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러시아의 분열과 몰락(12세기 말)
바투 침공 이후의 수즈달 땅(연대기 세밀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죽은 후 그의 장남 므스티슬라프의 짧은 치세 기간에는 비교적 평온이 유지됐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남쪽에 사나운 유목민 폴로베츠를 무서운 적으로 둔 채, 키예프 러시아는 형제간 · 숙질간의 난투장으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서 키예프 러시아는 끝내 크게 넷으로 분열하고 만다. 로스토프와 수즈달과 블라디미르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노브고로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부, 그리고 남서부의 갈리치 볼린 공국이 그것이다.
분열의 핵은 북동부의 로스토프와 수즈달이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여섯째 아들 유리 돌고루키는 1132년에 로스토프 수즈달 독립공국을 세운 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북쪽과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 '긴 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돌고루키'란 별명을 얻었다. 모스크바 창건자로도 이름 높은 유리 돌고루키는 수즈달 공국을 안팎으로 다져나가면서 1155년에는 키예프까지 공격해 키예프 대공에 올랐으나 2년 후에 죽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1169년 키예프로 쳐들어가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북동부의 블라디미르를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으로 만든다. 그로써 키예프는 '러시아 모든 도시들의 어머니'라는 명성을 잃고 일개 공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는 블라디미르와 그 인근에 화려한 궁전과 아름다운 성당을 짓는 등, 키예프를 능가할 만큼 도시를 예술적으로 꾸몄다. 수공업과 상업도 크게 발전하여 블라디미르는 12세기 종반부터 약 1세기 동안 전성기를 누리다가 그 후 새로운 별로 떠오른 모스크바에 바통을 넘긴다. 이 시기가 바로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시대로 블라디미르 대공이 온 러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한편, 북쪽에서 유서 깊은 도시 노프고로트가 있었다. 활발한 상업과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며 독자적인 화폐와 법률과 군대를 가지고 있던 노브고로트는 키예프가 약해짐과 함께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갔다. 노브고르트와 인근의 프스코프는 특히 민회가 활발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 민주제의 전통이 계승되어 러시아 정치 전통의 한 맥을 형성한다.
위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교역도 거의 끊겨버린 남부의 키예프는 끝없이 밀려오는 폴로베츠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계속되어 모노마흐의 사후 50년간 대공이 18번이나 바뀌었다. 1204년 비잔티움이 제4차 십자군 원정대에 정복되면서 비잔틴 제국과의 우호관계가 끊긴 후에는 산업이 더욱 피폐해져 인구도 크게 감소했다. 1240년 키예프는 결국 몽골족에게 점령당하면서 한동안 버려진 도시가 된다.
키예프가 쇠락하면서 많은 러시아인이 남서쪽 드네프르 강과 드네스트르 강 상류 지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갈리치 볼린 공국이 성장하여 키예프 유산의 상당부분을 계승한다. 남서부에서는 공을 비롯한 지방제후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루시의 분열, 특히 남서부로의 진출은 러시아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이후 남서부 전역과 남부의 일부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북부나 북동부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인은 대러시아인과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의 셋으로 갈라진다.
이리하여 키예프 러시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빛은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아 러시아인들에게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공통의 종교와 언어 · 법률 · 문화를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위대한 나라로 발전하리라는 희망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절망으로 변하고 탄식만이 남는다.
번성하던 키예프 러시아가 몰락한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키예프 공국의 허술함, 통치체제의 취약성, 지방 분권화 경향의 심화, 분화된 계층간의 사회적 갈등 등이 모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지중해 무역이 번성하고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럽의 중요 교역로의 하나였던 러시아의 내륙수로를 이용한 교역이 크게 파괴된 점, 그리고 페체네크인, 폴로베츠인, 몽골인으로 이어지며 끝없이 계속된 외침에 있지 않았나 싶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빌리나(영웅 서사시) 하나에 러시아 땅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보가트리(러시아의 힘센 무사들)는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들은 원수들을 칼로 쳐서 그 몸뚱어리를 두 동강 냈다. 그러자 그 반쪽의 몸뚱어리가 제각기 하나의 온전한 몸뚱어리로 변했고, 그리하여 적들이 점점 더 불어나면서 계속 몰려와 마침내 러시아인들을 꺾어버렸다." |
몽골의 침입(1237년)
몽골 기마병
250년간 러시아를 지배한 유목민족의 사나운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싸움도 잠도 식사도 모두 말 위에서 했다. 14세기 중국 화가의 그림
러시아가 형제들의 싸움으로 기진해가고 있을 무렵, 저 멀리 동쪽의 몽골 고원에서는 무서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1206년 한 몽골 부족장의 아들 테무진이 전 몽골족을 통일하고 그 우두머리가 되면서 칭기즈칸의 칭호를 얻은 것이다. 칭기즈칸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에게 지상에 정의를 다시 세우는 신성한 사명이 부여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 세계는 물론 중국에게도 몽골족은 대수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 터전인 고비 사막과 주변의 거친 초원지대에서 부족들 간에 아웅다웅하며 살고 있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이 온 세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세계를 자기네 발아래 무릎 꿇렸다.
