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이야기 3. 고문, 유배, 암살, 처형..., 공포의 도가니
러시아 혁명은 공포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대 파노라마입니다.
레닌은 비교적 지성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1870.4.22)
아버지는 교사, 장학사를 지낸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유태인 의사의 딸로- 그러니까 유태인의 피를 섞여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 알렉산들이 제정시대 혁명에 가담하였다는 반역죄로 처형되었고(1887) 그때 17살의 레닌은 어린 나이에 체제에 큰 적개심을 품게 되지요. 레닌은 집안의 그런 이력 때문에 연고제에 걸려 법과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청강생으로 공부하다가 겨우 응시자격을 따게 되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지요.
노무현씨가 검정시험을 치루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런 경로와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형의 죽음- 그게 레닌이 혁명의 길로 걷게 되는 첫 동기가 됩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우는 첫 번째 데모에서 앞장 섰던 러시아 정교회 가퐁신부는 오로지 휴머니즘에 불탄 정의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황제를 극진히 존경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다만 밑바닥 민초 노동자들의 비참한 환경을 황제에게 호소하자고 그런 취지로 직접 청원서를 궁중에 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궁중근위대의 발포로 피만 많이 흘린 채 무산되고 그는 폭동 주모자로 수배되어 해외로 망명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레닌은 스위스에서 신문을 보고 그 사건을 알게 되어 “ 아~ 러시아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구나-”하고 흥분하였지만 혁명가로서 어떤 실천적 행동을 보여야 할까도 아무런 생각을 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러시아 제정 정부의 미움을 사 해외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만 했던 가퐁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스위스로 레닌을 찾아 가게 되어 그를 만나게 됩니다.
혁명의 동지애로서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줄 걸로 믿었던 가퐁신부는 레닌을 보자마자 의외로 경멸어린 질책을 당하게 됩니다.
“이 풋내기 신부야-, 경솔하게 놀지 마라. 더 공부하라-”저주스런 눈빛으로 신부를 꾸짖던 레닌은 “네가 설곳은 바로 여기다-”하고 책상 밑을 가르키며 면전박대를 합니다.
레닌의 그 같은 언동은 그 속내가 뚜렸 합니다. “혁명의 몫은 나같은 혁명가가 하는 일이지 네가 뭔데 앞장서느냐?” 혁명의 주도를 남에게 내주지 않으려는 질투심과 “나 말고 다른 혁명 영웅은 없다”하는 그런 경계심이지요.
뜻하지 않게 모욕을 당한 가퐁신주는 절망감을 느끼며 페테르그라드 근처 농가에 은신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한 친구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는 “피의 일요일” 데모에서 가퐁신부를 총탄세례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절친한 친구인데 그때는 한 사회주의 운동원이었습니다.
가퐁신부는 제정 정부로 부터도 데모 주동자로 수배된 반체제 인물로 못 박힌 사람이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궁중의 앞잡이라고 의심을 받았습니다. 즉 양쪽으로부터 기피 인물이 되었지요.
농가에 은신하고 있던 가퐁신부는 그 친구가 외출하고 집을 비운 사이 정체불명의 패거리에 의해 농가 섯가래에 목 메어져 저승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1906.3.26)
멀리 있던 레닌의 원격조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 지방 빨갱이들이 한 소행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회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은 분명합니다.
( “피의 일요일”데모에 앞장선 가퐁신부)
괴상한 성직자 그리고리 라스푸틴(1872~1916)은 환자를 고치고 고 미래를 예언하는 영적 지도자로 불리였습니다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린 황후 알렉산드라는 기기묘묘한 기도 요법으로 혈우병을 앓고 있는 외아들 황태자를 치료한답시고
궁중에 드나 들던 이 히피같은 성직자를 신임하고 한때는 병세를 호전시키는듯 하여 황실의 총애를 받기도 하고 귀족처럼 대우도 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궁정 안에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주들조차 그를 미워하고 궁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게 됩니다.
국정은 그의 멋대로 주물럭거려 지고 심지어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도 90%의 고 세율을 먹이는 등 폭정이 연출되는가 하면 반대세력에겐 공갈과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까지 조성합니다.
황제가 1차 대전의 전세를 만회 할려고 전선으로 출정하고 없는 사이 국정을 이 괴상한 성직자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의 폭정은 절정에 이릅니다. 고려 말 공민왕 때의 괴승 신돈과 같은 존재였지요.
친황제파의 귀족들이었지만 그에게 불만을 품은 일부 궁중 세력이 그를 살해 할 목적으로 어느 날은 파티에 초대를 하였습니다.
