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9일 토요일, 게오르게 가폰(George Gapon)이란 러시아정교회 신부가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왔다. ‘내일 일요일에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입니다. 시위대들은 니콜라스 황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것입니다. 황제가 친히 나와서 청원서를 받음이 바람직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전갈을 받은 정부는 당장 황제에게 보고하지는 않고 모른채 했다. 장관들은 ‘황제께서 어떻게 친히 시위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는 말인가? 안될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때 황제는 생페터스부르크를 떠나 차르스코에 셀로(차르의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반정부 시위대 대표들은 황제가 나오기 어려우면 황실의 누구라도 대신 나와서 청원서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가폰 신부는 마침내 경찰당국을 방문하여 경찰 책임자라도 시위대와 만나 청원서를 받아 황제에게 전달해 줄것을 당부했다.
'피의 일요일'에 시위대에게 발포자세를 취하고 있는 군인들. 1905년.
경찰당국은 가폰을 반정부 분자로 간주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가폰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젊은 신부들도 시민들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새로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스비아토폴크-미르스키(Sviatopolk-Mirsky)공자는 아무래도 군대를 더 투입하여 시위를 막아 황제의 근심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가폰 신부는 일단 석방하였다. 시골에 있던 니콜라스가 대규모 시위 계획을 보고 받은 것은 그날 밤 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별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생페터스부르크에서는 내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시내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는 토요일 밤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주일이었다. 어느 틈에 거리마다, 광장마다 시위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2만명이나 운집했다. 시위대의 앞에는 사회주의 사제인 가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시내의 한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정부군의 어떤 병사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것이다. 그러자 시내의 여러 곳에서 총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시위대는 흩어졌다. 얼마후 시가지는 잠잠해 졌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시위를 주도한 게오르기 가폰 신부
그로부터 2주일 후인 1월 22일이었다. 가폰 신부가 또 다시 시위대를 이끌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로 노동자들인 시위대는 서로 팔짱을 엮고서 행진하였다. 십자가와 이콘(聖像)과 교회의 깃발을 든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국기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시위대들은 행진하면서 성가를 불렀으며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국가(國歌)인 ‘신이시여 차르를 지켜주시옵소서’를 불렀다. 시위대는 오후 2시경에 겨울궁전 앞에 모이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군대와 코사크 기병대와 제국의 경기병들이 거리의 중요지점이나 길목에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후 시위대들이 나타나자 군대는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92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위대의 앞에 섰던 가폰 신부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선두에 섰던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다.
시위대는 흩어져서 시내 밖으로 쫓겨났다. 군대가 뒤따라가서 이들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했다. 이때에 무려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날을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다. 비록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날은 러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제정러시아에는 전통적으로 ‘차르와 백성은 하나다’라는 관념이 존재했었다. 총알이 성상과 깃발과 심지어는 차르의 초상화를 뚫고 지나가자 시위대는 ‘차르는 우리를 돕지 않는다’라고 절규하였다. ‘피의 일요일’에 대한 뉴스가 전 유럽에 퍼졌다. 영국 노동당 수상인 램제이 맥도날드(Ramsay MacDonald)는 니콜라스 황제를 ‘피에 얼룩진 인간, 만인의 살인자’라며 비난했다. 이어 니콜라스를 비난하는 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피의 일요일' 생페터스부르크에서의 학살. 1905년.
10. 차레비치 알렉세이와 요승 라스푸틴
니콜라스 2세의 치하에서는 의회(Duma)와의 갈등, 백성들의 시위, 볼셰비키의 대두 등으로 국내정세가 혼미를 거듭하였다. 그런 중에 로마노프 왕조에 또 하나의 걱정꺼리가 생겼다. 후계자에 대한 문제였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니콜라스 2세와의 사이에서 네 딸을 연속으로 두었다. 1895년에 올가를, 1897년에 타티아나를, 1899년에 마리아를, 1901년에 아나스타시아를 생산하였다. 하지만 딸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들을 낳아야 했다. 드디어 1904년 8월 12일 대망의 아들 알렉세이가 태어났다. 축하의 분위기가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꾸만 병약하여서 정밀진찰을 해 보았더니 혈우병(헤모필리아)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면 멈추지 않는 질병이었다. 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질환이었다. 당시 혈우병은 고칠수가 없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의 질병이었다.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면 안된다. 그래서 정말 불면 날라갈까 쥐면 부서질까 걱정을 하며 키웠다.
