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러일전쟁

구름위 2013. 1. 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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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국과의 사이에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은 4월 23일 이 조약에서 일본에 할양하도록 되어 있는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권고하였다.

주일 러시아 공사가 일본의 외무성 차관에게 보낸 각서에서는

 “요동 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단순히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까지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결과가 되어서 이것은 장래 극동의 영구적인 평화에 대한 장애를 주는 것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정부에 권고하노니 요동반도를 영유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고 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 공사의 일본에 대한 외교 각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러시아는 더욱 적극적으로 군함을 일본의 고베항에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다.

당시의 일본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치룰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요동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기로 하고,

 5월 5일 이 사실을 3국에 통고하였다.

반환조약은 11월 8일 청일 양국간에 체결되고 그 보상으로 청국으로부터 4,500만 원의 보상금이 일본에 지불되었다.

 

러시아는 교섭의 대가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 지방을 획득하였고

청국에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주었다.

1896년에는 러청 동맹밀약을 맺어 일본이 청국, 조선, 극동 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하고,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東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1898년 다시 러시아는 관동저우(關東州)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 같은 해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영국이 주룽반도(九龍半島)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다음해 프랑스가 광저우만(廣州灣)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었다.

 

일본은 삼국간섭(1895)으로 이들 국가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와에 대항하여 위기감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일본은 이를 위해서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동안 총 국가 예산의 5할 가량씩을 군비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울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에 대해서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대신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는 조약을 맺는다.

즉 영국과는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미국과는 가쓰라 태프트 조약(1905)을 체결하여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

이로써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에 소비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 모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청국에서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러시아의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했다.

또 1898년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한러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조선 내에서 일어난 이권 반대운동과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알렉세예프는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는 일단 후퇴하였으나 1900년 청국에서 반 제국주의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군을 만주로 출병시킨다.

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1902년 7월에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에는 아무르 지역과 관동 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의 용암포를 점령하고 이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전쟁의 시작과 진행

일본은 돌연 1904년 2월 8일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의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격침시키고, 9일에는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904년 2월 10일에 대러 선전포고를 한다.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체결시키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조선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랴오양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과 러시아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905년 1월에는 뤼순항을 함락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는 본국에서 1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어 1905년 1월 9일에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이것의 진압이 급선무가 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을 더이상 오래 끌 수 없었으므로 유럽의 발틱함대를 파견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시도하였으나

 5월 27일 대마도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와의 전투에서 발틱 함대가 전멸당함으로써 전쟁의 승패는 갈리게 되었다.

 

 

전쟁의 종료

러시아는 1905년 8월 8일 테오드르 루즈벨트(Thoeodore Rossevelt, 1901-1909년 제26대 미국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미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한다는 것은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에서 합의된 내용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지도, 보호, 감리권의 특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했으며

만주의 여순·대련의 조차권, 장춘 이남의 철도 부설권, 동해와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러시아령 연안 어업권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의 영토를 일본에게 주도록 규정하였다.

 

당시 테오도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친일파라고 자처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열망하였다. 

그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길이며 조선인들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그는 일본 대표단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문에 응했으며, 회담이 결렬 위기에 빠졌을 때 중재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약 체결 후 "나는 이전에도 친일파였지만 앞으로 더 확고한 친일파가 될 것" 이라고 공언하였다.

루즈벨트는 포츠머스 회담 중재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5년11월16일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인 17일에 미국 정부는

한국에 있는 공사관을 폐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으려던 남하정책이 완전히 실패하고 극동에서의 막대한 이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라고 생각하던 황인종의 일본에 패배한 것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위신이 크게 떨어져서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후의 러시아 제국붕괴와 공산국가 소련의 출현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독일이 러시아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뒤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사실상 조선과 만주를 차지하게 되어 아시아에서의 본격적인 침략전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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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서방에 충격…발틱함대 일본에 참패

러일 전쟁 때 일함대 
러일전쟁에서 발틱함대의 참담한 패배는 러시아 뿐 아니라 유럽 모든 국가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 비 유되던 러-일 간의 전쟁은 동방 조그만 나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스탈린 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 이 동해 해전의 수모를 복수한 것이라 해서 그가 악독한 독재자임에도 지금까지 흠모받고 있다는 사실이 러일 전쟁의 패배가 러시아에 준 충격을 짐작케 한다. (이규태·조선일보 논설고문).

사진설명 : 진해만에서 러시아 박틱함대를 기다리는 일본 연합함대.
"금일 하늘은 맑고 파고는 높다.".

