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러시아-피의 일요일

구름위 2013. 1. 1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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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혁명과 전쟁의 시대가 열리다

20세기에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체제가 나타났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꿈으로 간직해 왔다. 16세기에
살았던 영국 사람들이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꿈으로 간직해 왔다. 16세기에
살았던 영군 사람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그런 사회의 모습을
자세히 그렸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시민이 재산을 공동소유하고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한다. 누구나 생산한 물건 가운데 필요한 만큼을 갖다 쓸
수 있으며 공무원을 선거로 뽑는다. 모어는 인간이 이런 사회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유재산제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서유럽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너무 가난하고 거지가 날로
늘어나는 것이 가장 큰 사회문제였다. 그 시대의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예를 들어 로버트 오웬, 생시몽, 푸리에 같은 이들도 모어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도를 사회악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라며 매서운 비판을 퍼부었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으로 이름난 칼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단지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도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체제가 망하고 공산주의체제로 넘어가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생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이 개인의 손을 떠나
사회 전체의 것으로 되고 인간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받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의 결사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끝 모를 상상력을 가진 천재와
이상주의자들의 말과 글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일어난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이 꿈을 현실로 만들어 보려는 야심을
지니고 한 나라의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지도자로 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으며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모두 없애
버리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눈부신 성공을 거둔 듯 보이던 사회주의는 20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붉은 깃발로 뒤덮을 만큼 큰 힘을 떨쳤으며 20세기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대학살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말고 글이 아닌 실제 사회주의 나라를
출현하게 한 끔직한 대학살이 일어난 날. 역사가들은 그날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가 통치하던 제정 러시아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는 1차대전이 터진 후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러시아 10월 혁명 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뒷날
소련이 해체되는 가정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바뀌었다). 차르가 살던 동궁
앞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이 사건은 거대한 제국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국가권력을 빼앗을 수 있었는지를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날 동궁 앞에는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여자와
노인은 물론이요 어린아이들까지 섞여 있었다.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하느님이시여, 차르를
구해주소서!" 그들은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나머지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자비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가퐁이
맨 앞에서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들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이 진리와 보호를
얻으러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나 다름없이 억눌리고 살아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 이런 고통을 계속 견디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 저희가 바라는 것은 고작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이고 규정시간 밖의 노동을 없애 달라는 것, 품삯을 적어도 하루
1루블만이라도 받게 해달라는 것뿐이나이다. ... 마지막 구원을 바라는 저희
신민 들을 제발 도와주십시오. ... 그러면 ... 폐하의 이름을 우리들과 후손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기게 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폐하의 궁전 앞 이 광장에서 죽을 것입니다.
가퐁 신부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호소를 듣고 '아버지 차르'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대열을 이끌었다. 길 가던 구경꾼들도
황제의 초상을 보고 찬송가를 들으며 가슴에 십자를 그었다. 경찰은
교통정리를 해서 이 평화로운 행진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동궁 앞 광장에서
그들을 맞아 준 것은 자비로운 차르가 아니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겨눈
군대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황제의 자비로운 목소리 대신
귀를 찢는 총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하얗게 언 눈 위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흘렀다.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텅 빈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시체가 뒹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기심에 끌린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소식을 듣고 분개한
학생들도 몰려왔다. 동궁 안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2만 명이나 진을 치고
있었다. 군중은 군대와 경찰을 향해 욕을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군인들은
또다시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5백 명이 넘게 죽고 수천 명이
총에 맞아 다쳤다. 물론 확실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피의
일용일'이라는 이름이 결코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많은 피가 흐른 것만은
분명하다.