준비한 독약을 그가 마시는 포도주와 케익에 넣어 먹게 한것이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독극물을 입에 넣은 그가 죽지 아니 하고 2시간 이상을 기타 반주에 ㅤ맞춰 춤을 추는 것을 본 이날의 음모자들은 덜컥 겁도 났습니다. 진짜 신들린 사람인가?.
한 사람이 총을 꺼내 그를 쓰러트리고 쇠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리고 나서 양탄자에 둘둘 말아 얼음 얼은 강물에 쳐 넣었습니다. (1916.12.29) 그러나 나중에 그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그의 사인은 독살도, 총살도 아닌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괴물은 괴물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예언을 한바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고 나를 죽게 한자들이 만일 황족이나 귀족들이 다면 황실도 머지않아 몰락 할것이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당한 이후 황제와 황후는 전제정치를 더욱 고수하겠다는 결심을 더 높였고 때문에 국정 파탄에 견디지 못한 대중들이 몇 주일 후 “2월 혁명”을 유발하게 되어 제국의 모든 체제는 혁명에 휩싸이게 되지요.
(살해당한 괴물스런 성직자 라스푸틴)
1918년 어느 여름 날 레닌은 한 공장을 시찰하고 나오다가 파니 카플린이라는 한 여성의 총에 맞아 턱과 팔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녀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었는데 레닌이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독주에 분개하여 암살을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레닌은 그 총상으로 인해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몇 년 고생하다가 5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1924.1.21)
이 암살미수 사건 이후 레닌의 친위 조직인 체카는 무려 800여명에 달하는 사회주의 안의 반대 세력을 체포하여 처형합니다.
트로츠키(Trotsky Leon 1879~1940)는 유태인인 양친에게서 태여난 완연한 유태인입니다.
레닌처럼 젊은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가담한 골수 혁명분자이고 레닌이 혁명에 성공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오른팔입니다.
그래서 그는 혁명정권의 2인자로 불리우리 만치 부상을 하지요.
그러나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게 됩니다. 스탈린은 레닌을 우상화하고 자기가 레닌의 후계자라고 자임하며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상에 어긋난다는 등 오만가지 중상모략을 해서 그를 해외로 내 ㅤㅉㅗㅈ고 맙니다.
추방된 트로츠키는 터키, 프랑스, 놀웨이등으로 전전하다가 멀리 멕시코에까지 가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지요.
그는 망명지에서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다가 1940년 8월, 어느 자객의 도끼에 맞아 처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그를 암살하라고 배후 조정한 것은 스탈린임은 두말나위도 없습니다.
(도끼로 맞아 살해된 트로츠키)
이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로마로프 황족들의 최후를 살펴 보겠습니다.
황제와 황후 알렉산드라 그리고 4명의 공주와 막내 황태자등 황실 일가는 2월혁명 이후 폐위되고 케렌스키 임시정부 군인들에 의해 우랄 산맥 어느 농가에 이송되어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임시정부가 전복되고 10월 혁명으로 공산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 황족의 감시와 구금 감호는 붉은군대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이 황족 일가가 갇친 근방에 까지 백군(황제 옹호파)이 진군, 출몰하게 되자 황제 일가를 구출해 갈까 봐 공산 적군은 이들을 다른 데로 데리고 다니며 피신시키다가 1917년 7월 17일 밤 어느 농가에 이르러 그 황제 일가를 모두 지하실에 모아 놓고 총살을 하게 됩니다.
처음엔 시신을 근처 어느 폐광 동굴 안에 내 동댕이 쳤다가
그 시체마저 백군들이 탈취해 갈까봐 다음 날 모두 꺼집어 내어 불태워서 딴 데로 묻어 버렸습니다.
그 총살과 시신 처리 과정에서 한 공주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걸 그 누가 구조해서 행방을 감추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녀의 미스터리
“오늘밤 란트베에 운하에서는 한 신원미상의 여인이 자살을 기도하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구조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1920년2월17일 베르린 경찰청은 짤막한 사고 소식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조사하던 당국은 그녀가 아무런 신분증명서도 소지하지 않고 있어서 신원을 파악 할 수 없었으며 심문을 받는데도 횡설수설하고 정신이 정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여 정신요양소로 보냈습니다.
그녀는 여성 정신요양소에서 감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 후 1년이 지난 그 요양소로부터 이상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그의 수감 동료에게 이상한 말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실은 러시아 황족의 황녀라고 말입니다.
공산혁명 이후 처형된 니콜라이 2세의 넷째 공주 아나스타샤라고 한방에 같이 기거하고 있는 동숙인에게 슬며시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어느새 요양소 담 넘어 까지 퍼져 나가고 당국은 바짝 긴장하여 조사에 나서게 되었지요.
