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웅비(14세기)
러시아의 중앙 대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카잔 근처에서 남쪽으로 크게 진로를 바꿔 대초원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카스피 해로 흘러드는 볼가 강. 유럽 러시아 최대이자 유럽에서 제일 긴 강이기도 한 볼가 강은 옛날부터 '어머니 같은 볼가'로 사랑을 받아오면서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농민반란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역사에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리는 오카 강은 볼가 강의 커다란 지류이고, 모스크바 강은 모스크바 시내를 굽이돌아 이 오카 강에 합류한다.
큰 강과 그 지류들이 그물망처럼 퍼져 있던 유럽 러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수상교통이 매우 활발했다. 강들의 발원지가 겨우 해발 200미터 남짓한 낮은 구릉지여서 물매가 매우 완만한데다 큰 강들의 수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몰려 있어 수상교통의 발달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강과 강 사이는 통나무를 늘어놓고 그 위로 배를 굴려 분수령을 넘는 연수 육로로 연결됐다. 발트 해로 흘러드는 네바 강과 서드비나 강, 흑해와 카스피 해로 흐르는 드네프르 강과 볼가 강이 모두 같은 수계를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유럽 러시아는 자연 장애물이라고는 거의 없는 하나의 평원이었고, 그 드넓은 대지는 발달한 수로망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12세기 중엽만 해도 모스크바 강변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모스크바가 겨우 300년 만에 온 러시아를 호령하는 대공국으로 성장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모스크바는 이 러시아 평원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는 수로망을 따라 세력을 확장해가면서 마침내 온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모스크바의 창건자는 수즈달 공이었던 유리 돌고루키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모스크바 강변에 있던 작은 마을을 점령한 뒤 이웃의 공을 초빙하여 강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것이 모스크바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한 연대기의 1147년 항목에 쓰여 있다. 1156년 유리는 마을 주변에 목책과 호를 만들어 도시의 방벽을 세웠다. 그러나 1237년 몽골군에 의해 성채가 파괴된다.
그 후 1271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 다닐이 모스크바를 본거지로 해서 모스크바 공국을 건설했다. 그 무렵 모스크바는 왜소한 소공국에 불과했으나, 다닐의 뒤를 이은 역대 공들의 수완으로 이웃 트베리 공국과의 긴 싸움을 승리로 이끌면서 점점 영토를 넓히고 권위를 높여간다.
다닐의 아들 이반 칼리타는 킵차크 칸의 환심을 사서 인근 러시아 공국들의 토지를 수중에 넣은 한편, 1328년 당시 키예프를 떠나 블라디미르에 자리 잡고 있던 정교회의 수도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영입해 들인다. 이제 러시아 정교회의 본산이 된 모스크바는 이후 역대 수도 대주교들의 협조를 얻어 세를 크게 확장해간다.
14세기 후반 디미트리 돈스코이는 크렘린(성채) 주변에 돌 성벽을 축조하고 성 바깥에 여러 개의 수도원을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의 침입도 물리쳤다.
이어 1380년 유명한 쿨리코보 전투에서 디미트리 돈스코이는 킵차크 칸군을 무찔러 '몽골 불패의 신화'를 깨뜨리며 일약 러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2년 후 전열을 재정비한 몽골군이 쳐들어와 모스크바가 불타버리나, 이후 몽골의 지배는 전과 달리 느슨해진다.
모스크바의 대두에 당대의 러시아인은 모두 놀라워했다. 모스크바가 이처럼 크게 성장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수로망의 중앙부에 있어 빠른 시간 내에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것 외에,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는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기울어가는 남부에서 성장해가는 북동부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고, 또 드넓은 평원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외부의 침략에도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예컨대 북서부의 적은 노브고로트가 막아주었고, 남동부의 적은 랴잔이 그 충격을 완화해주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초기의 모스크바 공국에서는 공의 자리를 놓고 다툴 삼촌들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부자 세습, 장남 상속의 원칙이 일찍부터 정착할 수 있었다. 또 모스크바의 공들은 다른 지역에서 더 거창한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공국에 전념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아 그 일에 전념했다.
킵차크 칸에 대한 협력정책 역시 모스크바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막강한 힘에는 굴복하면서 속으로 내실을 기하는 것, 이것이 역대 모스크바 대공들의 정책이었다.
예를 들어, 이반 칼리타는 킵차크 한국으로부터 전 러시아에 대한 징세권을 얻은 뒤 절반을 자기가 챙겨 공국의 강화를 위해 썼다. 칼리타라는 별명은 러시아어로 '돈주머니'라는 뜻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지방분권화 경향이 심했던 것도 역으로 모스크바의 성장에 기여했다. 다른 공국들이 너무 작아진 탓에 자꾸만 커지는 한 세력을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회도 큰 몫을 했다. 정치적으로 큰 힘이 없던 시절에 수도 대주교를 모스크바에 정주시킴으로써 모스크바 공들은 권위를 높였고, 역대 수도 대주교도 모스크바의 러시아 통합을 크게 도왔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한편으로 노브고로트와 프스코프 등지에 남아 있던 민주적 전통이나 비러시아 민족들의 자유를 파괴하고 오로지 전제군주에 절대복종하는 전제정치를 러시아 땅에 정착시켜갔다. |
리투아니아의 서남 러시아 경영(14세기 ~ 15세기)
스몰렌스크의 함락
1609~1611년에 지기스문트 3세에 의해 요새화되었다. 당시의 동판화. 리투아니아는 1569년 폴란드에 합병되었다.