황태자 알렉세이와 어머니 알렉산드라. 1914년.
알렉세이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가 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 인자를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스페인과 프러시아 왕가에서도 혈우병이 발견된 것을 보면 알렉산드라도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혈우병은 여자들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럽의 여러 왕실에서 혈우병 증세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혈우병은 ‘왕가의 질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알렉산드라 왕비가 낳은 네 딸은 모두 결혼하기 전인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네 딸 중에 누가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았는지 알수 없다. 다만,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알렉세이에게 혈우병 유전인자가 전해져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니콜라스와 황태자 알렉세이. 1914년. 흑해의 휴양지에서.
당시에는 국내외 정세로 인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존립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니콜라스 2세와 알렉산드라 왕비는 아들 알렉세이에게 무서운 혈우병 증세가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했다. 후계자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 가뜩이나 혼미한 정세에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왕족 중에서도 황태자 알렉세이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무언지 모르지만 심각한 악성 질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의 병을 고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러시아에 있는 용하다는 의사들을 초청하여 치료토록 해 보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알렉산드라 왕비로서 할수 있는 일은 종교의 힘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성자라고 하는 여러 사람에게 의지하여 보았다.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때에 자칭 성자인척 하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등장하였다. 라스푸틴이 몇 사람들의 질병을 기도로서 고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1912년 10월의 어느날, 니콜라스를 비롯한 가족들이 현재의 폴란드에 있는 비아로비에차(Bialowieza)와 스팔라(Spala)의 황실 사냥숙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알렉세이가 뜻밖에 큰 부상을 입었다. 알렉세이는 흐르는 피를 멈출수 없어서 거의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니콜라스는 어쩔수 없이 신부들을 불러 마지막 병자성사를 치루게 했다. 1912년 10월 10일이었다. 절망한 왕비는 마지막 수단으로 기도로서 병든 사람을 고쳤다는 라스푸틴에게 연락하였다. 라스푸틴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눈물을 보았고 그대의 기도를 들으셨도다. 슬퍼하지 말지어다. 어린 아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이 너무 그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기적적으로 나았다. 알렉세이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회복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 성자라는 증거라고 확신했다. 왕비는 하나님이 라스푸틴과 함께 하고 있다고 믿었다. 왕비는 라스푸틴을 궁전으로 초청하여 되도록이면 함께 지내게 하고 극진하게 모셨다. 그로부터 누구든지 라스푸틴에 대하여 비난성 발언을 한다든지 또는 그의 도덕성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왕비의 분노를 샀다. 라스푸틴이 알렉산드라 왕비와 니콜라스 2세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아, 못 말리는 모정이여!
요승 라스푸틴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모임. 1914년. 이들은 라스푸틴을 성자로 믿었다.