1905년 5월27일 새벽, 러시아함대가 대마도 해협에 모습을 나타냈다. 발틱해를 출발한지 7개월, 지칠대로 지쳐 목적지 블라디보스톡을 향 해 북상중이었다. 초계함으로부터 '적함 발견' 전보를 입수한 도고 헤이 하찌로 일본연합함대사령관은 "즉시 출동, 격멸하겠음"이라는 전문을 황 궁으로 보냈다. '금일…'은 바로 전문의 첫 구절이다.

한국 진해만에서 남하한 일본함대는 단종진으로, 북진하는 러시아 함 대는 2열 종대로 부딪쳤다. 오후 1시55분, 도고의 함대기에 Z자 깃발이 펄럭였다.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려있으니 전원 분발해달라"는 의 미였다. 오후 2시5분 발틱함대 정면에서 대반전을 개시, 갑자기 정자형 으로 포진을 바꾸고 일제히 함포사격에 돌입했다. 승패는 싱겁게 1시간 만에 결정났다. 발틱함대 38척 가운데 19척이 침몰했고, 사령관 로제스 트벤스키를 포함해 무려 6,1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아시아 작은 나라 일본이 유럽의 노대국 러시아를 거꾸러뜨리는 순간 이었다. 일본으로선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 출현에 의해 온나라가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고, 반강제 개항을 한 지 50년만에 유럽의 열강들과 어 깨를 나란히 함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일본이 우수한 도자기를 가져 왔을때 우리는 그들을 야만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수한 총과 칼로 러시아를 격파했을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문명국이라고 불렀다." 윈스톤처칠의 이 말은 당시 서양에 주었던 충격이 어떠했나를 알수 있다.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 열강대열에 끼지못하게 하려는 영국의 전략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것이기는 했다. 전황이 불리함을 느낀 러시아 니콜라이황제는 북해에 주둔중이던 발틱함대의 동해 파견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운하 운영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에게 요청했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영국은 당연히 이것을 거절했고, 발틱함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까지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했다. 이들이 대마도 근처에 접근했을 때는 7개월여에 걸친 항해 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영국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에서 "일본사람들에게 러시아는 하루아침 밥먹기다"라고 등장인물의 말을 통해 소개되고 있 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도 러일전쟁이 얼마나 화제가 됐는지를 짐 작케해준다.

1905년 5월 27일의 해전은 20세기사의 전개를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해전의 결과 이 해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이 체 결됨으로써 한반도와 대륙 진출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은 세계의 공인을 얻었다. 10년 전의 청일전쟁 승리에 이어 러시아마저 물리침으로써 동아 시아에서 일본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 나 이같은 '견제 부재의 상태'가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겐 불행의 씨앗이 었다. 한국 식민지화, 만주국 건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1945년 미주리 함상에서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지는 광란의 역사 길로 들어서게 했던 것이다. 러시아로선 패배의 파탄 속에 혁명의 기운마저 가속화됨으로써 짜르체제 종말의 서곡이 됐다.

 

한국 풍자한 서양만화

 

1871년 서구인이 그린 한국에 관한 최초의 시사만화가 발견됐다. 영국인 찰스 버그만이 일본에서 발행한 영문화보집 ‘The Japan Punch’ 1871년 9월호에 실린 이 만화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복 차림에 부채를 든 채 거만하게 걷고 있는 한 서양인을 동료서양인들이 환호하며 반기는 장면.

 

 

사진설명 : 프랑스 언론인 비고가 1904년 그린 만화.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굴복시킨 일본이 조선을 짓밟으며 러시아와의 전쟁에 나서는 당시 정세를 한 눈에 보여준다.

 

 

 

 

 

구한말 서양인이 그린 한국관련 삽화를 수집 연구하는 명지전문대 백성현교수(명지대-LG연암문고 운영위원)는 최근 프랑스 고서점에서 이 만화를 포함해 한말 개화기 서양인들이 그린 한국 관련 미공개 시사만화 20여점을 입수, 30일 공개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암시하듯 저승사자 모습을 한 고종황제, 일본과 러시아가 찌른 창에 찔린 조선인, ‘코리아’라는 파이를 앞에 놓고 서로 군침을 삼키고 있는 미국 영국 등 열강들…

 

만화 내용들은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땐 다소 굴욕적이기까지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 같던 당시 조선의 운명을 3국인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를 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찰스 버그만의 1871년 만화. 백성현교수는 “그림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태생 영국인 보도사진가 펠리스 비토』라며 『그는 신미양요 때 미국원정대의 공식사진가로 참여한 일종의 종군사진가였다”고 밝혔다. 비토가 당시 촬영한 강화도 일대의 전투사진들은 외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한국관련 사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시사만화의 효시로 알려진 것이 1909년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의 만화임을 감안하면 이보다 38년 앞서 서양인에 의해 한국문제가 시사만화로 그려진 셈이다.

