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
1.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서 가족과 함께 피살
어느 나라든지 마지막 군주는 불쌍한 최후를 맞는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칼 황제가 그렇고 중국 청나라의 부의가 그러하며 이란의 샤 팔라비가 그렇다. 니콜라스 2세는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러시아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러시아는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차르)인 니콜라스 2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참으로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가족 모두가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아무리 마지막 임금이라고 해도 이토록 처참하게 전가족이 몰살 당하는 예는 없었다. 어린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때문에 니콜라스 황제를 더 기억하게 한다. 니콜라스 2세는 1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2월 볼셰비키에 의해 폐위되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원들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잔인하고 과격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과격주의자를 뜻하게 되었다.
제정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2세
볼셰비키 혁명분자들은 니콜라스 2세와 가족들을 체포하여 생페터스부르크 교외의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e Selo)에 있는 알렉산더 궁전에 연금하였다. 차레스코에 셀로는 차르(황제)의 마을이란 뜻이며 오늘날의 푸쉬킨 시이다. 니콜라스 2세와 가족들은 얼마 후에 토볼스크(Tobolsk)에 있는 총독관저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7월에는 마지막으로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니콜라스 2세, 알렉산드라 왕비, 황태자 알렉세이, 네 명의 딸(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아), 전속요리사, 전속운전사, 주치의, 왕비의 시녀 등이 볼셰비키에 의해 같은 방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1918년 7월 17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13년의 니콜라스 2세 가족.
이로써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가장 나이어린 공주인 아나스타시아는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10여년 후에 파리에서 할머니인 마리아 페도로브나 황비와 만나게 되었지만 할머니는 그가 진짜 아나스타시아인지 알수 없어서 아나스타시아 문제는 끝내 미궁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잉그리드 버그만과 율 브린너가 주연한 ‘아나스타시아’라는 영화의 줄거리가 된바 있다. 그건 그렇고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인 니콜라스 2세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살펴보자.
니콜라스 2세의 풀 네임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이다. 1868년 5월 18일 생페터스부르크 교외의 차르스코에 셀로(현재의 푸쉬킨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7월 17일 향년 50세로 우랄 지방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니콜라스 2세의 공식 타이틀은 황제 및 전러시아 군주(Emperor and Autocrat of All the Russia)이며 핀란드 대공과 폴란드 왕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니콜라스 2세는 혁명의 와중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정교회는 그의 죽음을 순교로 간주하여 성니콜라스로 시성하였다. 니콜라스 2세는 1894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황제에 올라 1917년 3월 15일 공식적으로 폐위될 때까지 23년간을 통치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 세계의 강국 러시아는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어 국운이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니콜라스 2세를 ‘블라디 니콜라스’(Nikolas the Bloody)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유명한 코딘카(Kohdynka) 비극, 블라디 선데이, 유태인 포그럼(집단학살)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실정을 기록한 것은 1914년 8월,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전국민의 징집을 강행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 간 것이 결국 혁명을 불러오게 되었고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니콜라스 2세의 가정 배경부터 알아보자.
생페터스부르크의 베드로-바울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의 석관
2.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
니콜라스 2세의 아버지는 제정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3세이며 어머니는 마리아 페오도로브나였다.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는 덴마크의 공주로서 결혼 전에는 다그마르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니콜라스 2세의 장인은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9세였다. 니콜라스 2세의 할아버지는 알렉산더 2세이며 할머니는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였다. 할머니는 헤쎄 왕가의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마리(Marie)라는 이름이었다. 니콜라스는 형제가 많았다. 세명의 남동생과 두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알렉산더, 게오르게, 미하엘은 남동생들이었으며 세니아(Xenia), 올가는 여동생들이었다. 니콜라스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다. 아버지 알렉산더는 장대한 체구여서 어린 니콜라스에게는 언제나 듬직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덴마크 왕실에서 곱게 자랐다가 추운 나라인 러시아로 시집온 여린 모습의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황태자(짜레비치)인 니콜라스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의 사촌, 즉 니콜라스에게 당숙이 되는 사람은 니콜라스 니콜라에비치대공으로 니콜라스와 첫 이름이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남달리 가깝게 지냈다. 사람들은 니콜라스 니콜라에비치대공과 장차 황제가 될 니콜라스를 구별하기 위해 니콜라스 니콜라에비치대공을 니콜라샤(Nikolasha)라고 불렀다. 훗날 니콜라스는 외가 쪽으로 그리스국왕 게오르게 1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3세, 영국 황태자비 알렉산드라의 조카가 된다. 영국의 알렉산드라는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국왕에 오른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이다. 니콜라스와 왕비인 알릭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모두 영국 조지 5세의 사촌들이다. 니콜라스와 빌헬름은 직접 사촌은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 3세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먼 사촌이 된다. 아무튼 유럽의 왕실들은 결혼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서 한치 건너면 사촌간이고 두치 건너도 사촌간이었다.
