한 직후,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칭하며 몽골제국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북부, 카프카스 지방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1391년 티무르군은 킵차크 한국에 쳐들어와 수도 사라이를 유린하고 랴잔까지 초토화시킨 뒤 철수했다. 티무르군이 철수한 후 킵차크 한국은 다시 부활했으나 그 여파로 내분이 격화됐다. 15세기에 들어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의 세 한국이 킵차크 한국에서 분리 독립하자 킵차크 한국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1452년에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다. 모스크바 대공의 지배를 받는 몽골인 군주가 카시모프 공국의 공위에 오른 것이다. 더불어 많은 몽골 귀족들이 모스크바 대공에게 복종을 서약했다.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 대공국과 킵차크 한국의 관계는 사실상 역전됐다. 킵차크의 칸은 그를 전후하여 모스크바를 다시 자기 지배하에 두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몽골족이 러시아를 침략해올 때나 쿨리코보의 결전에 비하면 그야말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1480년 모스크바의 이반 3세가 킵차크 한국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자, 킵차크의 아마드 칸은 총력전을 펼쳐 러시아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 영토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반 3세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크림 한국과 동맹을 맺은 뒤 모스크바 남쪽 우그라 강변에 군대를 배치하고 기다렸다.

 

마침내 킵차크 한국군이 맞은편 강변에 다다랐다. 양편의 군대는 서로 마주 본 채 한겨울을 보냈다. 겨울이 끝날 즈음 킵차크 한군은 조용히 말머리를 돌려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동맹국인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크림 한국만이 간간이 싸움을 벌였다.

 

그 후 킵차크 한국은 다시는 러시아 땅을 넘보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자신의 후예인 크림 한국에게 멸망하고 만다1).

 

이로써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끝나고 러시아는 길고 긴 '타타르의 멍에'에서 풀려났다. 몽골 지배하에서 러시아는 크나큰 왜곡의 과정을 겪었다. 키예프의 유산이 파괴되면서 나라의 발전이 크게 지체됐고, 서유럽과 비잔틴과의 단절을 겪는 대신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몽골로부터 그 전제성과 냉혹성을 물려받았다. 몽골은 러시아인에게 쓰디쓴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본디 씨족사회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용맹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은 드넓은 영토를 다스릴 치국술은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세계무대에 나타나 깜짝 놀랄 공연을 연출한 뒤 몽골족은 다시 초원의 한구석으로 물러갔다. 말 위에서 싸워 제국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안장에 앉아 제국을 통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몽골의 지배를 물리친 러시아는 그 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대통일을 이룩하면서 새로운 시대, 즉 모스크바 러시아 시대를 열어간다.

 

각주
1 그러나 킵차크 한국을 계승한 여러 나라는 그 후로도 얼마 동안 러시아의 남동부 초원지대를 지배한다. 카잔 한국, 아스트라한 한국이 러시아에 흡수된 것은 1552년, 1556년이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크림 한국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온 것은 그보다도 훨씬 뒤인 1783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