차르가 인자한 손길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면서 찾아갔던 노동자들은 자비가
아니라 무자비한 총탄 세례를 받았다. 광장을 뒤덮은 붉은 피와 시체를 보고
그들은 차르가 인자한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압제자임을
깨달았다. 차르에 대한 동화 같은 환상에서 깨어난 러시아 민중은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민 이기를 그만두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르체제를 타도하자고 선동해 온 혁명가들이 드디어 대중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수천 년 억눌리며 살아온 러시아 민중은 쌓이고 쌓인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렸다. '자비로우신 차르가 머무는 성스러운 도시' 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운 혁명가들은 무리를 들고 차르 군대와 맞섰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솟아오른 혁명의 불꽃은 얼어붙은 땅을 녹이며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가퐁 신부는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그는 차르 앞으로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쓴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인 결속을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흘러야 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그런데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이 사태가 왜 일어났으며 제정 러시아
사회체제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 없는 백성이 수천 명이나 죽고 다친 그날 밤, 그는 이런 일기를 써
놓았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질서가 파괴되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났다. 군대가 여러 곳에서 총을 쏘아야만
했다. 주님,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데카브리스트, 나로드니키, 마르크스주의자
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차르체제는 바람 앞에 선 등불과 같은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 낡아빠진 전제정치의 나라 러시아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번 터지면 세상을 단숨에 날려 버릴 만한 내부 모순이 켜켜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동궁 앞에서 벌어진 대 학살은 이 화약더미에 불을 질렀다.
제정 러시아 사회는 이미 산업혁명을 이룬 서유럽 나라들에 비해 경제와
정치가 모두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 인구는 삼천만이 조금
넘었다. 이천만 명이 넘는 농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귀족한테 집과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면서 돈과 농산물을
바치거나 귀족 집에 얹혀 살면서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다 하는 종으로 평생을
마쳐야 했다. 스스로 소와 말처럼 일하면서 가축과 한 방에서 먹고 자고
아이를 낳았다.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었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정 러시아는 바로 이런 농노제도를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 차르는 그야말로
하느님과 맞먹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귀족들은 차르의 보호를 받으면서
농노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것을 빼앗아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사치를 부리는
데만 정신을 팔았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젊은 귀공자나
페테르부르크 사교계를 주름잡은 아름다운 귀부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귀족들은 유럽 문화를 부러워하여 부지런히 흉내를
냈는데 그 가운데서도 으뜸은 프랑스여서 '교양 있는 귀족과 귀부인'이라면
자기네끼리도 프랑스 말을 할 정도였다. 농노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짐승'쯤으로 여겨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투르게네프, 푸슈킨, 체호프,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농노들을 인간으로 보고 쓴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가 발전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19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는 여전히
중세사회 그대로였다. 이같이 완고한 차르체제에 대하여 최초의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으로 출정했다가 자유로운 사회를 경험한
일군의 청년 장교들이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쳐들어오자 젊은 귀공자들이
너나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지독한 겨울을 당해 내지 못해
물러난 나폴레옹 군대를 뒤밟아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
넘치던 자유주의사상을 맛보았다. 이 청년장교들은 한 떼의 제비처럼 철 이른
봄소식을 물고 조국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몇 지식인들 말고는 아무도
그들이 가져온 자유주의사상을 반겨주지 않았다.
러시아 민중을 전제정치에서 해방시키려는 포부를 가진 청년 장교들은 삼천
명쯤 되는 반란군을 모아 차르에게 총부리를 디밀었다. 1825년 12월 14일
일어난 데카브리스트당 반란이다. 알렉산드르 1세 1825년 12월 14일 일어난
데카브리스트당 반란이다. 알렉산드르 1세를 뒤이어 니콜라이 1세가 새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 날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달력으로 12월을 말한다.
반란군은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포위공격을 당했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보드카와 빵을 주며 격려했지만 그들은 민중의 힘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총 맞아 죽거나
붙잡혀 총살당했다. 한겨울에 날아든 제비 떼는 이렇게 해서 모두 얼어죽고
말았다.
첫날부터 반란을 겪은 니콜라이 1세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서
황제 자리를 지킨 30년 동안 자유주의사상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사상은 자꾸 밀려들어와 러시아에도 서유럽과 같은 의회정치를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인 집단이 생겼다. 가난과 학대를 견딜 수 없게
된 농노들은 곳곳에서 수십 차례나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알렉산드르 2세가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제법 현명한 사람이어서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제도를 폐지하고3년 뒤에는 지방자치의회인
젬스트보를 설치했다. 또 재판제도를 손질하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
군복무를 하도록 징병제도를 뜯어고쳤다. '해방자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이런
과감한 개혁을 했지만 민중의 생활이 금방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농민들은 형식상으로는 해방을 얻었지만 새로운 돈벌이를 찾은 것은 아니었고
자기네의 대표를 뽑을 권리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농노해방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 사회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발전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공장과 원료들, 다시 말해 자본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곧 노동자이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라 자본가와
근로계약을 맺고 임금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자유인인 동시에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다"는 면에서도 자유인이다. 알렉산드르 2세 덕분에
'토지와 신분제도의 속박'에서 풀려난 농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이 있는
도시로 옮겨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자본을 빌려 왔다. 러시아에도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생겨났고 그와 더불어 임금노동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정치는 1881년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어떤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던져 '해방자 황제'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막 싹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고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박해했다. 대학의 자치권도 빼앗아 버렸다. 지방자치의회도 활동할 수 없도록
묶어 버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제 그런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나라였다.