황제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전회에서 말씀드렸듯이 4명의 공주와 단 하나의 막내 외아들(황태자)를 두었으나 1918년 여름날 밤, 일가족 모두 총살을 당하여 어느 농촌 나무 수풀사이에 매장되었었지요.
그때부터 러시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사방에 퍼졌습니다. 황족 일가 중 어느 한 공주는 살아 도망쳤다고- .
독일 공안 당국도 그런 소문을 들은바 있었기에 자살 하려던 여인이 바로 그 공주였구나 하고 그 진상조사에 바짝 긴장을 하게 됩니다.
한 여인의 생사 문제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러시아는 혁명으로 황실이 몰락하고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러시아 국내에서는 황제를 지지하고 왕정을 복고하고 싶은 일부 보수,기득 세력과 백성들이 있었고 사회주의 출현을 달갑게 보지 않은 서구 제국들이 있어서 황가의 공주 하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꺼져가는 불씨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한 가닥 희망으로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조사당국은 그녀를 특별 보호를 하며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캐물었습니다.
그녀의 진술은 앞뒤가 안 맞고 변화무쌍하였지만 그 줄거리는 대강 이렇습니다.
황제 일가족 총살이 있던 날 밤, 사실은 그녀도 총을 맞기는 맞았지만 죽은 척하고 있다가 일가의 시신이 옮겨지는 도중 그를 엎고 간 감시병과 함께 몰래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처형을 집행하던 한 대원이었는데 마음을 고쳐먹고 이 공주를 구조해서 같이 루마니아로 탈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에서 이 공주와 결혼을 해서 같이 살던 중 그 신랑이 길거리에서 어느 사람과 정치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둘 사이에는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먹고 살 길이 없어 아이는 고아원에 맡기고 일자리를 찾아 베르린에 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스토리는 누가 들어도 그럴 사 한 대본이지요.
그녀는 요양소에 있으면서 이름을 안나 앤더슨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나 앤더슨이란 독일에서 제일 흔한 여자 이름이지요. 우리나라 김영자, 이순자와 같이 여자들에게 가장 많이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가자 세상은 온통 그 이야기로 들끓었습니다. 소련의 공산정권은 과거 체제와는 단절시키기 위하여 그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극구 부인을 하고 서방 세계와 러시아 구황실 동경자들은 진짜 공주가 살아 있다고 환호를 하게 되지요.
독일 조사 당국의 심문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하는 글쓴이가 조서를 짜깁기로 각색을 한 것입니다)
문: “루마니아에 까지 탈출을 하는데 성공을 하였다면 루마니아에는 어머니 황후의 사촌 되시는 분이 왕녀로 계신데 왜 그곳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 안했나요?”
답: “네, 그곳 궁정을 물론 찾아 갔지요. 그러나 궁중 문지기에게 아무 리 내가 러시아 황제의 딸인데 아주머니인 왕녀를 만나게 해 달라 고 애원해도 아무도 나를 믿지 않고 떼밀기만 하였어요.”
문: “그러면 독일에도 아일린 황녀가 계시고 그 분도 역시 공주의 친척 벌 되는 분인데 그 황녀 아일린을 찾아 가지 안했나요?”
답: “예 찾아 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려고 생각해 보았으나 찾아 간들 누가 나를 믿고 도와주겠어요? 루마니아에서 처럼 궁중 지키 는 사람들한테 ㅤㅉㅗㅈ겨 날건 뻔 할텐데요..그래서 슬퍼서 운하에 빠져 죽을 려고 했던 거죠.”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진술을 하니 어떻게 보면 그게 그런 것도 같고 , 꾸민 거짓말도 같고... 아리 숭합니다.
진실은 아직도 안개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가짜라고 극구 우겨대는 소련 공산 정권은 과거 황실에서 그 일가족을 보살피던 한 시녀를 보내 볼 테니까 안나 앤더슨과 대질을 시키자고 까지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 시녀가 독일에 까지 오게 되지요.
그 시녀가 요양소를 방문하고 그녀와 마주쳐 확인을 하려고 하니 안나는 담요를 뒤 집어 쓰고 대면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녀를 슬쩍 보고 떠난 시녀는“샛빨간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이라고
진짜 공주가 아님을 확인 하지요. 그러나 그 시녀도 돌아가서는
“어쩌면 긴지도 몰라-”하고 애매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제는 독일에 계시는 아일렌 황녀가 안나 앤더슨을 만나게 됩니다. 황녀 아일렌은 자기가 보았던 공주와 닮지 않았다고 처음엔 부정하다가 나중에는 아나스타샤 공주와 매우 흡사하다고 인정합니다.
황녀의 아들 시지스문토도 그 공주를 전에 가까이 본 일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문도 던져 보고 그녀가 공주가 맞다 고 믿게 됩니다.