1211년 칭기즈칸은 불과 10만 군사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그리고 5년 후 1억 인구의 중국을 정복했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중국인 기술자들로 증강된 몽골의 대군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단숨에 유린한 후, 북쪽으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질풍처럼 달려들어 왔다.
러시아 땅에서 맨 먼저 부딪친 것은 폴로베츠인이었다. 첫 번째 싸움에서 몽골의 위세에 경악한 폴로베츠인은 오랜 숙적이었던 러시아의 공들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몽골족이 오늘은 우리 땅을 뺏었지만, 내일은 당신들 땅을 뺏을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많은 공들이 원군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1233년 돈 강의 지류인 칼가 강변에서 러시아 폴로베츠 연합군과 몽골군이 격렬히 맞붙었다. 몽골군은 연합군에게 처참함 패배를 안겨주고는 동쪽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몽골과 러시아의 서전인 카가 전투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의 병사를 주어 다시 러시아로 보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러시아의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단지 바투의 군대가 대군이라서만이 아니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으며, 군대를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하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 정찰과 첩보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앞세운 공성술도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략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예컨대 야전에서는 보조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들어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병은 처음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곧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몽골군은 적의 용기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칭기즈칸이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투는 우랄 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공략했다. 그리고 1237년 뜻밖에도 북쪽에서 돌연히 나타나 러시아 동부의 랴잔 공국을 들이쳤다. 랴잔의 병사는 물론 온 시민이 나서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간의 싸움 끝에 도시는 함락되고 시민들은 몰살당했다.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사이의 겨울에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당시 러시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던 대공국의 여러 도시를 휩쓸었다. 아마도 역사상 러시아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일 것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리, 볼가 강변의 여러 도시가 몽골군의 발굽 아래 초토화됐다.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북서부 지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전진을 포기하고 초원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
초원지대를 평정하며 잠시 재정비를 마친 몽골군은 이제 남러시아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어 주민이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와 볼린을 휩쓸고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계속 서진해 슐레지엔의 발슈타트 전투에서 독일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로 진출한 몽골군의 선발대는 아드리아 해안까지 나아갔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온 러시아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굴욕적인 표현을 써어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렀다. '타타르'라는 말은 본디 몽골의 한 부족명이었으나, 러시아에 그 말이 전해지면서 '지옥'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타르타로스'와 겹쳐져 몽골족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그 후 다시 투르크계 민족들까지를 포함하는 유목 기마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의 침략과정과 지배하에서 러시아의 문화는 크게 파괴당하고 사회와 경제는 큰 굴절을 겪는다.
노브고로트의 민회(12세기 ~ 13세기)
키예프 러시아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트의 공으로 앉히려 했다.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대공님,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대공님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이시라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일화에서도 보이듯이, 러시아 제2의 도시였던 노브고로트는 키예프 러시아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의 권한이 점점 커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힘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나타나던 남서부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힘이 커져 공화제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생활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흡사했다.
본디 발트 해와 지중해를 잇는 '바랴기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의 북쪽 중심지였던데다 볼가 수로를 통해 동방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느브고로트는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다. 정치적인 위상도 높아서 키예프 대공은 대대로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트 공에 앉혀 도시를 장악코자 했다. 키예프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두 대공,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프도 한때 노브고로트 공이었고, 야로슬라프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브다〉가 만들어진 것도 이 노브고로트에서였다.
그러나 공들은 결국 노브로고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도시의 정치적 실권은 점차 토착 귀족층인 보야레와 상층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그와 함께 민회(베체)가 도시의 최고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1136년에는 민회가 공을 추방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1156년에는 자신의 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도 얻어낸다.
