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국가의 확립(10세기 말)
블라디미르의 드미트리 성당의 석조
한편, 정복왕의 업적을 계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사람이 있다. 키예프에서 블라디미르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시대를 거치며 키예프 러시아는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도 비견할 만한 위세를 갖추면서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스뱌토슬라프는 전형적인 무사 군주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그는 흔히 카자흐 대장이나 바이킹 선장에 비유되는데, 확실히 그의 풍모와 복장 · 습관에는 초원지대의 카자흐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원초 연대기〉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원정을 다닐 때 그는 마차도 솥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어떤 고기도 삶아먹지 않았다. 오로지 말이나 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길쭉하게 베어내 숯불에 구워 먹었다. 그는 또한 천막도 갖고 다니지 않았고, 다만 안장 깔개를 펼쳐 깔고 안장을 머리 밑에 괴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자르 국을 향하여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중에 그는 핀계와 투르크계 부족들을 정복했다. 이어 벌어진 하자르인과의 싸움에서 그의 군사는 하자르의 군대를 박살냈다. 하자르의 수도 이틸을 유린한 그는 카스피 해 서쪽으로 내려가 사만다르 요새를 부수고, 거기서 서진하여 알란인과 카프카스의 몇몇 부족을 정복한 다음, 다시 돈 강 어귀에 있던 하자르의 요새를 덮쳤다. 난타당한 하자르는 끝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얼마 안 있어 소멸하고 만다.
그의 동방원정으로 동슬라브 족의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고,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던 돈 강과 볼가 강 유역 전체가 루시의 세력권 내에 들어왔다.
968년 스뱌토슬라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에 말려든다. 불가리아의 득세를 우려한 동로마(비잔틴) 황제의 요청으로 다뉴브 강 유역에 진출한 것이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의 수도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의 다뉴브 평원을 차지한 스뱌토슬라프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그리스로부터는 황금과 비단과 포도주와 각종 과일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로부터는 은과 말이, 러시아로부터는 모피와 밀랍과 꿀과 노예들이 들어오는 집결지였다. 그는 다뉴브 강 어귀로 수도를 옮기려는 내심을 감추지 않았다.
비잔틴의 황제가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그리하여 격한 전쟁이 벌어졌다. 스뱌토슬라프는 잽싸게 산맥을 넘어 비잔틴 제국으로 쳐들어가 아드리아노플과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다. 그러자 비잔틴 황제는 군대를 우회시켜 불가리아의 수도를 점령해버렸다. 병참선이 끊길 위험에 처한 루시의 군대는 급히 다뉴브 강으로 후퇴했고, 거기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틴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협상에서 스뱌토슬라프는 발칸과 크림 반도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6만 대군 중 남은 2만여 군사만을 데리고 키예프로 돌아오던 그는 도중에 길을 막고 나타난 페체네크 유목민들에게 살해됐다. 페체네크인은 그의 두개골로 잔을 만들어 술을 따라 마셨다.
스뱌토슬라프는 뛰어난 전사였지만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동쪽의 방벽이었던 하자르 국이 무너지자 그보다 훨씬 사나운 페체네크인이 러시아의 대초원을 밀고 들어왔다. 또한, 그가 건설한 제국은 조공제도를 무력으로 유지하는 종래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이념도 없었다. 키예프 국가의 기반이 다져지기까지는 또 한 사람의 힘이 가해져야 했다.
스뱌토슬라프의 사후 그의 세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지 8년 뒤인 980년 막내아들이 키예프 대공위에 오르니, 이가 곧 러시아 민요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블라디미르 공이다.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블라디미르는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혀 아내를 7명, 첩을 800명이나 두었으며, 기독교와 유태교, 슬람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 통합하는 일에는 광적일 만큼 정열을 쏟은 군인이며 행정가였다.
그는 먼저 8년간의 내란 동안 심하게 흔들린 키예프 대공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이어, 서쪽으로 폴란드인에게 뺏겼던 갈리치를 되찾고, 북쪽으로 리투아니아인을 쳐서 발트 해 연안에 러시아 진출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대초원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던 페체네크인을 키예프에서 이틀 거리 밖으로 몰아낸 다음, 그 경계에 방비를 단단히 갖춘 도시와 요새들을 세웠다.
또한 비잔틴의 황녀와 결혼하고 체코 · 폴란드 · 헝가리 · 불가리아 · 로마 교황 등과의 교류도 넓혀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언어와 문자의 보급에도 힘쓰고 그리스 문헌도 도입하여 문화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슬라브 족은 이념적 통일성을 갖게 되고, 대공과 공후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봉건제가 촉진되며, 비잔틴 및 유럽 세계와 가까워져 문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
루시, 기독교를 받아들이다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988년)
러시아는 키예프 지배자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988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독교국이 되었다. 그림은 〈라지빌 연대기〉에 나오는 관련부분으로, 윗부분은 그리스 정교의 화려한 의식이고, 아랫부분 사절들이 보고하는 광경이다.
