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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3세, 동북러시아 통일(1485년)
이반 3세
그의 치세에 러시아는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모스크바 대공은 '전 러시아의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온 러시아에 군림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때까지 러시아인들에게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 된 '차르'와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도 그고,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의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최악의 제도로 지탄받아오며 혁명의 불씨를 일으킨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다.
22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이 된 이반 3세는 보기 드문 정치수완과 비전을 가진 야심가였다. 그의 통치하에서 러시아의 통합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1470년대 중반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전의 블라디미르 대공국이 관할하던 영토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이반 3세의 영토욕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제일의 목표는 당시 그 찬란했던 시기를 보내고 한 귀족문벌의 지배하에 있던 북쪽의 대 노브고로트 공국이었다. 1471년에 이반 3세에게 패한 후 모스크바에 충성을 약속한 바 있는 노브고로트의 지배자들이 다시 이반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모스크바와 함께 러시아 땅을 양분하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모스크바의 지배에 저항해온 것이다.
1478년 화가 난 이반 3세는 노브고로트와의 두 번째 교전에 착수했다. 리투아니아의 도움은 실현되지 못했고,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고 있던 노브고로트는 도시를 포위한 모스크바 군대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이반 3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노브고로트인의 일부를 처형 또는 추방하고 일부는 농촌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상징적인 조처로 민회를 소집할 때 쓰던 종을 모스크바로 가져가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영지인 노브고로트에 민회의 종은 필요 없다. 포사드니크(시장관)도 필요 없다. 내가 온 나라를 지배한다."
1489년 또 한 차례의 대추방이 있은 후 노브고로트는 마침내 모스크바 러시아의 한 부분이 됐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발트 해 연안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러시아 북부의 광할한 대지를 손에 넣었다.
다음 차례는 트베리였다. 200년 동안 모스크바와 대립하며 동북러시아의 패권을 다투어온 트베리 공국도 이제 모스크바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트베리의 공 역시 변변히 저항도 못 해보고 이반 3세에게 무릎을 꿇었다(1485).
몇몇 작은 공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로써 동북러시아 통일의 위업이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킵차크 한국도 물리쳐 200여 년에 걸친 '타타르의 멍에'에서도 풀려났다. 모스크바가 명실상부한 동북러시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반 3세는 이제 키예프 러시아의 정통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서쪽과 남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있었다. 이반 3세가 동북러시아를 통일하자 모스크바와 리투아니아의 접경지대에 있던 여러 공국이 리투아니아로부터 모스크바로 충성의 방향을 돌렸다. 리투아니아가 순순히 바라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윽고 1500년에 싸움이 벌어졌고, 승리한 모스크바는 러시아 중서부의 스몰렌스크와 체르니코프의 대부분을 얻었다.
한편, 북서쪽으로는 당시 리가에 근거지를 두고 호시탐탐 러시아 진출을 엿보던 리보니아 기사단을 무찔러 그들을 제자리에 묶어놓았다. 동쪽으로는 카잔 한국과도 싸워 눈에 띄게 약화시켰다.
이렇게 다져진 모스크바 러시아는 이제 몽골 지배 이전의 키예프 러시아와 달리 분명한 민족국가의 모습을 띠게 됐다. 단일 인종, 단일 종교, 단일 언어, 민족적 일체감 등의 요소 외에도, 모스크바 러시아는 공국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던 키예프 러시아와 달리 단 한 사람의 우두머리 밑에 강력한 끈으로 규합되어 있었다. 또한 국민 모두가 동슬라브인 중에서도 대러시아인이었다. 키예프의 공들은 다투어 내부분열을 일으켰으나, 모스크바는 러시아인의 힘을 결집하여 외국세력과 대결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러시아의 통합에 더 박차를 가했다.
1472년 그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에 함락될 때 성벽에서 싸우다 전사한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조에(소피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주선자는 바티칸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러시아를 자기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에 맞설 광범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교황의 기대는 빗나갔지만, 그 결혼은 모스크바의 지위를 크게 격상시켰다.
이반 3세는 결혼 후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성 게오르기 상에다 비잔틴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를 합하여 쌍두 독수리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호칭에 '차르(로마의 황제 이름 '카이사르'가 변형된 말로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가리켰다)'와 '전제군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비잔틴 황제에게 받았다는 왕관 '모노마흐의 모자'도 쓰기 시작했다. 궁정의 의전절차도 장중하게 고쳤다.
그러나 러시아의 여러 공과 토착귀족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귀족회의(보야레 두마)를 구성하여 대공을 견제하고 고위직책을 독점했다. 이반 3세는 법전을 새로 만들어 토착귀족들에 대한 규제책을 마련하는 한편, 하급전사들에게 군역을 조건으로 봉토(포메스테)를 주어 군주에게 충성하는 사족(드보랴네) 층을 육성했다. 이들이 후에 궁정귀족이 되어 토착귀족들을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된다.
1497년에 키예프 시대의 〈루스카야 프라브다〉와 프스코프의 〈수데브니크〉를 참조하여 만든 이반 3세의 법전 〈수데브니크(재판 법규집)〉는 러시아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지주에게 점점 예속돼가던 농민들의 이주를 제한하여 농노제의 완성에 기여한 것이다. 법전은 전국적으로 '유리의 날(11월 26일)' 전후 2주간만 농민이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게 하고, 그것도 채무를 완전히 청산한 경우로만 제한했다.
이로써 농노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의 기반이 닦였다. 이반 3세가 닦은 기반에 그를 계승한 바실리 3세와 이반 4세(뇌제)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놓아 러시아 특유의 전제권력이 확립된다. 이반 3세는 후에 '이반 대제'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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