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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귀족문화

구름위 2013. 1. 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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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귀족문화

:러시아 귀족제도의 강화와 발전

-1762년 한해 동안 재위했던 뾰뜨르III세는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나약한 황제였다. 황제의 나약함은 귀족 권력의 강화를 결과로 낳았고, 그 결과 귀족을 모든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귀족 특권장"을 발표한다.

-1762년 이전에 15세 이상의 귀족은 문관 또는 무관으로서 국가에 봉사해야 했다. 뾰뜨르 대제의 개혁이후 15세 이상의 귀족은 반드시 이 의무를 수행해야 했으며, 그 기간은 약 25년이었다. 1762년의 귀족 특권장은 이러한 의무를 폐지하였다. 귀족 특권장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지극한 황제의 자비심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러시아의 모든 귀족에게 자유와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다."

-뾰뜨르는 재위 1년후 독일계 아내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녀가 바로 러시아의 계몽군주였던 예까쩨리나 II세이다. 그녀는 권력쟁취 과정에서 귀족과 왕궁 수비대의 도움을 받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귀족 특권장을 재확인하고, 1785년 새로운 귀족 특권장을 발표한다. 이로서 러시아에서 귀족의 황금시대가 열린다. 귀족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살해하고 권력을 쟁취한 예까쩨리나의 태생적 한계는 귀족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귀족 특권장은 귀족을 형법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예: 여지주가 농노를 학대한 후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녀는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예까쩨리나는 사형대신 귀족호칭을 박탈하였다. 경찰은 단두대를 설치하고, 그곳에 매단 후, 법원판결을 낭독하고, 뺨에 '학대자, 살인자'라고 쓰인 종이를 부착하고, 족쇄를 채운 후 수도원의 지하감옥에 수감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사면)

-농노와 토지소유에 대한 법을 귀족에게 유리하게 제정하였다.

당시 국민의 약 52%가 국가 농민, 개인소유 농노가 약 42%였다. 예까쩨리나II세 때 국가 농민의 대부분도 사유화된다. 그 결과 많은 농민반란이 발생한다. 예까쩨리나 치세 중에 약 60여 회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뿌가쵸프의 반란으로 러시아 봉건주의의 뿌리를 흔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19세기에 들어와 농노제도는 러시아 사회적 모순의 근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효율성을 상실한다. 1861년 농노는 해방되고, 그와 더불어 러시아에서 귀족의 세력도 약화된다.

-귀족문화의 유형과 특징

-귀족의 공간

귀족의 생활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집: 가정과 영지 경영

공직: 문관 혹은 군인.

사교계: 일 중심의 두 가지 유형의 생활과 대립하는 것이 사교계이다. 여기에서 귀족의 사회생활이 실현된다. 여기서 그는 개인도 아니었고, 국가기관에 종속된 공직자도 아니었다. 그는 무도회에서 비로소 귀족 계층에 속하는 귀족으로 행동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귀족 사교계에서 버림을 받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삶에 치명적이었다.

-사교계는 가정생활의 폐쇄성과 공직의 위계질서가 약화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제와 휴식을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서 근무지에서와는 다른 행동양식과 가치가 창조되었다. 문학, 음악 등 예술이 존중되었고,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와 새로운 사상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여론이 형성되었다.

-가정의 가부장적 질서와 공직사회의 위계질서가 약화되는 대신 춤 잘 추고, 건강하고, 지적인 젊은이들, 젊은 장교들이 나이, 관등, 계급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곳은 가정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공직사회의 남성 중심성이 사라지는 곳이었다. 귀족 여성들과 남성들의 '공식적으로' 교류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사랑과 결혼, 불륜, 청탁, 갈등 등 귀족사회의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사교계는 귀족 청년과 처녀들이 사회에 데뷔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귀족사회의 행동규범이 형성되는 곳이며, 동시에 귀족의 사회화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귀족문화의 유형:

-퍼레이드:

