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4월 23일 이 조약에서 일본에 할양하도록 되어 있는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권고하였다.
주일 러시아 공사가 일본의 외무성 차관에게 보낸 각서에서는
“요동 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단순히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까지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결과가 되어서 이것은 장래 극동의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정부에 권고하노니 요동반도를 영유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고 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 공사의 일본에 대한 외교 각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러시아는 더욱 적극적으로 군함을 일본의 고베항에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당시의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치룰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요동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기로 하고,
5월 5일 이 사실을 3국에 통고하였다.
반환조약은 11월 8일 청일 양국간에 체결되고 그 보상으로 청국으로부터 4,500만 원의 보상금이 일본에 지불되었다.
러시아는 교섭의 대가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 지방을 획득하였고
청국에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주었다.
1896년에는 러청 동맹밀약을 맺어 일본이 청국, 조선, 극동 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하고,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東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1898년 다시 러시아는 관동저우(關東州)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 같은 해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영국이 주룽반도(九龍半島)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다음해 프랑스가 광저우만(廣州灣)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었다.
일본은 삼국간섭(1895)으로 이들 국가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와에 대항하여 위기감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일본은 이를 위해서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동안 총 국가 예산의 5할 가량씩을 군비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울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에 대해서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대신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는 조약을 맺는다.
즉 영국과는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미국과는 가쓰라 태프트 조약(1905)을 체결하여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
이로써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에 소비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 모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청국에서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러시아의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조선 내에서 일어난 이권 반대운동과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는 일단 후퇴하였으나 1900년 청국에서 반 제국주의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군을 만주로 출병시킨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1902년 7월에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에는 아무르 지역과 관동 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의 용암포를 점령하고 이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전쟁의 시작과 진행
일본은 돌연 1904년 2월 8일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의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격침시키고, 9일에는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904년 2월 10일에 대러 선전포고를 한다.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체결시키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조선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905년 1월에는 뤼순항을 함락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는 본국에서 1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어 1905년 1월 9일에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이것의 진압이 급선무가 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을 더이상 오래 끌 수 없었으므로 유럽의 발틱함대를 파견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시도하였으나
5월 27일 대마도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와의 전투에서 발틱 함대가 전멸당함으로써 전쟁의 승패는 갈리게 되었다.
전쟁의 종료
러시아는 1905년 8월 8일 테오드르 루즈벨트(Thoeodore Rossevelt, 1901-1909년 제26대 미국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미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한다는 것은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에서 합의된 내용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지도, 보호, 감리권의 특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했으며
만주의 여순·대련의 조차권, 장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 동해와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 어업권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의 영토를 일본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다.
당시 테오도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친일파라고 자처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열망하였다.
그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길이며 조선인들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그는 일본 대표단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문에 응했으며, 회담이 결렬 위기에 빠졌을 때 중재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약 체결 후 "나는 이전에도 친일파였지만 앞으로 더 확고한 친일파가 될 것" 이라고 공언하였다.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회담 중재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5년11월16일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인 17일에 미국 정부는
한국에 있는 공사관을 폐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으려던 남하정책이 완전히 실패하고 극동에서의 막대한 이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라고 생각하던 황인종의 일본에 패배한 것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위신이 크게 떨어져서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후의 러시아 제국붕괴와 공산국가 소련의 출현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독일이 러시아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뒤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사실상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게 되어 아시아에서의 본격적인 침략전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러일전쟁 사진설명 : 진해만에서 러시아 박틱함대를 기다리는 일본 연합함대. "금일 하늘은 맑고 파고는 높다.". 1905년 5월27일 새벽, 러시아함대가 대마도 해협에 모습을 나타냈다. 발틱해를 출발한지 7개월, 지칠대로 지쳐 목적지 블라디보스톡을 향 해 북상중이었다. 초계함으로부터 '적함 발견' 전보를 입수한 도고 헤이 하찌로 일본연합함대사령관은 "즉시 출동, 격멸하겠음"이라는 전문을 황 궁으로 보냈다. '금일…'은 바로 전문의 첫 구절이다. 한국 진해만에서 남하한 일본함대는 단종진으로, 북진하는 러시아 함 대는 2열 종대로 부딪쳤다. 오후 1시55분, 도고의 함대기에 Z자 깃발이 펄럭였다.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려있으니 전원 분발해달라"는 의 미였다. 오후 2시5분 발틱함대 정면에서 대반전을 개시, 갑자기 정자형 으로 포진을 바꾸고 일제히 함포사격에 돌입했다. 승패는 싱겁게 1시간 만에 결정났다. 발틱함대 38척 가운데 19척이 침몰했고, 사령관 로제스 트벤스키를 포함해 무려 6,1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아시아 작은 나라 일본이 유럽의 노대국 러시아를 거꾸러뜨리는 순간 이었다. 일본으로선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 출현에 의해 온나라가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고, 반강제 개항을 한 지 50년만에 유럽의 열강들과 어 깨를 나란히 함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일본이 우수한 도자기를 가져 왔을때 우리는 그들을 야만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수한 총과 칼로 러시아를 격파했을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문명국이라고 불렀다." 윈스톤처칠의 이 말은 당시 서양에 주었던 충격이 어떠했나를 알수 있다.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 열강대열에 끼지못하게 하려는 영국의 전략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것이기는 했다. 전황이 불리함을 느낀 러시아 니콜라이황제는 북해에 주둔중이던 발틱함대의 동해 파견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운하 운영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에게 요청했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영국은 당연히 이것을 거절했고, 발틱함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까지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했다. 이들이 대마도 근처에 접근했을 때는 7개월여에 걸친 항해 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에서 "일본사람들에게 러시아는 하루아침 밥먹기다"라고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소개되고 있 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도 러일전쟁이 얼마나 화제가 됐는지를 짐 작케해준다. 1905년 5월 27일의 해전은 20세기사의 전개를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해전의 결과 이 해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이 체 결됨으로써 한반도와 대륙 진출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은 세계의 공인을 얻었다. 10년 전의 청일전쟁 승리에 이어 러시아마저 물리침으로써 동아 시아에서 일본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 나 이같은 '견제 부재의 상태'가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겐 불행의 씨앗이 었다. 한국 식민지화, 만주국 건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1945년 미주리 함상에서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지는 광란의 역사 길로 들어서게 했던 것이다. 러시아로선 패배의 파탄 속에 혁명의 기운마저 가속화됨으로써 짜르체제 종말의 서곡이 됐다.
