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이야기 1. 혁명의 줄거리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군주 체제로 서구에 비해 낙후되긴 하였지만 19세기 말에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자유주의 운동이 고개 들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에 물들은 혁명세력이 사회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읍니다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전제정치의 체제가 무너질까봐 그 개혁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극동지방 남진 정책과 신흥 일본제국과의 충돌(러일전쟁 1904~1905)에서 러시아가 참패를 하자 국내외적으로 큰 망신살이를 당하고 국민들도 그동안 쌓인 불만이 터질듯 하였습니다.
1905년 1월22일 가봉신부가 앞장선 시위 군중이 궁전 앞으로 몰려가 노동자의 청원서를 손에 손에 들고 평화시위를 하는 것을 궁중근위대가 발포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이를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국에 대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온갖 파업과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까지 그 물결이 출렁거리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두마”라는 의회를 설치하는등 약간의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1907년께에는 겨우 소요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 들고 전 세계적으로 경기호황의 덕분에 러시아도 덩달아 연평균 7%의 산업성장률을 보이며 공장도 들어서고 일자리도 생겨 겉으로는 안정 정국으로 들어서는 듯 하였습니다.
그즈음 입헌 구테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시작됩니다. 이에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숨어 지내어야 했고 그때 레닌은 스위스로 망명의 길을 떠납니다.
황제도 걸핏하면 허수아비 의회 “두마”를 해산시키고 군주 체제로 다시 회귀하는 듯 사회가 그런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례바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조는 그 장막이 차차 내려지고 민중들의 혁명의식은 점차 고조되고 있던 것이 필연적인 흐름이었습니다.
그러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그 대전이란 독일과 그 추축국들에 의해 러시아가 제일 국익을 빼앗기게 되는 불리한 처지였기 때문에 니콜라이 2세는 국민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 참전에 나섰지요.
처음에는 민중들이 애국심에 불타서 황제를 지지하고 1천500만 명이나 자진해서 출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휘관들의 무능과 전술, 전략면에서 독일을 당해 내지 못하고 전투마다 연전연패를 거듭, 러시아는 서구 제국에 대적할 상대가 못됨을 여실이 드러내고 맙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전쟁이 장기화 되고 보니 국내의 불만이 날로 높아 가고 있었습니다.
1915년 니콜라이 황제는 직접 출정에 나서 일선에서 전투 지휘를 하게 되었고 뒷일은 황후를 도와 라스푸틴이라는 괴물 같은 성직자에게 국정을 맡겼습니다. 이 성직자의 수렴정치가 국정을 더욱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습니다.
1905년 처음 민중이 봉기한 “피의 일요일”부터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12년-, 꺼져가는 군주체제가 겨우 러시아를 이끌고 왔지만 전투에서 만날 지고 국민들의 생활이 끼니조차 챙기기가 어려워지자 1917년 2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많은 군중들이 “빵”을 요구하며 또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2월 혁명“입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들이 빵을 요구한 시위로 시작된 소요가 노동자들의 합세로 인하여 대규모로 번져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제정 러시아의 군주체제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제정 러시아 군대는 시민들에게 발포를 하였는데 이후 발포를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혁명 참여 쪽으로 돌아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라는 연합체로 단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이 일어나자 의회 의원들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드디어 제정체제가 무너지고 전제정치는 막을 내립니다.
이 임시정부는 황제에 반대했던 대신들, 장교, 병사등으로 이루워져 뒤죽박죽, 오합지졸의 창단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르조아 혁명도 같고 또 다른 면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같기도 한 어정쩡한 짜깁기 모임이 되었지요. 극좌 사회주의 과격파들은 이를 부르조아 혁명이라고 판단, 정권에 가담하지 않고 울타리 밖에서 비방만 하고 다녔습니다.
이 연합정권의 임시정부에는 온건적인 사회주의자 케렌스키가 그 수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임시정부 가담자들은 누구 입에서나 한결같이 “노동자, 농민, 무산계급을 위하여....”를 외치기 때문에 그들의 색깔의 본색을 가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누가 서구식 자본주의를 운운하거나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을 들먹였다가는 아마 맞아 죽을 상판이었고 노동자, 농민 어쩌고 저쩌고 해야 그게 러시아를 천국으로 이끌 사람이라고 대중은 그렇게 믿었지요. 국민들의 90%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식쟁이들 이었으니까요.
