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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의 황금기(11세기)
야로슬라프 현공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러시아 최초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브다》의 편찬이다.
야로슬라프는 먼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외부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잇따른 지역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고 아들들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주요 도시에 파견하여 주민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한편, 볼가 강변에 야로슬라블을 건설하는 등 영토의 확장과 안정에도 힘을 썼고, 남러시아 대초원의 페체네크인을 크게 무찌른 후 변방에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유럽 여러 왕실들과의 혼인 정책을 취하여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결혼했고, 세 딸을 노르웨이, 헝가리, 프랑스의 왕에게 시집보냈으며, 세 아들을 유럽의 공주들과 결혼시켰고, 누이 중 둘이 폴란드 왕과 비잔틴 왕자의 비가 되었다. 또 헝가리와 노르웨이 등지에서 도망 온 군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비잔틴의 허락 없이 러시아인 대주교를 임명하는 등 그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종교와 문화 · 예술 면에서도 큰 업적을 쌓았다. 종교를 크게 부흥시키고,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여러 교회와 수도원, 황금 대문 등 훌륭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성당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등 예술도 크게 발전시켰다. 또 글을 널리 보급하고 교육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러시아 최초의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러시아 법전)의 편찬이었다. 슬라브 관습법에 비잔틴의 법을 가미하여 만든 이 법전은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그의 아들들과 다음 세대에 의해 보강되어 러시아의 기본법으로 자리 잡고, 그 후 편찬되는 모든 법전의 모범이자 기초자료가 된다.
이 법전은 피의 복수를 목숨값 지불로 대체하고, 재산의 침해에 대해서는 엄하게 규제하며 이자의 지불에 관한 규정을 두는 등, 당시의 사회 · 경제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당시 키예프 러시아 사회경제사의 초고 사료로도 평가받는다.
1054년 야로슬라프가 죽은 후 키예프 러시아의 정치는 혼돈에 빠진다. 대공위를 둘러싼 분쟁이 극에 달하는 한편으로, 귀족들과 수공업자 · 상인 · 농민들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남쪽에서는 페체네크인의 뒤를 이어 폴로베츠인이 쳐들어와 러시아를 괴롭혔다.
혼란의 와중에서 또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등장한다(비잔틴 황제 모노마쿠스의 외손자라고 하여 '모노마흐'라 불렸다). 참된 기사도의 자질을 갖추어 두루 신망이 높은데다 혁혁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리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1113년 주민들의 추대로 대공위에 오른 후, 여러 공과 귀족들을 제압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그는 이어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폴로베츠, 리보니아, 핀란드, 볼가 불가르, 폴란드, 헝가리인들을 물리쳐 국경을 안정시켰다. 특히 폴로베츠인과는 죽을 때까지 쉼없이 싸워, 그의 손에 죽은 폴로베츠의 우두머리만도 200명에 달했고, 폴로베츠인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겁을 주었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능력 있고 지칠 줄 모르는 조직가이자 정치가, 이후 러시아의 중심무대가 되는 블라디미르 시의 건설자, 자손들에게 주는 〈유훈〉의 저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또한 〈이자에 관한 법령〉과 〈채무 농민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여 고리대금의 이자 제한과 빚진 농민의 지위 개선을 도모했다.
그는 〈유훈〉에서 아들에게 게으름 피우지 말 것, 항상 마음으로부터 신을 두려워할 것, 너그러이 자선을 베풀 것,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줄 것, 가난한 자의 처지를 헤아려줄 것, 과부나 고아를 올바르게 처우해줄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1125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 후로 키예프 러시아는 위대한 지도자를 갖지 못하고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 깊은 늪으로 빠져들면서 영광의 시대를 마감한다. 10세기 말 블라디미르 대공의 치세 때부터 12세기 초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치세 때까지 약 150년간을 키예프의 황금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키예프는 경제 · 사회 · 문화 모든 면에서 당대 세계 최고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부와 명성을 누렸다.
야로슬라프와 그 계승자들이 만들고 보강한 〈루스카야 프라브다〉의 여러 조항에서 당시 키예프 러시아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키예프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농업국이었다. 일찍부터 개화된 농업은 키예프가 융성해지면서 비옥한 초원지대까지도 그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풍부한 농작물을 산출해냈다. 이포제 경작이 행해지고, 키예프 시대 말기에는 삼포제까지 행해지면서 생산력이 높아졌다. 이를 기반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등장하고 자유농민들의 농노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봉건제의 기반이 형성된다.
무역도 크게 발달했다. 공과 그 시종들은 발달한 수로를 따라 돌아다니면서 상품성이 높은 모피 · 밀랍 · 꿀 등으로 공물을 거둬들였다. 그들은 이것들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고, 비잔틴으로부터는 포도주 · 비단 · 장식품을, 동양으로부터는 향신료 · 보석 · 고급 직물을 수입했다.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상인층이 형성됐고, 은화도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도자기 제조 · 금속공예 · 모피 가공 · 제혁 · 직조 · 석조 건축 · 목공예 기술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12세기 키예프 러시아의 인구는 700~800만에 달했는데, 사회가 변화하면서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맨 위에는 '크냐지', 즉 공이 있었고, 그 밑에는 공의 신하인 '드루지나'가 있었다. 드루지나는 지방귀족들과 함께 법전에는 '무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키예프 시대 말기에 이르면 '보야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이 이후 몇 세기 동안 러시아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귀족층이다.
그 밑에 중간층 '류디'가 있고, 그 아래로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촌락공동체의 자유농민 '스메르트'가 있었다. 이 자유농민층이 공에게 납부하는 세금을 전담했다. 세금은 한 가구를 뜻하는 '굴뚝 연기'와 '쟁기'를 기준으로 부과됐다.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나면서 지주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는 채무농민 '자쿠프'도 함께 늘어났다. 이들은 점점 농노의 지위로 전락해갔다. 그 밑에 최하층으로 '홀로프', 즉 노예가 있었다.
그밖에 사제 · 수도사 · 수녀 등 교회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특수집단을 형성했고, 자유로운 몸이 된 노예와 유민들을 포괄하는 '이즈고이'가 별도로 분류돼 있었다.
키예프 시대의 정치제도는 군주제 · 귀족제 · 민주제의 세 요소가 묘하게 혼합된 형태였다. 여러 공국의 공들은 모두 자기네 공국의 사법 · 행정 · 군사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나, 자신이 임명한 관리나 귀족회의(보야레 두마)와 협의하여 그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그중에서 대공의 칭호를 가진 키예프의 공은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전시에는 주요 도시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고, 위급할 때에는 전 국민 총동원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귀족제의 요소인 귀족회의는 공과 그 신하들이 협력한 데에서 생겨났다. 고위 성직자도 두마 내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귀족회의는 때에 따라 일종의 원로원 구실도 했는데, 어디까지나 공의 조언자 · 협력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음에, 민주제 요소로 민회(베체)가 있었다. 모든 가구의 가장이 참여하는 민회는 대체로 장터에서 열렸으며, 전쟁과 강화 결정, 비상입법, 공과의 대립 또는 공들 간의 대립 해소 등이 안건으로 다뤄졌다. 민회는 선사시대 이래 가장들의 집회가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서 가장 역사가 깊었으나, 점점 그 권한이 약해져갔다. 그러나 때와 곳에 따라 큰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뒤에 나올 노브고로트의 민회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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