노브고로트는 또한 러시아의 영토를 방어해낸 도시로도 유명하다. 네바 강에서 스웨덴인들을 크게 무찔렀다 하여 '네프스키(러시아어로 '네바의'라는 뜻)'라는 별명을 얻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노브고로트 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얽힌 이야기다.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노브고로트는 북서부의 침략자들과 맞섰다.
몽골군이 온 러시아를 휩쓸고 있을 때에 운 좋게도 간신히 몽골병의 말발굽을 피한 노브고로트에, 1240년 '등에 비수를 꽂듯' 북쪽으로부터 스웨덴인들이 쳐들어왔다. 당시 21살이던 알렉산드르의 지휘하에 노브고로트인들은 네바 강 하구를 점령하여 노브고로트와 바다 사이를 끊으려는 스웨덴인을 크게 무찔렀다.
뒤이어 서쪽에서 독일 기사단이 침입해 들어왔다. 독일 기사단은 본디 십자군 원정대로 조직됐으나, 뒤에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금의 폴란드 북부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해안을 장악하고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241년 독일 기사단은 서쪽의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노브고로트를 향해 진격해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독일 기사단과 맞서 싸워 그들을 격퇴한 후 프스코프를 해방시켰다.
이어 1242년 4월 에스토니아 추트 호의 얼음판 위에서 대결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기사단이 우세했으나 곧 노브고로트 군의 측면 공격이 주효하여 독일 기사단은 무너졌고, 설상가상으로 퇴각하던 기사단의 발 아래에서 봄철의 해빙으로 호수의 얼음이 깨지면서 숱한 병사들이 수장됐다. 이 싸움은 노래로, 이야기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길이길이 칭송되고 있다. 1246년에는 리투아니아인이 공격해왔으나 이들 역시 격파당했다.
그러나 몽골에는 겸손하게 굴복했다. 노브고로트는 몽골의 직접 침략은 모면했으나 다른 러시아 공후들과 함께 몽골의 칸에게 무릎을 꿇었다. 용맹스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굴욕의 길을 택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몽골에 대한 저항은 가망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몽골과의 협력정책으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칸의 총애를 받아 죽을 때까지 러시아 대공으로 인정받았고, 그가 죽은 후 정교회는 그가 노브고로트 공국과 일부 러시아 영토를 파멸로부터 구했다 하여 그를 시성했다.
노브고로트 시는 5개 구로 나뉘어 있었고, 광범한 자율권을 가진 각각의 구는 도시의 테두리를 넘어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주 농촌을 관할했다. 5개 주 바깥의 새로 획득된 넓은 대지는 도시 전체가 관리했다.
노브고로트에서도 최고의 직위는 사법 · 행정 · 군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공이었다. 그러나 1136년의 민중혁명 민회가 공의 권력과 활동에 세세하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의 권력은 미미해지고 대신 민회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민회는 공을 임명하고 해임했으며, 포사드니크(시 장관)와 티샤츠키(천인장, 千人長)를 선출했고, 대주교 지위에 합당한 세 후보를 선출하여 사실상 대주교의 선임을 결정했다. 또한 민회는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고, 법률 선포, 세금 조달 등을 관장하는 도시의 최고권력이었다. 민회의 성원 자격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 가장이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종을 울려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한 포사드니크는 공과 행정업무를 분담했고, 공의 협력자 또는 부관 역할을 하면서 공에 대해서 도시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공의 부재 시에 역할을 대행했다. 티샤츠키는 자유민 1,000명의 대표로서 상업적 분쟁 등을 처리했다. 대주교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 외에, 세속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적대하는 파당을 화해시키며 해외사절단을 이끄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기관으로 명사위원회가 있었다. 노브고로트의 부와 세력이 반영된 기관으로서, 귀족층, 전 · 현직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 각 구와 거리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민회에서 논의 또는 제정한 법이나 조치들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노브고로트 정치의 흐름을 조절했다.
사법체계 역시 놀라울 만큼 치밀하고 인도주의적이었다. 여러 단계의 법정에 민주적인 배심원 제도와 중재 제도 등을 두어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민주적인 제도하에서 노브고로트는 교역도 크게 성장하고, 키예프의 유산을 물려받아 문화도 크게 발전시키면서 15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한 예로, 노브고로트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들은 사람들 사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노브고로트의 민회도 14세기에 접어들어 몇몇 가무의 파벌 싸움장으로 변하면서 권위를 잃고, 귀족들이 득세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한다. 1471년 노브고로트는 마침내, 점점 세력을 넓혀오던 모스크바의 이반 3세에게 굴복했다. 모스크바는 노브고로트인의 저항을 무참히 짓밟고 제도들을 모두 파괴해 모스크바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그 상징적인 조처로서 이반 3세는 노브고로트에서 민회를 소집할 때 치던 종(콜로콜)을 모스크바로 가져가 버렸다.