한국 풍자한 서양만화
1871년 서구인이 그린 한국에 관한 최초의 시사만화가 발견됐다. 영국인 찰스 버그만이 일본에서 발행한 영문화보집 ‘The Japan Punch’ 1871년 9월호에 실린 이 만화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복 차림에 부채를 든 채 거만하게 걷고 있는 한 서양인을 동료서양인들이 환호하며 반기는 장면.
사진설명 : 프랑스 언론인 비고가 1904년 그린 만화.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굴복시킨 일본이 조선을 짓밟으며 러시아와의 전쟁에 나서는 당시 정세를 한 눈에 보여준다.
구한말 서양인이 그린 한국관련 삽화를 수집 연구하는 명지전문대 백성현교수(명지대-LG연암문고 운영위원)는 최근 프랑스 고서점에서 이 만화를 포함해 한말 개화기 서양인들이 그린 한국 관련 미공개 시사만화 20여점을 입수, 30일 공개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암시하듯 저승사자 모습을 한 고종황제, 일본과 러시아가 찌른 창에 찔린 조선인, ‘코리아’라는 파이를 앞에 놓고 서로 군침을 삼키고 있는 미국 영국 등 열강들…
만화 내용들은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땐 다소 굴욕적이기까지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 같던 당시 조선의 운명을 3국인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를 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찰스 버그만의 1871년 만화. 백성현교수는 “그림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태생 영국인 보도사진가 펠리스 비토』라며 『그는 신미양요 때 미국원정대의 공식사진가로 참여한 일종의 종군사진가였다”고 밝혔다. 비토가 당시 촬영한 강화도 일대의 전투사진들은 외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한국관련 사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시사만화의 효시로 알려진 것이 1909년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만화임을 감안하면 이보다 38년 앞서 서양인에 의해 한국문제가 시사만화로 그려진 셈이다. 백교수가 이번에 입수한 자료 중에는 조선왕실의 상징인 일월곤륜도를 배경으로 고종을 마치 도깨비처럼 그려놓은 1904년 일본작가 아다라마 카로의 그림도 포함돼 있다. 백교수는 “한반도를 우회적으로 비하시킨 만화들은 많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고종을 모독한 삽화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먹이감이 된 대한제국 황제’라는 제목으로 1904년 2월 20일 프랑스 시사삽화 전문지 ‘L’Assiette au Beurre’(이권을 뜻하는 ‘버터 접시’)에 실려 있다.
이번 삽화들 중에는 2,3,4칸 등 다칸 연결만화, 일부를 세우면 전혀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입체 시사만화, 50매 한정본 시사만화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작품들도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다칸연결만화는 4컷 신문 시사만화의 원조격이다. 한편 백교수가 이번에 입수한 자료 중에는 이미 1890년대 초반에 한국인의 시사만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1894년 조선을 여행하고 다음해 ‘KOREA’라는 책을 펴낸 독일인 헤셀 바르텍은 이 책에서 “나는 언제가 한 한국인이 그린 정치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 고종을 기형적인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 그 실물은 없지만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역사도 최소한 15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러시아 3대 징크스 (0) | 2013.01.17 |
---|---|
러시아 혁명 이야기 2. 고문, 유배, 암살, 처형..., (0) | 2013.01.14 |
러시아 혁명 이야기 1. (0) | 2013.01.14 |
제정러시아 해군 (0) | 2013.01.06 |
[스크랩] 러시아가 2차 대전 승전을 중시하는 이유는? 2400만명 희생으로 승리한 `대조국 전쟁` 주장 (0) | 201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