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인의 이동과 정착(AD 5세기 ~ 9세기)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를 가꾸며 역사를 이끌어간 슬라브인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늦다. BC 5세기에 저술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드네프르 강과 부크 강 유역에 살며 1년에 한 번씩 며칠 동안 늑대로 변신한다는 네우로이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주지나 민속(늑대 제사)으로 보아 이들이 슬라브인의 한 종족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스키타이 농민'이란 표현 속에 슬라브 족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정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슬라브인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AD 1~2세기에 살던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 그리고 6세기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 고트 족의 역사가 요르다네스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슬라브인은 베네디, 안테스, 스클라베노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슬라브인들은 그보다 훨씬 전, 일찍이는 BC 10세기 무렵부터 우크라이나의 드네스트르 강과 드네프르 강의 중 · 상류, 폴란드의 비스툴라 강을 중심으로 한 삼림과 늪지대를 이동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응집력과 군사력이 약했던 탓으로 뒤늦게야 역사의 수면으로 떠올랐을 따름이다.
프로코피우스는 슬라브인에 대해서 "그들은 초라한 움막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며 거주지를 자주 바꾼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통나무를 세우고 흙벽을 바른 허름한 움집에 살았다. 기본 생업은 화전 농업과 목축이었으나 어로나 수렵에도 뛰어나고 양봉기술도 터득하고 있었다. 슬라브인은 강력한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해 위험이 닥치면 집을 버리고 성채가 있는 야영지로 피했다.
2~4세기에 고트인이 남하하면서 슬라브인의 거주지를 휩쓸자 슬라브인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 이어 4~5세기에 훈 족에 쫓긴 슬라브인의 한 무리가 다뉴브 강 하류를 거쳐 발칸 반도의 비잔틴 제국으로 들어갔다. 그 뒤 훈 족의 제국이 붕괴하면서 슬라브인은 서로는 엘베 강에서, 동으로는 발트 해 남동부와 드네프르 강 상류 전역으로 진출했다.
이 와중에서 슬라브인은 셋으로 갈라졌다. 그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들어가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 서유럽권에 통합된 서슬라브 족으로, 오늘날의 폴란드 · 체코 · 슬로바키아인이 이에 속한다. 남서쪽으로 이동해 발칸 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인은 오늘날의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 불가리아인이 되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평원에 정착한 것이 동슬라브 족이다.
동슬라브 족은 이후 몇 세기에 걸쳐 북쪽으로는 발트 해 남동안에서 북극해, 남쪽으로는 흑해 북서안에서 다뉴브 강 하류, 동쪽으로는 오카 강(볼가 강의 지류)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서서히 러시아사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고대 슬라브인의 사회는 가부장제의 씨족사회였는데, 수십 호 정도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장로나 선출된 우두머리가 통솔했으며 재산은 공동소유였다. 중요한 사항은 가장들이 부락집회를 조직, 전원 합의 방식으로 결정했고, 관습법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엄격히 규제했다.
종교의 최고 형태는 조상숭배였으며, 번개의 신 페룬과 가축과 부의 신 벨레스를 최고의 신으로 모셨고, 농경 의례와 관계 있는 신으로 불의 신 스바로크와 태양신 다지보크, 바람의 신 스트리보크 등 다양한 신들이 있었다. 이밖에도 키, 시체크 등 전설상의 영웅이 신화적 서사시에 출현하며, 숲의 정령 레시, 물의 정령 보댜노이, 집의 정령 도모보이, 물과 숲의 정령 루살카, 마녀 야가 할멈, 불사의 노인 코시체이 등이 슬라브 민화에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이교도적 민속신앙은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교묘하게 변형되어 민간에 전승된다.
9세기경 동슬라브 족의 경제와 사회와 문화는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12개 부족의 느슨한 연맹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은 철제 도구를 사용하는 꽤 수준 높은 농업기술을 갖고 있었고, 어업 · 수렵 · 양봉 · 축우 등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직조 · 목공 · 금속 세공 · 도기 제조 등의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상업이 이루어졌다.
약 3,000년 전에 그려진 북러시아의 원시 암면벽화
하지만 삼림과 늪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혹독한 기후를 이겨내며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슬라브인들은 차츰 남쪽의 초원지대와 흑해와 발칸 반도에 눈을 돌렸다. 하자르와 교역도 시작하고 다뉴브 강 하류와 비잔틴 제국에 군사원정도 감행했다.
그러나 주변의 나라들은 군사력이 보잘것없었던 동슬라브 족으로서는 넘보지 못할 강국들이었다. 북으로는 호전적인 노르만 족, 동으로는 강력한 상업국가인 볼가 불가르 왕국, 남동쪽으로는 그보다 한 수 더 위인 하자르 국, 남쪽으로는 막강한 비잔틴 제국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힘이 약한 슬라브인은 이중 누군가를 지배자로 받들어 모시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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