〈원초 연대기〉에 그리스 정교 수용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블라디미르가 정교를 수용하기 2년 전인 986년, 주변 여러 나라에서 여러 교파의 대표들이 블라디미르를 개종시키려고 그를 만났다.
먼저 유태계 하자르인이 그에게 유태교의 장점들을 설명하며 개종할 것을 설득했다.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유태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느뇨?"
블라디미르는 흩어진 민족의 종교에서 장래성을 볼 수 없어 이를 물리쳤다.
이어 블라디미르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자 동쪽에서 볼가 불가르인이 왔다. 불가르인의 대표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내세에서 무함마드가 미녀 70명씩을 주신다"면서 호색한인 블라디미르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계율에 금주 조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술은 러시아인의 기쁨이다. 우리는 이 낙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로마 교황정과 비잔틴 교회에서 파견된 사절들이 블라디미르의 눈에는 반갑게 비쳤다. 할머니 올가가 957년에 이미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가 이미 러시아 사회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사신을 보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비교 분석케 했다.
독일에서 로마 교회의 의식을 관찰하고 돌아온 사신은 거기서 "아무런 영광도 보지 못했노라"고 보고했다.
반면에 비잔티움의 소피아 대성당에 간 사신은 그 의식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거기가 천상인지 지상인지 알 수 없었나이다.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은 분명 지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나이다."
블라디미르는 마침내 그리스 정교를 선택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깊다. 당시 이미 동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서서 두 문화를 두루 받아들이고 있던 키예프 러시아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 덴마크 · 노르웨이 · 헝가리 등이 속속 기독교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동양 세계의 왼쪽 날개가 되기보다는 유럽 세계의 오른쪽 날개가 되는 것이 더 유리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으로 키예프 러시아는 가톨릭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를 수용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에서 멀어지면서 가톨릭을 수용한 인접국들, 특히 폴란드와의 오랜 반목과 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는 그리스 정교 의식이 아름다움 외에, 당시 러시아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라틴 문화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던 점,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등 그리스 정교회의 사도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러시아 전도에 나섰던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 당시에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세계의 대립과 반목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사실상 정교의 종주국이 되고, 그 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사회에서 고립되는 한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180도 태도를 바꿔 신을 두려워하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에 대한 형벌을 가볍게 했다. 이교도의 우상도 타파하고 각지에 교회도 세웠다. 후일 그는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루시의 세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진통이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교적 큰 무리 없이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농민들 사이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의 전통이 전해내려오긴 했으나, 정교가 민간신앙 요소를 많이 흡수하면서 농민들을 기독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한편, 루시의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적극 환영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거칠고 야만스러운 이교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발견했다. 새 종교는 또 그들에게 문명세계에의 소속감을 심어주었다.
996년 키예프에 첫 교회당인 십일세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하여 러시아 곳곳에 많은 교회가 들어섰다. 러시아의 교회는 종교로서의 역할 외에, 글자를 가르치고 야만적인 관습을 순화시키는 기능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법률의 역할도 했다. 또 키릴 문자의 보급과 함께 러시아 문화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키예프의 군주와 국가에게 나라의 통합을 촉구하고 동시에 비잔틴, 그리고 기독교 세계 전체와의 유대를 강조하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러시아 교회는 차츰 중심적인 사회 기구로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정교의 도입과 함께 러시아에는 비잔틴 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문학 · 예술 · 법률 · 풍속 · 관습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는 비잔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건축과 회화 분야는 비잔틴의 영향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11세기 중반에 키예프와 노브고로트, 두 곳에 세워진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며, 그밖에 키예프 근교의 페체르스키 수도원, 블라디미르의 우스펜스키 성당과 드미트리 성당, 블라디미르 근교 넬리 강변의 포크로프 성당도 유명하다. 또, 비잔틴 양식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화, 부조로 만든 성화 상이 유행하여 성당 등 건축물의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
키릴 문자의 보급(10세기)
파보르스키의 목판화. 1954년
〈이고리 공 원정기〉는 키예프 러시아의 대표적인 서사문학 작품으로 키릴 문자로 쓰인 것이다.