11.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
1914년 6월 28일, 유럽의 한 구석 사라예보에서는 한방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검은 손’(Black Hand)이라고 하는 세르비아민족주의단체의 멤버인 가브릴로 프린시프(Gavrilio Princip)라는 청년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오스트리아제국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수 없는 사태였다. 땅을 치고 통탄한들 죽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아 돌아 올리는 만무하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제국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만치 세르비아를 비롯한 제국내의 불순분자들을 즉각 징계할 필요가 있었다.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유럽은 양대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상호방어동맹을 맺고 있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러시아를 중심으로한 범슬라브 연맹과 오스트리아 및 독일 중심으로한 동맹국이 대규모의 전쟁을 피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으로 세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1차 대전중 세르비아인을 총살하는 오스트리아군. 1차대전중 세르비아인은 85만명의 희생되었다. 전쟁 전의 인구의 거의 절반이 희생되었다.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의 여러 강호들이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비밀리에 협상을 하고 동맹을 맺었다가 파기하거나 다시 동맹을 맺는 일 등은 지면상 생략키로 한다. 그러한 중에 제정러시아의 니콜라스는 어떤 정책을 내걸었는가? 한마디로 말하여 우유부단이었다. 범슬라브 연맹을 생각하면 오스트리아-독일과 일전을 불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프러시아는 처갓집이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번의 비밀서한들이 왕래되었다. 이를 ‘윌리와 니키의 서신교환’(Willy and Nicky Correspondence)라고 부른다. 윌리는 빌헬름(윌리엄)을 말하며 니키는 니콜라스를 말한다. 결국 두 사람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자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범슬라브연맹의 일원인 세르비아의 위기를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니콜라스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접경지대에 한하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은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러시아는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새로운 병력을 어떻게 무장하고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에 대한 임시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전면 동원령을 내렸다. 각료들과 장군들이 전면 동원령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서 재고할 것을 요청했지만 니콜라스는 그런 요청을 묵살하였다. 니콜라스는 1914년 7월 25일 전군에 비상령을 하달하였다. 전군이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비상령은 비록 전투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상대방을 충분히 위협하는 것이었다. 마치 러시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알바니아로 퇴각하는 세르비아 병사들
12. 프러시아의 최후통첩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피살된지 꼭 한달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배후에 있는 독일과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러시아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국들도 참여하였다. 러시아 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았다. 아무것도 득이 될 것이 없는데 왜 전쟁에 참여하느냐는 여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전군에 전투태세를 명령했다. 하지만 만일 평화협상이 시작된다면 어떠한 전투행위도 일으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에게 향후 12시간 내에 전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최후통첩을 보낸 12시간이 지났다. 생페터스부르크에서는 독일 대사가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세 번씩이나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독일 대사는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는 것으로 믿고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수 없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1914년 8월 1일 러시아와 독일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론은? 러시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들통이 났다. 가장 잘못된 점은 러시아군에 대한 황제의 지나친 신뢰였다. 니콜라스를 비롯한 생페터스부르크 당국은 러시아군이 전통적인 스팀롤러(우격다짐) 정신으로 곰처럼 밀고 나가면 패배가 없을 것으로 믿었다. 러시아군의 전력은 정규군이 1백40만 명이지만 여기에 동원령으로 징집된 병력까지 합하면 무려 3백1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전국 동원령이 지켜진다면 수백만명의 병력이 추가된다. 하지만 숫자만 많았을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게 지급할 탄환이 아니라 식량이었다.
독일은 철도가 잘 발달하여서 순식간에 병력을 이동할수 있었다. 하지만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병사들이 전선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8백마일(약 1천300Km)을 열차로 가야 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보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를 여행해야 해다. 러시아의 중공업은 취약하여서 군장비를 보급하지 못했다. 탄약도 턱없이 부족했다. 흑해에서의 사정은 더욱 난감했다. 러시아의 흑해함대는 독일의 잠수함(U-Boat)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흑해의 한쪽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터키가 대형 대포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의 군수물자 수송도 어려움이 많았다. 전선으로부터 4천마일(약 6천400km)떨어진 곳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수송하려니 제대로 시기를 맞출수 없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다만 하늘의 대천사가 도와서 흑해가 어서 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물론 흑해가 얼어 붙는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독일 잠수함이 활동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것이나마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장관인 블라디미르 수콤리노프와 역전의 야전군 사령관인 니콜라스 니콜라이에비치 대공이 서로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면서 다투는 바람에 명령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모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러시아군은 기어코 동부 프러시아의 독일지방을 공격하였다. 일사불란한 독일군은 곰처럼 미련한 러시아군을 완전 격퇴하였다. 얼마후의 탄넨버그(Tannenberg)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글자그대로 전멸하였다. 탄넨버그의 패배는 제정러시아의 앞날에 불길한 징조를 보여준 것이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탄넨버그 전투에서 전사한 러시아 장교들은 모두 로마노프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유능한 장교들이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로-헝가리군과의 전투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고 또한 터키군도 잠시 물리쳤지만 악착같고 막강한 독일병정들과의 전투에서는 백전백패했다. 이곳 저곳에 무명용사의 묘지들만 늘어났다.
