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3)

구름위 2013. 3. 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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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로마노프의 종말

얼어붙은 시베리아 철도

 

제정러시아는 전쟁 중에 생필품을 생산하지 못하자 백성들의 생활을 어려워졌고 따라서 이곳저곳에서 대규모 폭동과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15년 니콜라스가 생페터스부르크를 떠나 동부 전선을 시찰하고 있을때 제정러시아의 정부는 알렉산드라 왕비가 운영했다. 그러나 사실상 생페터스부르크는 파업자들과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영국 대사를 비롯한 외교사절들은 니콜라스에게 헌법을 개정하여 입헌군주제로 만들어야 혁명을 방지할수 있다고 자문했지만 니콜라스는 듣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니콜라스는 군사령부가 있는 모길레프에서도 600km 더 떨어진 스타브카(Stavka)라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생페터스부르크의 궁전은 폭도들이 침범해도 무방비 상태였다. 1917년에 접어들어서 러시아는 총체적인 와해의 가장자리에 와 있게 되었다. 군대가 농민 1천5백만명을 징집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을 손이 부족하였다. 결국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고 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치솟는듯 했다.

 

겨울이 닥쳐와 철도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그나마 열차는 석탄과 군수품을 실어 나르느라고 생필품 운송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 러시아는 약 2만대의 기관차가 있었다. 그러나 1917년에 들어서서는 그중에서 7천대만이 움직일수 있었다. 객차는 50만량이었으나 17만량으로 줄어들었다. 1917년 2월, 날씨는 왜 그렇게도 추운지 7천대의 기관차 중에서 1천 2백대가 기온 급강하로 보일러가 터졌다. 이에 따라 17만량의 객차 중에서 6만량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생페터스부르크에 대한 연료와 밀가루 공급이 사라졌다. 니콜라스는 전시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렸다. 금주령뿐만 아니라 술을 생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작용만 발생했다.

 

시베리아횡단 철도

 

1917년 2월, 생페터스부르크(페트로그라드)는 유난히 극심한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 실제로 연료가 없어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여기에다가 식량난이 겹쳤다. 사람들은 상점을 부수고 빵과 생필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붉은 깃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밴너에는 ‘독일 여자를 타도하자! 전쟁을 끝내자!’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독일 여자라는 것은 알렉산드라 왕비를 뜻했다. 경찰들이 지붕위에 올라가서 시가지를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폭도로 변하였다. 수도인 생페터스부르크의 군대는 취약했다. 전선에 투입되지 못한 노병들이 주축을 이룬 군대였다. 군대도 정부의 무능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장교들은 황실에 충성을 다해야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결국 군대는 시위대의 편에 섰다. 차르의 내각은 니콜라스에게 즉시 생페터스부르크로 돌아와 모든 공직에서 사임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수도로부터 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니콜라스는 내각을 책임 맡고 있는 프로토포포브(Protopopov)로부터 사태가 수습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프로토포포프에게 만일 시위대가 폭도처럼 행동하면 가차 없이 제압하라고 지시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몽골의 고비사막을 지나고 있다. 철도 초창기에는 러시아 동부에서 서부전선으로 물자를 운반하는데 기차로 몇주일이나 걸렸다.

 

생페터스부르크의 주둔군은 그런 임무를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한 노병들은 이미 거의 모두 폴란드와 갈리치아의 전선에서 목숨을 잃고 이름 모를 무덤에 묻혀 있었다. 그나마 생페터스부르크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군대는 17만명의 예비병력으로 이들은 주로 인근 시골의 노동자 계층에서 징집한 노인들이나 소년들이었다. 지휘관들은 전선에서 부상당하고 귀향한 장교들이거나 또는 젊은 사관생도들뿐이었다.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이 17만명이라고 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제대로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소총도 충분히 없었다. 1917년 3월 11일, 수도방어군의 사령관인 카발로프(Khabalov)장군은 황제의 지시를 이행코자 병력을 동원하였다. 카발로프 장군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전에 거리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자진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현수막에 적힌 명령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위대가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군대가 발포하여 약 2백명이 쓰러지고 나서 부터였다. 그런 중에도 어떤 부대의 병사들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았으며 또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발포명령을 내린 장교에게 오히려 총을 겨누고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는 진압병력을 증강토록 명령했으며 의회(Duma)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15. 차르에 대한 반란