이것은 군대의 사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투력 상승을 위한 훈련이라기 보다는, 의식(ceremony)이었다. 퍼레이드는 적을 위협하고,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기보다는, 비실용적, 형식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퍼레이드 문화의 생산 주체는 군인이었으나, 수용주체는 황제를 비롯한 고위급 군인과 관리, 그리고 귀족 여인들이었다. 퍼레이드 군대문화의 꽃으로서 질서, 규칙, 행동규범, 규율, 예절 그리고 동시성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보이기 위한 문화"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부자연스런 자세와 동작도 허용되었고 때로는 강요되었다. 퍼레이드는 여성과 남성이 공동으로 만들던 귀족문화의 가장 초보적인 형식이 된다. 퍼레이드의 현장에는 남자와 여성이 동시에 참여하지만, 둘 사이의 접촉은 없다. 접촉은 파격이 된다. (예: 선전: 사열하는 데 젊은 여자가 달려가 키스를 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했고, 퍼레이드에 상존하는 거리감은 다른 방식으로 극복되어야 했다.

-살롱문화:

질서와 규칙, 예절과 격식이 있는 모임으로, 남성과 여성이 공식적으로 만나 교류할 수 있다. 질서와 규칙이 강조되지만, 퍼레이드와 비교하면 매우 엄격성은 매우 약하다. 또한 퍼레이드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여성은 관람객이 되는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엄격한 거리감은 사라지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규칙은 엄수되어야 하고, 그것이 깨질 때 당사자는 소외를 당하게 된다. 어느 정도의 남녀관계와 일탈을 상류사회는 이해하고 인내하였으나, 정도를 넘은 관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심판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왕따와 같은 것으로, 이곳에서 소외된 사람은 고통과 고독을 겪어야 했다.(안나 까레리나)

살롱문화의 규칙과 예절은 의상, 어법, 교제의 방법과 정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행하여졌다. 이들은 프랑스어를 즐겨 사용했으며, 서유럽의 문화와 사상에 경도되었다. 의상을 비롯한 사치품목도 서구의 것이 선호되었다. (이것에 대한 비판이 '아는 것이 병'이란 작품에 나온다.)

서유럽의 문화와 사상은 그들의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러시아 귀족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즉 앞에서 언급했던 잉여인간의 유형들은 바로 유럽의 문화와 사상의 세례를 받고, 계몽된 사람들이었다. 반면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생활방식은 상류사회에도 일반민중에도 속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무도회: 살롱문화의 한 형식으로 춤을 추기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보이기 위한 문화의 하나로서 무도회는 화려한 복장과 세련된 행동과 예절을 요구하였으며, 공식적으로 남녀가 접촉할 수 있는 무대였다. 이를 위해 매우 사치스런 오케스트라가 초대되기도 했고, 시골 영지에서는 농노 출신의 악사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귀족들의 춤판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였다.

-가면무도회: 살롱문화, 무도회는 나름대로 규칙과 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규칙과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욕망'의 억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규칙'과 '질서'를 벗어난, 더욱 더 자유로운 형식의 놀이문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면 무도회다.

러시아 사전을 보면 가면 무도회는 "마스크와 특정 성격을 나타내는 의상을 착용하는 무도회"라고 정의한다. 사전적 정의는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현실과의 일시적 단절과,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란 가면무도회의 성격이 드러난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로트만은 가면무도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반 무도회에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었다. 규칙적용의 엄격성에는 장소, 개최자, 참가자, 규모에 따라 다양했으나, 규칙은 언제나 무도회 내에서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용: 로뜨만은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규칙은 무도회의 준비와 진행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언어와 행위, 대화의 주제, 즉 상류사회의 예절과 도덕과도 관련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직화된 비조직화: 의도적인 무질서>, 즉 계획되고 예상된 혼돈(Chaos)를 무도회에 요구하게 되었고,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 바로 가면무도회였다. 가면 무도회와 같은 변장은 교회 전통에 근본적으로 대립하였다. 러시아 정교의 전통적 의식에서 가면은 악마성의 표현이었다. 이런 이유로 가면 무도회의 유럽적 전통들이 18세기의 귀족문화로 수입될 때 어려움이 있었다.

귀족의 축제형식으로서 가면무도회는 폐쇄적이고 거의 비밀스런 즐거움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가면이 제공하는 '익명성'에 근거하였다. 19세기 전반 러시아 최초로 공개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입장권을 산 사람은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익명성의 보장은 무도회의 문란함의 원인이 되었고, 나아가 엥엘가르트의 집에서 열린 이 모임은 러시아 역사의 기념비적인 가면무도회가 되었다.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가 '레르몬또프'는 이 무도회를 소재로 <가면무도회>라는 희곡을 썼다.