러시아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19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공업생산이 두 배로 불어났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철도가 생겼고 도시에는
큰 공장이 앞다투어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만큼 도시에서는 머지않아 러시아
전제정치를 뒤집어엎을 새로운 사회계급이 빠르게 성장했다. 바로
노동자계급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주로 큰 공장 주변에 몰려 살았다. 같은
시기 독일은 산업이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나라였지만 노동자들 가운데
14%만이 종업원이 5백 명 넘는 큰 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
비율이 35%에 가까웠다.
노동자들은 농노 시절과 다름없이 가난하고 비참했다. 12시간 넘게 일하면서
좁고 더러운 방에서 남녀노소가 한 덩어리로 엉클어져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티푸스와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쉴 새 없이 나돌아 생명을 빼앗아 갔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해서도 아무 대책이 없었다. 자본가들은 실컷
부려먹고도 마음 내킬 때 주고 싶은 만큼만 임금을 내놓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만은 많았지만 어떻게 해야 자기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때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만사를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 사람 열 가운데 여덟이 농민이었다.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느끼는 때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때로 한 지역을 점령하고 지주들을 죽였다. 그러나 차르
군대를 당해 날 수는 없어 번번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군대도 밑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농민의 아들인 병사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힘든
일을 하고도 귀족 장교들한테서 멸시와 설움을 당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남몰래 반역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터전 삼아 19세기 막바지에 차르체제에 반대하는 세 갈래
정치세력이 움텄다. 나로드니키와 마르크스주의자와 온건한 개혁주의자들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일을 벌인 것은 나로드니키였다. 나로드니키는
인민주의자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꼭 들어맞는 번역은 아니다. 그들은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농촌으로 뛰어들어 농민들을 깨우치려고 했다.
"농민들은 타고난 무정부주의자이다. 농민의 혁명 에너지를 터뜨리는 데는 단
하나의 불꽃만 있어도 충분하다. 청년들이 농촌에 뛰어들어 그 불꽃을 던져라!"
혁명가 바쿠닌의 이런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농민들에게 모든 사회악이
사유재산제도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폐지하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거꾸로 재산을 늘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혁명투쟁에
나서기는커녕 돌팔매로 나로드니키를 쫓아버리거나 붙잡아서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정열과 희생정신으로 끓어 넘치던 청년들이 벌인
'브나르도(인민 속으로)' 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농민의 혁명 에너지'에
불을 붙이는 데 실패한 나로드니키는 도시에 돌아와 수많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폭력과 테러로 차르체제를 뒤집어엎는 쪽으로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높은 관리를 여럿 죽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알렉산드르
2세까지도 암살했다. 나로드니키는 나중에 사회혁명 당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별 힘이 없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플레하노프가 그 지도자였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마르크스가 쓴 책을
읽고 그 사상을 받아들여 공장 노동자에게 전파하고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 주체로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 주체로 삼은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다. 차르 경찰은 골칫덩어리 나로드니키를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담은 책이 마구
돌아다녀도 눈감아 주었다. 그러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했다. 그들은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들었다.
이 정당은 당원도 많지 않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찰이 손을
대자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차르 정부는
가장 위험한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 하나의 정치세력은 온건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혁명세력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전제정치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그나마 제대로 아는 자본가와 일부 귀족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귀족과 지주들은 대부분 변함없이 전제정치를 칭송하면서
낡은 사회질서를 지키려고 했다.
이 세 갈래 정치세력 가운데 어느 편도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민중은 아직 '아버지 차르'를 쫓아내 버리자는 혁명가들의 과격한 주장을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