카렌스키 임시정부는 그래도 독일과의 전쟁은 결판을 내고 협상이란 없다 하고 결전을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공산혁명의 비수를 갈고 있던 레닌과 그 추종자들은 독일과는 무모한 전쟁은 하지 말고 강화조약을 맺자고 주장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때 독일은 레닌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 “옳지!, 이 자를 러시아로 들여보내 러시아의 국론을 분렬시키자-”하는 발상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공산주의 탄생을 껄그럽게 여겼지만 세 불리한 전선 상황으로 보아 러시아쪽 동부전선에서라도 포성을 멈추고 독일의 뜻한바 데로 강화조약을 맺으면 연합국과 싸우던 전황이 유리할것 같아 레닌괴 그 일당 사회주의자들을 밀봉열차에 태워 스위스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몰래 모셔다 주었습니다.
1917년 4월3일, 러시아에 귀국한 레닌은 처음으로 대중앞에 등장합니다.
페테르그라드 역전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 세계 사회주의여 영원하라!, 사회주의 만세!.”를 외치며 선동하니 몽매한 국민들은 이제 러시아를 배불리 잘 먹고 살게 할 구세주를 만난 듯 열광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의 싹이 솟아 오른 거지요.
그때 레닌은 “4월 테제”라는 공산혁명과 같은 지침을 발표합니다.
“자본주의 타도 없이는 공산혁명은 없다. 모든 권력은 프로레타리아(무산계급)으로-, 프로레타리아 독재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 그가 내세운 구호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맑스주의를 선택한 혁명당인 사회민주당(1898~1912)은 둘로 갈라져 레닌이 이끄는 사회혁명 과격파들의 조직을 볼세비키라고 하고 온건한 사회개혁파를 멘체스키라고 부릅니다.
볼세비키가 공산혁명을 주도하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온건 사회개혁 성향의 임정수반 케렌스키는 독일과의 전쟁은 싸워서 끝장을 내자는 쪽이었는데 레닌처럼 휴전하고 강화조약을 맺자는 주장을 가만 놓아둘수 없어서 독일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씌워 레닌을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뱀머리처럼 생진 레닌은 피신하고 도망쳐 빠져 나오는 데는 숙달되었기 때문에 얼른 가축사육장과 창고더미로 몸을 숨겨 핀란드로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핀란드에서 레닌은 혁명과업을 완수하는데는 무력동원이 절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자기네 조직안에 무장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정당내 정파간의 갈등에서는 대화나 협상이나 타협이 필요없이 주먹과 피로 밀고 나가자 하는 심산이지요.
이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는 볼세비키 세력은 날로 그 판세가 늘어 나고 있었고 그해 10월 레닌은 비밀리에 핀란드로부터 러시아에 잠입,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에게 지금이야말로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모든 국가 기관을 전복하고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라고 역설합니다.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의장인 트로츠키를 설득, 그의 협조를 얻어 그를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히고 적위대를 구성하여 무장봉기로 혁명을 달성하고저 마음 먹습니다.
1917년 11월7일(러시아 력 10월26일)트로츠키가 지휘하는 적위대 1000여명이 페트로그라드로 들어가 러시아 국립은행, 페트로그라드 역, 발전소, 전화국을 점령합니다. 이때 레닌은 가발과 모자를 눌러 쓰고 치통을 앓은 사람처럼 턱과 머리에 붕대를 싸매고 변장을 한 채 제2차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 “나-, 레닌 여기 있다-”하고 가발과 변장을 벗어 제치고 무장한 패거리가 둘러 쌓인 가운데 모든 권력은 프로레타리아 무장세력에 있음을 과시하며 공산주의 선언을 하게 되지요.
그 다음날 새벽 무장폭도들은 카렌스키와 임시정부 각료, 의회 간부들이 숨어 있는 겨울궁전으로 몰려가 장관과 의원들을 체포함으로서 이 혁명은 성공을 거둡니다. 그때 케렌스키는 여자로 변장을 하고 미국대사관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이것을 <볼세비키 혁명>이라고도 하고 <10월 혁명>이라고도 합니다.