몽골 지배하에서 동북러시아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결속돼가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리투아니아의 힘이 막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400년경에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 지배하의 서남부와 모스크바 주도하의 동북부의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키예프 러시아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인의 분화 대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으로의 분화는 한층 더 심화되어 이후의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1240년경 몽골병의 말발굽은 러시아의 서남부를 휩쓸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바투 칸이 러시아의 동쪽 변방인 볼가 강변의 사라이에 킵차크 한국의 도읍을 세운 탓에, 서부 러시아에는 몽골의 지배력이 그리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 그 틈을 타고 북쪽에서 리투아니아가 뻗어왔다.
오래전부터 발트 해 연안에 살고 있던 리투아니아인 부족들이 민다우가스 공의 지도하에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것은 1240년경이었다. 직접적인 자극이 된 것은 북쪽에 자리 잡은 독일 기사단의 압력이었다. 민다우가스의 사후 잠시 내분에 시달리던 리투아니아는 1293년 비텐에 의해 다시 통합됐다.
그의 뒤를 이은 게디미나스와 그의 아들 알기르다스의 치세에, 리투아니아는 서남 러시아의 여러 공국을 차례로 손에 넣어 발트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다. 알기르다스는 러시아 전체를 지배하고자 세 차례나 모스크바와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동북부로의 진출은 실패했으나 리투아니아의 영토는 키예프, 볼린, 체르니코프, 스몰렌스크 등 서남 러시아 전역을 포괄했다. 리투아니아가 이처럼 러시아 속으로 급속히 팽창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러시아인의 저항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 리투아니아의 지배방식이 러시아인을 거스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가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민은 약 3/4이 러시아인이었고, 도시들은 러시아적인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상류층과 정교회는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두 나라 귀족들 간의 결혼도 성행했다. 또한 이교도로서 문화적으로 뒤져 있던 리투아니아의 지배자들은 키예프 러시아의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였고, 군대 · 행정 · 법률 · 재정 등도 러시아식으로 만들었으며, 러시아어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사용했다. 따라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키예프의 또 다른 상속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77년 아릭르다스가 죽은 후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다. 그의 아들 요가일라가 1386년에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여 폴란드 국왕을 겸임하게 되면서 폴란드의 영향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요가일라는 스스로 정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인들을 가톨릭 교도로 개종시켰다. 그로 인해 성직자들이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로 왔고, 교회는 교육 · 문화 · 예술 등의 분야에서 폴란드화를 선도하는 거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밑에서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된 사촌 비타우타스는 독립적인 군주로 행동하면서 독일 기사단의 위협을 제거하고 몽골과도 큰 전쟁을 일으키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내란에도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폈다.
비타우타스가 죽은 해인 1430년 무렵까지가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로서, 그 후로는 리투아니아인과 동슬라브인,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민족적 · 종교적 갈등에다가 폴란드의 간섭, 모스크바 러시아의 압력까지도 겹쳐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후 폴란드화가 더 급속히 진행됐다. 교회의 영향력은 종교와 교육 · 문화를 넘어 사회와 경제 · 정치로까지 확대됐다. 늘어나는 교회의 토지들은 계속 면세특권을 누렸고, 주교들이 대공의 자문위원회에 참석하는 등,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많은 성직자들이 국사에 관여했다.
상류집단일수록 더 광범한 폴란드화가 진행됐다.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는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서부 러시아의 지주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다. 리투아니아의 상류층은 폴란드어와 함께 귀족들의 독립성과 명예를 중시하는 폴란드의 관습들까지 받아들였고, 지주들은 폴란드의 예를 따라 영주 직영지 경영을 발전시켰다.
1569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대등한 관계의 국가연합을 이루었다. 두 국가는 공동의 군주와 공동의 의회를 가졌으나, 사법 · 행정 · 재정 · 군대는 별도로 유지했다. 그러나 이 '루블린 연합'으로 리투아니아는 사실상 폴란드의 종속국이 됐다. 실은 루블린 연합 자체가 폴란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의 지배층이 연합에 동의하지 않자 폴란드의 지기스분트 2세는 군대를 파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부를 장악하여 폴란드 영토에 편입시켰다. 위기를 느낀 리투아니아인들은 그제서야 폴란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협약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평등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사실은 폴란드의 명백한 승리였다. 의회의 대표권에서도 폴란드가 3:1로 우세했으며1), 리투아니아인들 사이에 폴란드의 영향력이 깊이 퍼져 있어 모든 면에서 폴란드가 형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스크바 대공국과 함께 러시아를 양분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마침내 사라졌다. 모스크바가 전 러시아의 통일을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해갈 때, 결속력이 약했던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영향 아래로 녹아들어 가버린 것이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의 지배에 순응하지 않고 이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1648년 흐멜니츠키의 주도하에 일어난 우크라이나인의 반란은 마침내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각주
1 각 군에서 2명씩 대표자를 보냈는데, 연합 직전에 차지한 남러시아 영토를 포함하여 폴란드의 군이 3배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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