또 안나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황실의 이야기도 토로해 냈습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아저씨 벌 되는 귀족 어네스트가 1916년 러시아를 방문하였다는 것도 기억해 냅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이 방문을 극구 부인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양아들이 어네스트가 1916년 러시아를 비밀리에 방문하였다고 증언을 합니다.
안나는 러시아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성장하고 자기 모국어인데도 그럴 수가 있나 하고 주위의 의구심을 사게 되지요. 그러나 그녀가 진짜라고 우겨대는 옹립파에서는 자기 가족을 무참하게 총살하고 러시아 말을 지껄이는 그런 무서운 사람들 때문에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을 혐오하여 러시아말을 상실하였다고 꾸며 대지요.
그러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잘 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반증이 불거 저 나왔습니다.
그녀는 루마니아 ~ 독일로 전전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폴란드 어느 공장에서 공장노동자로 있었다는 목격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공장안에서 그녀를 불렀던 폴란드 이름도 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3개국 언어를 쓸 수 있는 수준이라면 공장 아가씨들과 교육 레벨이 맞지 않을 경황으로 보아 그녀는 공녀는 아닐 것 이라는 반론을 하지요.
그래서 독일 조사 당국은 그녀와 함께 공장에서 일 하였다는 아가씨 2명을 베르린까지 오라고 했더니 가겠다고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공장에도 그 이상 출근하지도 않았습니다.
러시아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그녀가 러시아에 가서는 그 누가 무슨 질문을 하니까 러시아말로 유창하게 연설하듯 답변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인류학자 Otto Reche박사는 그녀와 공주의 사진을 판독하고 나서 두 여자가 동일인이거나 일란성 쌍둥이라고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해외 여러 나라에서 그녀가 진짜 공주다 하고 그를 옹호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생기게 되었고 이해관계가 있는 집단들이 진짜다, 가짜다 하고 둘로 갈라져 대립각을 이루었습니다.
2년간의 요양 보호소 생활을 마친 그녀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살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가끔 거만하고 지나친 요구를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가 하면 어느 때는 반라로 거리로 뛰쳐나가는 등 이상한 행동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공주로 믿고 아끼는 사람들은 가족이 처형 당 하는 과정에 생긴 정신적 쇼크라고 그 이상 징후를 이해하고 동정 하지요.
진찌 공주냐? 아니냐?하는 공방은 법정에 까지 이어 집니다.
안나는 1938년 자신의 신분을 인정해 달라는 재판을 독일 재판정에 요청하였습니다. 그 재판은 1970년까지 끌었습니다.
그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 사건은 더욱 더 세계적인 화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진짜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지요.
그래서 미국의 어느 부호가 청혼을 하게 되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부호는 그게 사랑인지, 아니면 막대한 러시아 황실의 재산을 상속 받게 될 그녀에 대한 투자인지는 본인만이 압니다.
아무튼 둘이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재판 결과는 그녀가 공주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진짜 공주임을 증명하지 못하였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편 소련 붕괴 이후 다시 러시아가 들어서며 옛날 황제 가족이 처형되어 묻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파헤쳐 조사 해 보니 여자의 뼈로 판명되는 유골이 4구 뿐 하나가 실종되고 없어 그게 한 공주의 생존설에 무개를 더해 주게 되지요.
엄마 황후와 4 공주라면 여자의 유골은 다섯이어야 맞는데 4구 뿐이니 한 여성의 유골과 영혼은 어디로 갔나요?
20세기 말에는 DNA검사가 각광을 받고 등장합니다.
그래서 과학적 근거로 진짜냐 가짜냐를 판가름 해 보려고 DNA 검사를 제창하였으나 그때는 그녀가 84세를 일기로 1984년 미국 캐롤라이나에서 죽고 없어서 본인의 DNA 샘플을 직접 채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롭의 왕족은 죽어서 절대 화장하는 법이 없는데 그녀는 화장을 하였기 때문에 죽어서도 유골에서 DNA 샘플 채취를 못한 거지요.
그러나 그녀가 살아 생전에 어느 병원에 남긴 장기의 부분을 겨우 찾아서 DNA를 채취하여 영국 ㅤㅂㅣㅋ토리아 가문 (황후 알렉산드라의 친정)쪽 DNA 와 매칭을 해보니 그게 맞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으면서 까지 자기가 끝내 공주 아나스타샤라고 시종일관 주장했고 그녀의 무덤 돌비석에는 <아나스타샤 로머노프 여기에 잠들다>하고 쓰여 있습니다.
(사진설명): 아나스타샤 공주 ,황족 가족 (오른쪽에서 세번째 문제의 공주), 안나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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