백교수가 이번에 입수한 자료 중에는 조선왕실의 상징인 일월곤륜도를 배경으로 고종을 마치 도깨비처럼 그려놓은 1904년 일본작가 아다라마 카로의 그림도 포함돼 있다. 백교수는 “한반도를 우회적으로 비하시킨 만화들은 많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고종을 모독한 삽화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먹이감이 된 대한제국 황제’라는 제목으로 1904년 2월 20일 프랑스 시사삽화 전문지 ‘L’Assiette au Beurre’(이권을 뜻하는 ‘버터 접시’)에 실려 있다.

 

이번 삽화들 중에는 2,3,4칸 등 다칸 연결만화, 일부를 세우면 전혀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입체 시사만화, 50매 한정본 시사만화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작품들도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다칸연결만화는 4컷 신문 시사만화의 원조격이다.

한편 백교수가 이번에 입수한 자료 중에는 이미 1890년대 초반에 한국인의 시사만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 1894년 조선을 여행하고 다음해 ‘KOREA’라는 책을 펴낸 독일인 헤셀 바르텍은 이 책에서 “나는 언제가 한 한국인이 그린 정치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 고종을 기형적인 인간으로 묘사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 그 실물은 없지만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역사도 최소한 15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러일전쟁과 한국

 

조선, 중립선언했지만 사실상 일본 손아귀에

 

러·일전쟁은 나름대로 근대화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던 대한제국에 큰 타격을 가했다.

러·일 간에 전운이 짙어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2월 8일 인천과 여순에서 러시아를 공격한 후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일본군은 3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으로 재편됐고, 사령관의 계급도 소장에서 9월 대장으로 승격됨으로써 조선 정책을 사실상 군이 주도하게 됐다. 2월 11일 파블로프 주한러시아공사는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하야시(林 權助) 주한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동맹 조약을 강요하여,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됐다.

이는 ▲한국은 일본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한국과 일본은 상호 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어 3월 17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 특사로 서울에 와서 한일의정서의 이행을 강요했다.

 

그리고 일본은 4월 1일 조선의 통신망을 접수했으며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서둘렀다.

또 5월 18일 한국이 러시아와 맺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이권을 폐기하도록 했다. 이로써 러시아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던 압록강 유역의 삼림 채벌권이 파기됐다.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제한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1904년 8월 22일 양국 간에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이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인 재정고문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고문을 두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 때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는 이 조약은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군사·경찰·교육·왕실 업무 등에도 조약에 없는 고문을 초청 형식으로 두게 함으로써 이른바 ‘고문(顧問) 정치’가 시작됐다. 조선의 명운에 짙은 어둠이 본격적으로 드리웠으나, 조선은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고립무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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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어둠 틈타 러함대 기습공격… "20세기 최초의 대전투

 

 

여순전투는 1904년 2월 8일,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불타올랐다.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항 안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폭발한 전투였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선전포고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이었다.

 

러시아 함대는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튿날 일본 연합함대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으나, 러시아측 해안 포대의 사격이 워낙 위력적이라 상당한 손상을 입고 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큰 바다로 물러갔다. 러시아 군대가 진치고 있던 여순 외곽의 남산을 일본 군대가 공격함으로써 육지에서도 첫 교전이 일어났다.

 

양측 모두 이미 각오하고 있던 전쟁이었다.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나, 중국 대륙 진출로를 확보해야 하는 일본이 여순에서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국 군대의 증원군이 여순의 전장으로 계속 몰려들었다. 일본군 보병의 대부대가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여순과 북쪽으로 연결된 철도를 절단하여 외부 연결 통로를 폐쇄했다. 여순항도 봉쇄했다.

▲ 러일전쟁 초기 여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보도한 프랑스 한 신문의 삽화. 러시아군 진지를 일본군이 공격하고 있다.

러시아의 보병 역시 대련과 여순 사이에 두 개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실로 처절한 공격에 격렬한 방어였다. 양군의 살벌한 대치 속에서 7월의 대석교 전투, 8월에 양국 해군이 여순항 밖에서 접전한 황해 전투 등 접전이 잇달았다. 여순에서 싸우고 있는 두 군대의 지휘관 모두 만 리 밖에 있는 위력적인 러시아 발트함대 생각뿐이었다. “발트함대가 오기 전에 끝내자!” “발트함대가 올 때까지 버티자!”

외곽전도 치열했다. 8월 말 벌어진 요양(遼陽) 전투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20세기의 대전투 중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 처참한 싸움이었다. 일본군을 지휘한 것은 육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으로, 사상자 2만 이상의 손실을 낸 격전 끝에 패전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승전을 거두었다.