서양 언어에서 라틴계 알파벳에 익숙한 우리는 N자를 거꾸로 써놓은 듯한 글자나 그리스 대문자의 델타(Δ)나 파이(Π)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사용하는 러시아 문자를 보면 당혹스럽다. 그 이색적인 러시아어 자모는 9세기 말에 만들어진 키릴 자모를 개량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글자꼴을 갖춘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다.
러시아에 키릴 문자가 들어온 것은 기독교의 전래와 관계가 깊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 전례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서 키릴 문자가 함께 들어온 것이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에 걸쳐 슬라브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은 선교사들 가운데에 그리스인 키릴로스가 있었다. 키릴로스는 860년대에 형 메토디오스와 함께 지금의 체코인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다. 그때 선교의 필요에 의해 슬라브어 발음을 토대로 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글라골 문자고, 그 문자체계에 상응하여 형성된 언어체계가 고대교회 슬라브어다. 그는 그리고 정교의 성서와 전례를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로 번역했다.
이어 그의 제자들이 9세기 말에 불가리아에서 글라골 문자를 발전시켜 키릴 문자를 고안해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익히고 쓰기 쉽도록 비교적 단순한 그리스 알파벳 대문자를 많이 활용했다. 선교사 키릴로스의 슬라브 명 '키릴'을 따 '키릴 문자'로 이름 지어진 이 문자는 점차 슬라브 권의 동부에 퍼지면서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정착한다.
10세기 들어 선교사들이 러시아에 내왕하면서 먼저 교회 슬라브어와 글라골 문자가 들어오고, 곧이어 키릴 문자가 따라 들어왔다. 11세기까지는 성서와 설교집 · 기도문 · 찬송가 등에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가 함께 쓰였으나, 그 후에는 키릴 문자만이 살아남아 오늘의 러시아 문자로 이어졌다.
교회 슬라브어와 키릴 문자는 기독교의 전파를 목적으로 도입됐으나, 이후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기록 · 보존 ·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먼저 각종 종교서적을 포함하여 그리스 · 로마의 많은 문헌들이 번역됐고, 이어 역사적 사건이나 각종 제도들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키예프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문자의 도입으로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다져지면서, 그와 함께 키예프의 기록문학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먼저, 기독교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왔다. 성서 설화 모음집, 설교집, 찬송가, 성자들의 생애기록 등이다.
그중 유명한 것으로 페체르스키 수도원 성자들의 생애 모음집인 《파테리콘》과, 초창기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이며 설교자였던 힐라리온의 설교집 《율법과 은총》이 있다.
이어 주로 수도사들에 의해 많은 연대기가 쓰였다. 이 연대기들은 다소 종교적으로 각색된 바가 없지 않지만, 러시아 초창기 역사의 구체상을 전해주는 자료로서 값진 의미가 있다. 최초의 연대기는 11세기 중엽부터 쓰여 12세기 초에 편찬된 〈지난 세월의 이야기〉로, 흔히 '원초 연대기'라 불린다. 이후 17세기에 이르기까지 키예프와 노브고로트, 블라디미르에서 많은 연대기가 편찬됐다.
세간 문학으로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유훈〉과 작자 불명인 〈이고리 공 원정기〉가 유명하다. 이중 푸시킨이 "우리나라 문학의 황야지대에 홀로 외롭게 우뚝 선 기념비"라고 부른 〈이고리 공 원정기〉는 1185년 폴로베츠인과의 싸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운율을 가진 산문으로서 서사시와 서정시의 요소를 훌륭하게 결합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인상적인 이미지와 시적인 서정미, 생생한 표현, 넘치는 힘이 너무도 경탄스러워 후세의 모작이라는 논쟁까지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고리 공 원정기〉는 남러시아의 한 공후, 이고리 공의 출정에서 시작해서 전투에서의 참담한 패배, 공의 아내 야로슬라브나의 비탄에 잠긴 애도가 이고리의 탈출과 귀환으로 이어지는데, 러시아의 공들에게 '루시의 땅을 위해' 분기할 것을 호소하는 민족주의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야로슬라브나가 바람과 태양과 드네프르 강을 향하여 자신의 불행을 탄식하면서 남편을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의 한 구절을 보자.
애닯구나 바람이여, 하늘을 가는 바람이여!
말해다오, 어이하여 그대는
그처럼 무정하게도 불어닥쳤느뇨?
어이하여 그대 튼튼한 날개에
미운 적 폴로베츠의 숱한 화살을 실어
우리 편 군사에게 쏘아댔느뇨?
구름 아래 높이 날며
푸른 바다 배 뒤엎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더란 말이더냐?
어이하여, 애닯구나 바람이여,
나의 기쁨을, 나의 행복을
바람에 흩날리는 풀들처럼
산산이 날려버렸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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