몽골의 지배(1240년 ~ 1480년)
킵차크 한국의 시조 바투 칸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복한 몽골의 바투는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온 러시아를 지배한다. 러시아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라 부르고 몽골족의 러시아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했다. '졸로타야 오르다(금장한국, 金帳汗國)'는 '황색 천막 속에서 칸이 중심(황색은 중앙의 상징이기도 함)에 앉아 지배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타타르의 멍에'는 러시아의 서부 지방에서는 약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약 2세기, 남동부 지방에서는 3세기 이상 이어졌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지배의 강도가 달랐다.
몽골족이 러시아를 침략하면서 러시아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대량학살로 인한 인명의 손실, 약탈과 파괴로 인한 재산의 손실, 노예로 팔려간 포로들은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공물의 수탈로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비참한 빈곤에 시달렸다.
몽골은 키예프 러시아의 유산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렸다. 키예프 시대의 찬란한 문화는 그 뿌리를 잘리고 문화의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의 파괴는 산업의 기반을 뒤흔들어 발달한 상업과 수공업을 소멸시키고 러시아를 농업 일색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북부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회와 함께 시민의 자유를 말살해버리고 국민들을 질곡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처음에는 직접 다루가치(총독)나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서 행정 · 징세 ·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 차례나 했다(1275년에 실시한 세 번째 인구조사에서 당시 러시아 인구는 약 1,000만 명). 세금은 납세능력에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거두었다.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됐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이용돼, 많은 러시아 장정이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했다.
그러나 러시아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에 러시아의 여러 공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조공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했다. 킵차크의 칸은 러시아 공들에게서 공물을 받고 그들에게 공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내주었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공에게 '전 러시아의 대공' 칭호를 주어 러시아의 모든 공후 위에 서게 했다. 러시아의 공들은 야를리크를 받기 위해, 그리고 '전 러시아의 대공' 칭호를 얻기 위해 앞다투어 사라이를 드나들었고, 킵차크의 칸은 러시아 공후들의 대립과 반목을 교묘히 이용하여 지배를 강화했다.
몽골 지배하에서 러시아는 북부와 남서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역이 크게 쇠퇴하여 토지경작이 유일한 주산업인 나라로 변했다. 그나마 혹독한 기후와 황폐한 땅에서 농업을 정착, 발전시키는 것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몽골의 징세가 빈약한 러시아 경제를 더더욱 쥐어짰다. 한 역사가는 몽골의 수탈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거대한 기생충이 러시아 민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지위는 계속 악화되어 점점 더 지주에게 예속돼갔다. 그와 함께 여러 단계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의 봉건제후와 경향도 강화됐다.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봉건제하의 중세 유럽과 비슷한 사회구조를 갖게 된다.
몽골 지배하에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것은 러시아 교회였다. 가혹한 지배자였던 몽골인도 종교에 대해서만은 매우 관대했다. 교회와 수도원은 면세특권을 부여받았고, 재산도 보호를 받았다. 또 사라이에까지 주교 관구를 설치하고 교회도 건립했다. 러시아의 여러 공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대가로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 몽골 지배 말기에 이르면, 경지의 약 1/4이 교회의 소유가 된다.
'타타르의 멍에'하에서 문화 · 예술은 전반적으로 큰 침체를 겪었으나, 목조건축과 성화 부문에서만은 큰 진보를 보였다. 특히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활동한 루블료프의 성화는 조화로움과 평온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킵차크 한국은 14세기 전반, 우즈베크 칸과 자니베크 칸 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수도 사라이에는 새로운 시가지가 만들어지고 모스크 등의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다. 이슬람 상인들이 크게 활약하면서 중국(원나라)과 비잔틴 · 제노바와의 무역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궁정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러시아의 제후들이 이반하면서 킵차크 한국의 지배력도 점점 느슨해졌다. 마침내 1395년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일어나 세력을 키워가던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 사라이가 잿더미로 화하면서, 킵차크 한국은 급격한 쇠퇴를 겪고 러시아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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