 

그런 힘겨운 대치 상태를 깨뜨린 것이 유명한 여순항 서부지역의 ‘203고지 쟁탈전’이다. 여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후석산 산정은 해발 203m의 고지. 여순항 전체가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는 이 중요한 전략 지점엔 이미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중순이 되자 일본군은 돌연 전략을 바꾸어 공격의 주력을 후석산정으로 돌려 고지 쟁탈전을 시작했다. 12월 5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피아간에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다. 11월 28일 하루 동안 일본군은 8000명의 사상자를 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봉쇄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대해 정밀한 포격을 시작했다. 불과 이틀 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러시아의 전함과 순양함 50척이 모두 침몰했고, 여순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다. 1905년 1월 2일에 러시아군의 항복 사자가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에게 갔다.

 

여순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온통 환희에 불타 올랐다. 국제적 파장도 엄청났다.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어 전쟁 경비 조달을 위한 일본 정부의 국채 모집이 매우 수월해진 반면,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의 국민 통치에까지 막심한 그늘을 만들었기에 뒷날 레닌이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승자가 패자보다 훨씬 더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이상한 전투, 여순 전투의 승리는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다. 온 유럽을 떨게 한 저 위력적인 발트함대의 운명에도 막심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후일담도 유별나다. 여순 전투를 지휘했던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도 두고두고 그의 경력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귀국 후 노기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꾸를 들었는데, 7년 뒤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부부는 천황의 장례식날 나란히 할복자살, 여순 전투의 기이한 마침표가 되었다.

 

 11. 러일전쟁②―무기력한 대한제국

 

조선땅서 러·일 전쟁중인데도 지도층은 우왕좌왕만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 한반도를 무대로 격전을 벌이는 유럽대표 러시아와 아시아대표 일본의 한판 싸움을 희화화한 러일전쟁 당시의 시사만화.
“1904년 2월 8일, 한국(Korea)의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던 두 척의 러시아 순양함 바략 호와 코리츠 호가 일본 함대의 총공격을 받았다. 양국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러 시간의 피나는 전투―특히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가 끝난 후, 러시아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배를 스스로 폭파시켜 버렸다.

러일전쟁의 포연은 한국 땅을 비켜갈 리 없었다. 2월 8일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한 일본은 같은 날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 역시 기습작전이었다. "

 

위 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문 ‘이그재미너(Examiner)’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한국에 들어와서 크게 활약했던 잭 런던(Jack London·1876~1916)의 종군기 첫머리다.

당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황야의 부름’이나 ‘강철 군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러일전쟁 첫날의 모습을 그렇게 그렸다.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여순·대련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제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두려워했던 일본은 군함을 인천항으로 향했다. 일본 육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육로로 북진했다.

▲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 밖에서 러시아 군함 바략호와 코리츠호가 침몰하고 있다.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은 러시아 군함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의 길을 택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뺨에 붉은 점을 친 자들은 선두의 선발부대를 따라랏!”

“너처럼 보라색 점은 공병대 소속이다! 혼동하지 마랏!”

일본군은 군수품의 소속을 쉽게 식별하려고 짐을 진 한국인들의 뺨에 부대별로 다른 색깔의 점을 칠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길 연변의 마을들은 매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산속으로 피란을 떠났다. 마을이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정부와 우왕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

 

집을 몽땅 비우고 멀리 피란하는 것 외엔 대응책이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의 무력한 모습을 잭 런던은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후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구경하려고 마을로 내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호기심이었기에 약간의 위험만 느끼면 서둘러 도망친다. …한국의 북쪽 지방은 일본군이 통과할 때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도시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고, 논과 들은 버려져 있었다. 김을 매지도 않고 파종하지도 않았기에 들에는 녹색 식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러일전쟁은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대사건이었다. 저 먼 동쪽 끝, 아시아에서 새로 일어난 제국이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인가.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언제나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던 러시아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또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성장을 어디까지 지켜보고 지원할 것인가.

러일전쟁에 대해 유럽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시 언론들이 한국과 청에 보낸 종군 기자들의 활약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사진 전송이 불가능하던 당시, 숱한 언론들이 생생한 현장 묘사도(일러스트레이션)로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지금 우리도 볼 수 있는 그 그림들을 보면 노회한 러시아와 팔팔한 일본의 한판 겨룸, 그리고 그 발밑에 깔린 한반도와 백성들 모습이 강렬하게 묘사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제물포 앞바다의 ‘패전’을 영웅적 항거로 윤색했던 러시아는 패전 꼭 100년 만인 올해 2월, 당당하게 인천 앞바다를 찾아왔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 순양함 ‘바략’호는 100년 전 자폭 침몰했던 군함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연안부두에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가 섰고,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러시아 해군 장병들이 화려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미·일 동맹이 2차대전 후 어느 때보다 밀월을 과시하고 있는 한편으로, 주한 독일대사는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홀로 고립돼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러일전쟁 발발 100년의 한국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