러시아 혁명 이야기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공산개혁
혁명의 주동자 레닌
이 혁명의 역사적 찰나에 레닌의 변장, 케렌스키의 변장-, 그것은 단순히 모습의 외관상 분장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태초에 태어나면서 그 속임수라는게 시발의 원초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그 속임수는 혁명 초기, 개혁기, 공산주의 확장 과정에서 금과옥조처럼 쓰여집니다. 모택동이 중국 중원을 장악하며 국부군 장개석에게 써먹은 속임수, 그로인해 중국대륙을 장악한 모택동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한수 가르쳐 주고 죽습니다 “자본주의와 싸워 이기고 공산주의를 키울려면은 뭐네 뭐네해도 속임수가 으뜸이라네-”그래서 김일성은 6.25남침 3일전까지 북쪽의 조만식 선생과 남측의 거물 공산주의자 김삼룡, 이주하와 맞교환하자는 위장 평화공세를 하는가 하면 김정일은 김대중씨를 불러 돈도 울커 먹고 뒤로 핵개발을 하는 그런 속임수를 써먹게 되지요.
그 “속임수”라는게 공산주의 탄생과 더불어 나온 근본이요 본질입니다. 그것이 전래의 유산으로 널리 애용되고 전수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 큰 모순은 레닌은 사회주의 미래가 오면 계급이 없는 사회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장 프로레타리아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에 당의 전위대인 적위대는 제일 우선이고 총 안 가진 민중은 제2 중대, 2등 시민이 됩니다. 오늘날 북한에서 선군정치라는 말이 그 불평등을 상속받은 대표적인 말입니다.
레닌의 볼세비키 일당이 성공한 10월 혁명은 당시엔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이었읍니다만 그 붉은 피는 그들의 깃발 색깔처럼 그 이후부터 러시아 강토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칼 맑스는 자본주의란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언젠가는 붕괴 될것이고 거기에 대립되는 사회주의와 서로 반목과 투쟁 과정을 거치고 나서 헤에겔의 변증법과 역사 발전단계설에 따라 공산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지요.
그리고 공산국가의 시작은 프로레타리아 영향이 강하고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독일이나 영국에서 일어 날 것이라고 점 첬습니다.
하지만 공산국가가 어떤 식으로 세워지고 운영될 것인가에 대하여는 그 해법과 각론을 내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산혁명이 일어난 곳은 독일이나 영국이 아니고 동토의 나라, 농업국가 제정 러시아였습니다.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은 첫 번째 단추부터 잘못 채운 공산개혁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의 전이 과정이나 발달이 없이 바로 사회주의로 점프하게 되는 꼴이 되었고 러시아처럼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 위에서 사회주의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결핍이 일반화 되고 생존 경쟁이 다시 시작되며 가난이 되풀이 되는 그런 모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사회변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맑스의 유물사관도 실종되었습니다.
노동자 계급만으로는 혁명에 승리할 수 없다고 깨달은 레닌은 총인구중 75%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혁명에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농민을 상대로 철저한 속임수를 씁니다. 맑스의 지론에도 전혀 없는 농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노농 동맹”을 들고 나와 혁명승리의 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워 주겠다는 미끼를 던집니다.
생산수단의 사유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토지분배를 약속한다는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속임수였고 후에 스탈린이 실시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역행되는 사탕발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스탈린은 “언제 그런 소릴 했더냐?:하고 반발하는 농민들을 반동이라는 이유로 100만 명의 농민을 죽여 없애 버렸습니다. .
10월혁명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 싹을 삭뚝 잘라 버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가 확립됩니다.
임시정부만 타도하면 민주,민주가 되고 자유,자유가 된다고 입 마르게 떠들던 레닌은 정권을 잡은 지 3일 만에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법령을 공표하는가 하면 17일만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표가 4분의 1 밖에 나오지 않자 그 다음해 초에 소집된 제헌국회를 폭력으로 해산시키고 항의하는 시민들에게는 총탄세례로 답해 주었습니다.
혁명의 피는 이때부터 산하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였으며 독재의 공포정치가 새로 막을 올렸습니다.
이로서 러시아 국민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 훨씬 무자비한 공산독재가 수립되었으며 수난의 국가와 인민 대중에게는 새로운 고난이 예고되었습니다.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에 의하여 낮고 뒤떨어진 생산력위에 세워진 무제한의 폭력지배가 나아 갈 길은 처음부터 하나의 숙명으로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 3대 징크스 (0) | 2013.01.17 |
---|---|
러시아 혁명 이야기 2. 고문, 유배, 암살, 처형..., (0) | 2013.01.14 |
제정러시아 해군 (0) | 2013.01.06 |
러일전쟁 (0) | 2013.01.06 |
[스크랩] 러시아가 2차 대전 승전을 중시하는 이유는? 2400만명 희생으로 승리한 `대조국 전쟁` 주장 (0) | 201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