 

1917년 3월 12일, 시위대에게 일부러 공포를 쏘았던 볼린스키(Volinsky)연대가 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다른 연대들도 볼린스키 연대의 반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페터 대제가 창설한 전설적인 프레오브라옌스키 수비대(Preobrajensky Guard)마저도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무기고가 약탈을 당했으며 내무성, 육군본부, 경찰본부, 법원, 그리고 구역경찰서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정오쯤에 반란군은 페터-파울요새를 함락하여 요새의 대포들을 모두 장악하였다. 밤이 되었다. 반란군은 자기들의 거사를 혁명이라고 불렀다. 6만명의 병사들이 혁명군에 추가로 합세하였다. 의회(Duma)는 임시정부를 형성하고 사태를 수습코자 했으나 혁명의 불길을 막을수는 없었다. 의회는 오히려 니콜라스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니콜라스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퇴위하지 않을수 없음을 인식했다. 니콜라스 2세는 1917년 3월 15일(그레고리 력) 퇴위하였다. 3월 15일은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살해 당한 날이었다. 3월 15일은 구러시아력으로는 2월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스의 퇴위를 이끌어 낸 혁명을 ‘2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생페터스부르크의 겨울궁전에 진입하는 반군들. 1917년.

 

니콜라스는 처음에 황태자인 알렉세이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알렉세이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마지막 자문을 듣고나서 마음을 바꾸었다. 니콜라스는 알렉세이 대신에 동생인 미하엘 대공을 후임 차르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미하엘 대공은 차르의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 생각이 깊었던 미하엘 대공은 먼저 러시아가 군주국으로 계속 존속할 것인지 또는 공화제를 채택할 것인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토록 하고 만일 군주국으로 남기로 결정하면 그때에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겠다고 주장했다. 국민투표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니콜라스의 퇴위와 볼셰비키의 등장으로 3세기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러시아가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가자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진보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크게 환영했다. 미국은 모든 국가 중에서 최초로 러시아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퇴위에 대한 반응이 엇갈렸다. 기쁨과 구원과 희망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공포와 분노와 혼란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백성들은 비록 군주제를 반대하고 차르를 퇴위시켰지만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하자 군주제에 대한 일종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러시아에서의 1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와 2월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책으로 열권도 더 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러 사람의 편의를 위해 이쯤해서 설명을 마감코자 한다.

 

전선을 시찰하는 니콜라스 황제와 참모진들. 1916년.

16. 커피와 버터는 사치품

 

1917년 2월 봉기가 성공하여 니콜라스가 퇴위하고 케렌스키(Kerensky)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그해 8월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우랄지방의 토볼스크로 피난시켰다. 전국적인 혁명의 기운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시점에서 로마노프 사람들을 보호해야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은 유배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스와 가족들은 토볼스크의 총독관전에서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달 뿐이었다. 10월에 접어들자 볼셰비키가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니콜라스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레닌의 영향력에 대하여는 계속 과소평가하였다. 다만, 니콜라스가 깨달은 것은 하나 있었다. 자기가 폐위당한 것이 러시아의 앞날에 나쁘면 나빴지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집밖에서는 니콜라스를 재판에 회부한다는 얘기가 계속 나돌고 있었다. 가족들은 좌불안석이었다. 볼셰비키의 병사들이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밤낮으로 감시하였다. 니콜라스는 견장이 붙어 있는 군복을 입지 못하도록 제지를 당하였다. 병사들은 담장에 니콜라스의 딸들을 겨냥한 외설스런 그림이나 글씨를 써넣고 좋아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 연금되어 지낼 때 땔감을 준비하는 니콜라스 황제와 알렉세이 황태자. 1917년