니콜라스의 어머니 마리아 페오도로브나. 1912년.
3. 차레비치 시절
1881년, 니콜라스가 13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인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살해되었다. 니콜라스의 아버지가 차르 알렉산더 3세로서 황제가 되었으며 니콜라스는 자동적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니콜라스의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반군들에 의해 피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반군들은 새로운 차르인 니콜라스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보안상의 이유로 생페터스부르크 교외에 있는 가치나(Gachina)궁전으로 옮겨 지내도록 했다. 니콜라스는 이곳에서 장래의 차르로서 교육을 받으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니콜라스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3세가 차르가 된지 9년후,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성하였다. 당시 니콜라스는 이미 20세가 지난 당당한 청년이었다. 아버지 알렉산더 3세는 황태자인 니콜라스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멀리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이를 ‘황태자의 동방여행’(Eastern Journey)이라고 부른다. 니콜라스에게는 세상을 볼수 있는 중요한 여행이었다.
결혼 직후의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니콜라스는 황태자로 있을 때 발레 댄서인 마틸데 크세씬스카(Mathilde Kschessinska)라는 여자와 좋아서 지낸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니콜라스의 부모는 니콜라스를 어서 결혼시켜 마음을 잡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스의 아버지는 프랑스와의 유대강화를 위해서 프랑스의 왕세자인 필립의 딸 헬렌(Helene)공주와 결혼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싫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독일 헤쎄-다름슈타트 공국의 알릭스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아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니콜라스에게 ‘알릭스 공주가 인물도 관찮고 성품도 참하므로 신부 감으로 훌륭하다’고 자꾸 말했기 때문에 마음이 기울었던 모양이었다. 알릭스 공주의 어머니인 앨리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이었고 아버지는 헤쎄의 대공 루이 4세였다. 그리하여 니콜라스와 알릭스의 혼사는 추진되었다.
4. 약혼, 즉위, 결혼
니콜라스와 알릭스는 1894년 4월에 약혼하였다. 니콜라스가 26세 때였다. 그런데 실상 알릭스는 니콜라스와의 결혼을 주저주저하였다. 왜냐하면 니콜라스와 결혼하려면 루터교를 버리고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궁리 끝에 알릭스에게 만은 종교의 예외를 두도록 했다. 즉, 루터교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토록 하였다. 알릭스는 약혼한 해의 11월에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식의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Alexandra Fedorovna)라는 이름을 가졌다.
니콜라스와 알릭스가 약혼한지 얼마후 알렉산더 3세가 신장염이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알렉산더 3세는 49세였다. 니콜라스는 26세로 제정러시아의 황제(차르)의 자리에 올랐다. 니콜라스는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두들 알렉산더 3세가 적어도 30년 정도는 더 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황태자로서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황제교육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물론 조기교육에 대한 건의도 있었다. 재무장관이었던 세르게이 위테(Sergei Witte)는 알렉산더 3세에게 니콜라스에 대한 황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험을 위해 시베리아철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3세는 니콜라스가 아직 젊으니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이라며 조기교육을 묵살하였다. 그래서인지 니콜라스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사촌들에게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러시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자주 물었다.
니콜라스와 헤쎄의 알릭스의 결혼. 1894년
니콜라스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맡았던 공직은 기아구조위원장, 재정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정도였다. 러시아는 1891-92년 극심한 가뭄으로 흉작이 되어 전국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기아로 죽어가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다. 니콜라스가 기아구조의 책임을 맡은 것이 그나마 좋은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보면 니콜라스는 황제로서 준비가 안되었다. 아버지인 알렉산더 3세가 이루어 놓은 커다란 테두리의 정책을 답습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니콜라스와 알릭스(알렉산드라)의 결혼은 1895년 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갑자기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누군가는 옆에서 자기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여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결혼식은 1894년 11월 26일 모스크바에서 거행되었다. 니콜라스는 러시아 경기병 장교의 복장이었으며 알렉산드라(알릭스)는 전통적인 로마노프 신부(新婦)의 드레스를 입었다
5. 제정러시아의 차르가 되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에서의 대관식
나약한 성품의 니콜라스이지만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전제군주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거북해 했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서서히 의회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의회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니콜라스는 결혼 전에 영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때 의회에서 의원들이 자유스럽게 정책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니콜라스는 자기가 황제가 되면 저런 의회 제도를 도입해야겠다고 말한 일이 있지만 실제로 황제가 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다.