"가면 아래서는 모든 관등이 똑 같고,

가면에는 영혼도 칭호도 없다. - 육체만 있을 뿐.

사람들은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감정의 가면을 용감히 벗어버린다."

규칙과 격이 제거된 가면무도회에는 에로틱은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키 큰 터키 여인이 얼마나 고상하게

뽐내며 걷고 있소...? 얼마나 풍만하오?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자유로이 숨쉬고 있소이까!"

조직된 비조직화, 폐쇄된 비밀스런 즐거움과 쾌락, 가장무도회는 폐쇄성, 비밀, 익명성, 그리고 에로틱의 감정의 자유로운 노출과 여과없는 발산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러시아의 귀족문화: 결투

 

 

결투

상류사회는 젊은 남자들에게 '명예 규범'을 요구하고, 그것은 결투에서 가장 극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결투는 서유럽에서 수입된 갈등 해소 문화로서, 그것은 러시아 민족적인 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랜 결투는 17세기 초에 외국인 군인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결투의 문화는 오랫동안 러시아에 뿌리내리지 못하다가, 귀족문화의 전성기인 19세기 초기에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니콜라이 I세 통치(1825-1855) 이후 결투에 대한 통제와 처벌이 강화되었으나 결투는 빈도는 약화되지 않았다. 결투는 비합법적이었으나, 귀족들 사이에서 특히 군대에서는 묵인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귀족들은 결투를 자신들의 특권으로서 재생시키려 시도하였다. 심지어 결투를 특권이 아니라 의무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생겼고, 1894년 알렉산드르 III세에가 허가한 문서는 '장교법정: '에 장교를 결투하게 할 권리를 주었고, 결투를 거부한 장교는 퇴직해야 했다.

:문화적 코드로서의 결투-명예:

사회적 행위로서 결투는 실추된 "명예의 회복"이라는 코드를 갖는다. 로트만에 따르면 러시아의 귀족은 두 가지 서로 대립하는 행위원리를 갖고 있었다.

"충성스런 국가의 신민으로서, 귀족은 명령에 복종했다. 위반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대한 공포가 복종의 심리적 동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귀족으로서,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 그리고 문화적 엘리트를 이루는 계층의 인간으로서, 그는 명예의 법칙에 복종하였다. 여기서는 수치심이 심리적 동기가 된다. 귀족문화가 창조한 이상은 공포의 완전한 추방과 명예의 증거를 행동의 기본원칙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뾰뜨르 I세의 국가가 전쟁에서 귀족의 행동을 국가의 이익을 위한 봉사로 보고, 그의 용맹을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았다면, 명예라는 입장에서 용맹은 자기목적으로 변한다."

-명예는 때로 국가의 법보다 중요했으며, 때로 목숨을 걸고라도 개인의 명예는 수호되어야 했다. 즉, "명예의 가치가 실재의 현실적인 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던 상징적 기호성을 사회전체가 수용하고 있어서, 명예 훼손은 실체로서의 육체를 손상시키는 결투로 상쇄되기도 했다."(천녕의 울림)

귀족문화에서 결투를 통해 표현된 명예의 코드는 귀족의 존재론적 가치를 규정하는 핵심개념이 되었다.

결투는 명예의 훼손과 명예 회복이라는 코드를 담고 있다. 명예를 훼손당한 사람은 결투를 신청하여 당당히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 했으며, 죽음이 두려워 결투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 귀족사회의 비웃음을 샀으며, 그것은 개인과 가문의 불명예가 되었다. 결투는 군대문화의 산물로서 이것은 뒷골목의 난투극과는 다르다. 엄격한 형식, 질서 그리고 예절을 갖춘 남자들의 싸움으로, 결투의 신청, 결투, 그리고 결투 후의 처리까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었다. 모욕당한 사람은 대리인을 통해 결투를 신청하고, 상대방이 응하면,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입회인을 정한다. 입회인은 결투의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고, 가능하면 결투하지 말고 화해할 것을 요청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결투가 진행된다. 당연히 의사가 참여한다. 역시 보이는 문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형식미와 비장미가 명예를 존중하던 귀족문화 속에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