  

해를 넘겨 1918년이 되었다. 두어달은 별일 없이 지났다. 그러다가 3월 1일부터는 평상시의 식품을 제공하는 대신 군대의 레이션을 배급하였다.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나 요리를 돕는 하인들이 필요없게 되었다. 10여명의 하인들이 떠났다. 날이 갈수록 식품배급에 어려워졌다. 커피나 버터는 사치품이어서 아예 포기해야 했다. 가족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자기들을 갇힌 생활에서 구해줄 것으로 믿는 정신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더 곤혹스런 생활을 해야 했다. 그해 4월 말, 니콜라스와 가족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육군공병장교였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의 저택인 2층의 이파티에프(Ipatiev) 하우스에 연금되었다. 오늘날 이파티에프 하우스가 있던 자리에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이 흘린 피를 기억하여 ‘보혈의 교회’(Church of the Blood)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해 7월 17일 아침에 이들은 볼셰비키의 총탄에 모두 희생되었다. 이들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장면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코자 한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니콜라스와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장소에 세워진 '보혈의 교회'. 2007년 촬영.

17. 예카테린부르크의 참극

 

1918년 7월 17일 새벽 2시 20분경, 야코프 유로브스키가 지휘하는 일단의 병사들(실은 비밀경찰)이 방을 돌며 곤하게 잠들어 있는 니콜라스와 가족들, 그리고 시종들까지도 깨웠다. 병사들은 모두에게 어서 옷을 입고 집 뒤에 있는 반지하 방으로 모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반볼셰비키 분자들이 예카테린부르크로 진입하여 황제와 가족들이 거처하고 저택까지 밀고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므로 안전을 위해서 잠시 본채에서 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네 딸과 알렉세이 왕자는 모두 반지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종들 중에서 네명만이 끝까지 황제와 함께 남겠다고 하여 반지하 방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두어명은 무슨 낌새를 알아 차렸는지 저택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황제와 함께 남아 있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주치의인 유제네 보트킨(Eugene Botkin), 왕비의 시녀인 안나 데미도바(Anna Demidova), 요리사 이반 카리토노프(Ivan Kharitonov), 마부 알렉세이 트루프(Alexei Trupp)였다. 황제와 가족들, 그리고 시종들이 모인 방의 옆방에는 이미 10명의 사격분대가 비밀리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부 유럽에서 차출되어 생페터스부르크에 온 7명의 공산주의 병사와 지방 볼셰비키 당원 3명이라고 했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헝가리 억양을 쓰고 있었다. 지휘관인 유로브스키는 이들이 라트비아 출신들이라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왕자를 업고 반지하 방에 들어왔다. 왕비는 앉을 의자도 없다고 불평하였다. 유로브스키가 어떤 병사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왕비가 알렉세이 왕자를 무릎에 앉히고 의자에 앉자 갑자기 병사들이 반지하 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유로브스키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에게 우랄지역 소비에트노동자지부의 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선언이었다. 놀란 니콜라스가 ‘무엇이라고? 무엇이라고?’라고 소리치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유로브스키가 다시한번 명령받은 내용을 말해주었다. 병사들중 한사람이 나중에 회고한데 따르면 니콜라스는 성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그대들은 지금 그대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마지막 했다고 한다.