대관식후 사제가 니콜라스의 이마에 성유를 발라 축복하고 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
니콜라스가 황제로 즉위한지 얼마후 러시아 전국의 지방에서 농민대표들이 생페터스부르크로 올라와 니콜라스에게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황실을 입헌군주제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농민들의 정치사회적 생활을 개선하여 줄것을 요구했다. 대부분 농민대표들은 지방의회(쳄스트보스: Zemstvos)의 멤버들이었다. 농민대표들이 니콜라스 황제에게 제출한 탄원서는 황실 예법에 따라 작성된 문건으로 아주 완곡한 표현으로 개혁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농민들의 탄원서를 보자마자 ‘이런 버릇없는 백성들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고 이 난리들인가? 지방의회의 사람들이 황제가 하는 일에 감히 간섭하려는가? 생각 없이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라면서 대노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이어 받아 절대군주제를 강력히 유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니콜라스는 아직도 낡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점차 니콜라스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새로운 차르가 백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아울러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니콜라스의 대관식은 차르로 즉위한지 1년 후인 1896년 5월 14일 모스크바의 크렘린에 있는 우스펜스키(Uspensky)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흘 후인 5월 18일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코딘카(Khodynka) 평원에서 백성들에게 음식과 공짜 맥주와 기념품을 나누어주는 대규모 축하잔치가 열렸다. 잔치 장소를 코딘카로 정한 것은 그곳이 러시아 제국의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이곳에서 대관식 축하잔치를 베풀어 차르로서의 정통성을 보이고 아울러 전통적인 절대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다. 이날 잔치에는 약 50만명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음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굶주린 백성들은 서로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 난리도 아니었다. 이런 난리 통에 1,429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최소 9천명 내지 최대 2만명의 백성들이 다쳤다. 이날의 사건을 ‘코딘카 비극’이라고 부른다. 황제로서 첫 발을 디딘 니콜라스에게는 불운한 징조였다. 아무튼 이날의 비극
으로 니콜라스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빵한조각 때문에 코딘카에서 압사한 어떤 여인을 군중들이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다.1896년.
기본적으로 니콜라스의 정책은 아버지인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1896년 전국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다. 1897년에는 이미 15년전 부터 추진되고 있던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금본위화폐제도를 정착하였다. 1902년에는 대시베리아철도를 거의 완성하였다. 이로써 극동지역과의 무역이 크게 발전되었다. 물론 미비한 점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대시베리아철도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일찍 완성된 것이었다. 외교에 있어서 니콜라스는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프랑코-러시아 동맹을 강화하였으며 기본적으로는 유럽의 평화를 위한 정책을 유지하였다. 니콜라스가 헤이그에서의 만국평화회의를 주도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만국평화회의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준 열사 등 고종황제의 칙사들이 천신만고 끝에 헤이그까지 갔으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대단한 유감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서는 국가간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데 뜻을 함께 했고 무기경쟁을 종식해야 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강대국들간의 이해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였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하였으나 회의장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들이 나라없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세상을 하직한 곳이 바로 헤이그였다.
니콜라스 2세의 아버지 알렉산더 3세
6. 노일전쟁(Russo-Japanese War)의 여파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분과 러시아의 충돌은 거의 불가피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로의 남진정책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자연히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 영토를 확장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정착토록 했다. 결국 중국을 비롯한 극동지역에 욕심을 보이고 있는 일본과 대치하지 않을수 없었다. 노일전쟁은 1904년 일본이 아르투르(Arthur)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를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발틱함대를 급히 동쪽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트함대는 츠시마(Tsushima: 대마도)해협에서 일본해군에 의해 전멸 당했다. 육지에서는 러시아군이 보급품의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작전명령과 군수물자는 서쪽 끝의 생페터스부르크에서 동쪽 끝의 아르투르항으로 보내졌다. 유일한 운송수단은 시베리아철도였다. 전장 6천 마일의 철도운송은 수십일이 걸리기도 했다. 더구나 단선 철도였다. 제대로 전투가 이루어질수 없었다. 아르투르항은 9개월이나 저항을 했지만 결국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1905년 중반, 니콜라스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 들여 포츠마우스조약을 체결하였다. 노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니콜라스와 가족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던 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나스타시아, 알렉세이(예전에는 아들의 장수를 위해 여자 옷을 입혀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실에서), 마리아,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 타티아나, 올가(서있는 소녀)
노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사람들은 니콜라스의 전쟁관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다. 니콜라스는 순진해서 그런지 또는 무얼 몰라서 그런지 러시아에는 애국심이 충만한 병사들이 있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다고 믿었다. 니콜라스는 러시아의 동쪽 끝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지리적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군비를 투입해야 승리할수 있다는 간단한 사항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설마 일본이 대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겠느냐는 신념만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차르는 하나님이 맡긴 신성한 직분이므로 하나님께서 러시아를 보호해 주신다고 믿었다. 전쟁이 터지고 러시아군이 계속 패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병사들의 애국심과 하나님의 도움으로 최후의 승리를 할 것으로 믿었다. 사람들은 니콜라스의 고집과 무식과 편견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니콜라스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겼지만 의외로 사리에 맞지 않는 고집은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백성들은 니콜라스를 바보천치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계속 전쟁에서 패전하자 니콜라스의 어머니와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니콜라스에게 일본과 평화회담을 가지라고 설득했다. 처음에 니콜라스는 평화회담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주저했다. 그러다가 발트함대가 일본군에 의해 전멸 당하자 어쩔수 없이 평화회담을 추진토록 했다.