탄넨버그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 1914년.
13. 페트로그라드의 폭동
1915년 봄과 여름동안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제정러시아 군대의 숫자는 1백40만명이었다. 그리고 97만6천명은 포로로 잡혀갔다. 1915년 8월 초에는 폴란드의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 외지에서 패배가 계속되자 러시아 국내는 겉잡을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처음에는 폴란드의 독일계 상점들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상점이나 공장 또는 시골의 농장들은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패전이 계속되자 백성들은 폭도로 변하여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폭도들은 왕비를 수녀원으로 보내어 연금토록 하고 황제는 폐위시키며 라스푸틴은 교수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니콜라스는 이러한 소리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잠시 귀병에 걸렸던 모양이다. 의회(Duma)가 비상소집되어 특별방어위원회(Special Defence Council)가 구성되었다. 위원들은 의회 의원들과 황제의 장관들이었다. 그 이전인 1915년 7월, 차르의 사촌인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10세는 니콜라스에게 특사를 보내어 자기가 전쟁종식의 중재역할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덴마크 국왕의 특사는 런던과 베를린도 여러번 방문하여 평화회담을 준비하였다. 특사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니콜라스의 어머니도 만나 평화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덴마크의 제안을 묵살하였다. 참고로 말하면 니콜라스의 어머니는 덴마크의 공주였다.
1917년 생페터스부르크에서의 군대 시위. 이들은 '10명의 자본주의자 장관들을 파면하라' '모든 권력은 노동자, 농민, 군인의 대표 및 사회주의자 장관들에게 이양하라' '니콜라스 2세를 베드로-바울 요새에 연금하라' 라는 요구사항을 플라카드에 써서 시위하였다.
니콜라스는 전쟁장관을 교체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마련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계속 후퇴를 거듭했다.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라 왕비에게 차르로서 직접 전선에 나아가 병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하늘이 차르에게 맡긴 사명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을 고무하기 위해 일선으로 가겠다는 주장이었다. 니콜라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전선으로 향했다. 니콜라스는 1915년 9월 폴란드가 모두 독일의 수중에 떨어지자 유능하며 존경 받는 군총사령관인 사촌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를 파면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니콜라스가 일선에 나온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다. 더구나 러시아군 총사령부가 있는 모길레프(Mogilev)로부터도 한참 떨어진 전선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명령체계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실제로 전선에서 니콜라스의 역할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작전명령은 참모총장인 미하엘 알렉세이에프(Michael Alexeiev)장군이 내렸으며 니콜라스는 군대를 사열하거나 야전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또는 장교들과 그럴듯한 오찬을 함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후 페트로그라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니콜라스는 일선에 나와 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사실상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제국이 몰락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니콜라스가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에 국내의 정치는 알렉산드라 왕비의 손에 맡겨졌다. 하지만 요승 라스푸틴과의 관계와 또한 왕비가 독일 계통이라는 점 때문에 각료들은 왕비를 절대 신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니콜라스에게 요승 라스푸틴을 제거하라고 여러번 요청하였다. 하지만 왕비가 그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터에 라스푸틴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의 주요 도시에서는 왕비와 라스푸틴을 함께 비난하는 소리가 점점 높이 흘러나왔다. 백성들은 심지어 독일 계통인 알렉산드라 왕비가 러시아의 적국인 독일과 내통하고 있으므로 반역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 페트로그라드: 1차 대전 중에 독일식 명칭인 생페터스부르크를 버리고 슬라브식 표현인 페트로그라드로 변경하였었다. 전쟁 중에는 독일에 대한 혐오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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