 

니콜라스가 본능적으로 가족들에게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사형집행인들인 병사들이 피스톨을 꺼내어 발포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가장 먼저 쓰러졌다. 유로브스키가 니콜라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와 가슴을 향해 여러 발의 총알을 쏘았다. 아나스타시아, 타티아나, 올가, 마리아는 첫 번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드레스에 보석들을 꿰매어 넣은 것이 방탄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들의 무게만 해도 1.3 kg가 넘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총을 쏘았는데도 공주들이 죽지 않자 총검으로 여러번 찔렀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피스톨을 머리에 바짝 대고 쏘아 결국은 숨을 거두게 했다. 이틀후 볼셰비키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차르인 니콜라스 2세를 총살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반볼셰비키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예카테린부르크로 진격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노프 왕족들이 석방될 수도 있으므로 어쩔수 없이 처형했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흩어져 살고 있는 왕족들은 니콜라스의 가족들이 생존해 있는 줄로 알았다.

 

니콜라스 2세와 가족.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올가, 마리아, 어머니 알렉산드라, 아나스타시아, 알렉세이, 타티아나. 1911년 생페터스부르크 궁전에서의 마지막 가족 사진. 모두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의 총칼에 죽임을 당했다.


18. DNA 소동

 

1979년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알렉산더 아브도닌(Alexander Avdonin)이라는 사람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어떤 진흙탕 길속에서 두개골을 비롯한 여러 개의 뼈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는 당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당국은 제정러시아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고려하여 그것이 니콜라스와 가족들의 유해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밝히지 않고 덮어 두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수행하고 유해에 대한 DNA 검사를 시작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유해들이 니콜라스와 가족들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1998년 1월에 유골들을 조합하여 다시 조사해 보니 모두 11구가 되어야 하는데 9구만 확인되었다. 네 딸 중의 한명의 유골과 왕자 알렉세이의 유골이 없었다. 유골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의 DNA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검사가 끝나자 당국은 유해들을 생페터스부르크의 성베드로-바울교회에 안치하였다.

 

2008년 4월 러시아 당국은 실종되었다는 2구의 유골을 2007년에 먼저 발견했던 장소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추가로 발견한 유골들에 대하여 DNA 검사를 시행한 결과 로마노프의 가족들이 틀림없었다고 밝혔다. 추가로 발견한 유해도 성베드로-바울교회에 함께 안치하였다. 2008년 10월 1일, 러시아 대법원은 니콜라스 2세와 가족들이 정치적 희생자였으므로 신분을 복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9년 과거의 여러 DNA결과가 보고서로서 발간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에 추가로 발견된 2구의 유골은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시아 공주의 것이라고 최종 확인했다. 러시아 당국은 최종적으로 2008년 4월 30일, 니콜라스와 가족 모두의 유해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필자의 설명은 이렇듯 간단하지만 실은 그 간에 유해와 관련하여 수많은 소문들이 분분했었다. 지면상 생략!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전문서적을 사서 읽어보면 된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보혈교회'(Church on Blood). 니콜라스 황제와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집이 있던 곳에 세운 러시아정교회. 그래서 '피 위에 세운 교회'라는 명칭이 붙었다.  

19. 성자로 시성되다

 

1981년 해외의 러시아정교회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순교자로 인정하여 성자로 시성하였다. 2000년 8월 14일 러시아정교회의 교회협의회(시노드)는 이들을 순교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기독교 신앙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정교회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수난의 동참자(Passion bearers)로 인정하여 시성하였다. 이렇듯 니콜라스와 가족들 모두가 성자로서 시성되자 최근 이에 대한 논란이 또 다시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해외러시아정교회는 1981년의 결정에 대하여 두 파로 나뉘어 논란을 벌였다. 일부는 니콜라스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의 발호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약한 군주라고 내세우며 그런 사람을 성자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니콜라스의 죽음을 유태인 박해를 위한 선전도구로 삼았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러시아 국내의 정교회 지도자들도 나약한 니콜라스의 무능으로 혁명이 일어났으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고통을 당하였으므로 성자로 추앙할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니콜라스가 온화하고 자상하며 사랑에 넘친 아버지였음을 상기하고 인간으로서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일단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므로 다시 원위치 시키는 일은 곤란하다고 볼수 있다.

 

성자가 된 니콜라스의 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