일본의 함포사격으로 화염에 싸인 러시아 아서항의 정유시설
7. 유태인 포그럼에 앞장서다
니콜라스 2세의 정부는 반유태인 선동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백성들에게 반유태인 폭동을 일으켜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베풀었다. 니콜라스 2세 정부의 내무장관인 비아체슬라브 플레베(Viacheslav Plehve)는 주요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여 유태인들을 증오케 만드는 여러 자료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1903-06년의 유태인 집단학살(Pogrom)이 러시아의 곳곳에서 일어나 수많은 유태인들이 목숨을 잃고 재산을 잃었다. 노일전쟁 중에는 언론들이 한결 같이 유태인이 제5열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더구나 핍박을 받았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유태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은 마치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이어서 1905년의 혁명 때에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정치와 사회가 불안정하여 서민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면 자연히 돈 많은 유태인이 공격 타깃이 된다.
모셰 마이몬(Moshe Maimon)작품인 '마침내 집에'(Home at Last). 러시아를 위해 전선에 나가 부상당한 유태인 병사가 귀향하여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였다는 내용.
8. 겨울궁전까지 밀려온 혁명의 물결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한 사실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지금까지 유럽의 국가들은 유럽 내의 국가들과 전쟁을 하며 이기기도하고 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이 아닌 저 아시아의 섬나라와 전쟁을 하여 유럽의 대국인 러시아가 참패를 당한 것이다. 믿을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노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 전역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부유한 귀족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해졌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정부가 붕괴되고 귀족사회가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어 혁명이 뒤따른다. 1905-06년의 혁명은 그렇게하여 일어났다. 반정부 시위대는 생페터스부르크의 겨울궁전 앞까지 밀어닥쳤다. 경찰은 시위자들에게 겁을 주어 해산하기 위해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실탄을 쏘았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모스크바의 크렘린 앞에서의 시위에서는 시위자들이 던진 사제폭탄으로 마침 크렘린을 나오던 황제의 삼촌 세르게이 로마노프 대공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흑해함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철도파업은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되어 전국이 마비되었다. 그런 소요가 한 달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니콜라스 2세는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니콜라스는 모든 것이 속상하여 화만 냈다. 황제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런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겨울궁전에 진입한 폭도들이 궁전내부에서 빈둥거리며 쉬고 있다. 그림이라도 한점 가져갔더라면 지금쯤...
“(오마니 전상서! 일기불순하온대 오마니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시며...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엔 신문을 보기가 지겹습니다. 학교에서도, 공장에서도 온통 파업뿐입니다. 경찰들이 살해되고 근위대와 정부군도 공격을 받아 피해를 보았습니다. 폭동, 반란, 무질서뿐입니다. 그런데도 장관들이란 사람들은 마치 겁에 질린 암탉들처럼 웅크리고 있기만 합니다. 모여서 무슨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그저 떠들기만 하고 자기들의 일신상의 안전만 지킬 궁리를 합니다. 요즘 며칠 동안은 어쩐 일인지 거리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적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무슨 일이 곧 터질 것만 같아 겁에 질려 있을 뿐입니다. 군대는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위대들이 정적을 유지하고 있으면 군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름철에 천둥과 번개가 내려치기 직전의 어두컴컴한 날씨와 같습니다. 모두들 신경들이 날카로워 있습니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는 터지고 말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혁명의 와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행정은 완전히 무질서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더 두려운 일입니다. 이만 총총”
겨울궁전으로 진격하고 있는 시위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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