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서유럽으로 창을 뚫다

구름위 2014. 9. 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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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집권(1694년)과 북방전쟁(1700년 ~ 1721년)

 

 

미래의 수도가 될 소택지를 활보하는 표트르 1세(맨 앞)
이곳의 이름은 그의 수호성인 이름을 따서 성 페테르부르크로 불리게 되었다.
 
1697년 봄, 한 무리의 러시아인이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카자흐 마부, 나팔수 난쟁이 그리고 대번에 고관대작임을 알 수 있는 멋진 관복 차림의 귀족들이 뒤섞인 희한한 행렬이었다. 그들 중에 유난히 거칠고 초라해 보이도록 꾸민 표트르 미하일이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는 애써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했으나, 2m가 넘는 훤칠한 키에다 유난히 불거져 나온 턱의 혹, 잦은 경련을 일으키는 안면근육 등의 두드러진 특징이 그의 의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들은 서유럽 시찰에 나선 '대사절단'과 표트르 1세의 무리였다.

 

이들은 서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탐욕스럽게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혔다. 일행 중 어느 누구보다도 표트르 1세가 가장 열심이었다.

 

프로이센에서는 포병대령에게 포술훈련을 받았다. 복잡한 기계를 볼 때마다 그 작동법을 배우고 직접 분해조립을 해보았다. 해부학 등 응용과학에도 매혹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조선소에 평범한 배 목수로 취직하여 조선술을 열심히 익혔다. 영국에서도 발달한 조선기술 · 군사훈련 방법을 두루 배웠다.

 

14개월간의 서유럽 여행 중에 표트르 1세는 어린 나이에 엄청난 주량과 고약한 술버릇, 야만스러운 행동거지로 우스갯거리가 됐다. 그러나 개중에는 거친 행동 속에 숨겨진 표트르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이도 있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그중 하나로, 그는 그 후 오랫동안 표트르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표트르는 모든 허례허식을 버리고 서유럽으로부터 발달된 과학과 선진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표트르는 1672년 차르 알렉세이와 두 번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세이가 죽은 후 그의 이복형 표도르가 차르에 올랐으나, 몸이 약한 표도르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1682년 우여곡절 끝에 표트르는 역시 병약했던 이복동생 이반과 공동 차르가 됐다. 그 후 7년간은 이반의 누나 소피아가 섭정을 맡아 러시아를 통치했다.

 

소피아는 열심으로 서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의욕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의욕이 지나쳐 야심으로 변하면서 자신이 직접 차르에 오르려다 표트르와 표트르를 따르는 세력에게 꺾여 수녀원에 유폐당하고 만다. 당시 17살이었던 표트르는 1689년부터 5년 동안 어머니에게 정사를 맡기고 잡다한 공부와 전쟁놀이에 몰두한다.

 

1694년 어머니가 죽은 후 표트르는 직접 통치에 나서고, 2년 후 공동 차르였던 이반이 죽으면서 러시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

 

어린 시절 표트르는 외국인촌에서 외국인 기술자들과 어울리며 실용적인 기술들을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석공 일과 목수 일도 배웠고, 말에 편자를 박을 줄도 알았으며, 집도 짓고 대포도 만들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한때 여자에게 빠지기도 했으며, 익살스런 농담과 심한 장난도 즐겼다.

 

그는 또한 젊은 귀족과 농노 마부, 개 사유관 등과 어울려 전쟁놀이를 즐겼다. 외국장교들을 불러와 자신의 '부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크렘린에서 대포와 소총 · 실탄을 가져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전투를 벌여 20명 이상이 죽은 적도 있다.

 

표트르는 어려서부터 차르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고루한 인습의 올가미를 벗어버리고 러시아를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발달된 기술과 생활양식을 도입하여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편입시켜야 했다. 이러한 생각은 대사절단의 경험에 의해 더욱 굳어졌다.

 

표트르의 치세는 끝없는 소용돌이의 연속이었다. 쉴 새 없이 전쟁이 계속됐고, 날마다 개혁과 혁신이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다. 위대한 러시아의 건설, 이것이야말로 표트르의 지상목표였다.

 

표트르는 먼저 전쟁으로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착수했다. 1695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흑해 연안의 투르크 요새 아조프를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표트르는 이 실패를 교훈 삼아 2차 공격을 위해 러시아 최초의 해군을 만들었다. 혹독한 훈련과 무자비한 징용으로 강력한 해군과 함대가 만들어졌다. 아조프 요새는 함락됐다. 유럽 여러 나라가 러시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00년 투르크와 휴전협정을 맺은 후 표트르는 북방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패권을 다투는 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표트르는 발트 해 연안에 서유럽으로 가는 창구를 확보해야만 했다.

 

1700년 11월에 벌어진 나르바 전투에서 표트르는 참패했다. 나이 어린 스웨덴 왕 카를 12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카를 12세는 러시아를 제쳐두고 더 강력한 상대라고 생각한 폴란드로 화살을 돌렸다.

 

그 사이에 표트르는 강력한 군대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귀족의 군복무 특권을 없애 농민과 똑같이 평생 동안 소집에 응하도록 바꾸었다. 교회의 종은 녹여서 대포로 만들었다. 유능한 외국인 장교들이 속속 초빙돼 왔고 군사훈련 교범도 근대화했다. 그는 또 국민들의 의식을 고려하여, '차르 폐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나라를 위하여'로 바꾸었다.

 

카를 12세가 폴란드와 싸우는 동안 표트르는 발트 연안에 소규모 공격을 계속 퍼부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에서도 핀란드 만의 네바 강 하구를 뺏은 의의는 컸다.

 

1703년 표트르는 네바 강 하구에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땅이 습하고 파도가 거칠며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황량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표트르는, 그곳이야말로 러시아 사람들이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로 전진해 나아가는 데 더 없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수만 명의 사람을 끌고 와 총칼로 위협하여 요새와 조선소를 건설하고 도시의 기반을 닦게 했다. 토대가 완성되자 말을 안 들으면 추방 또는 사형시킨다고 위협, 수천의 러시아 귀족들을 가제로 이주시켜 석조 저택들을 짓게 했다. 마침내 1712년 민중의 숱한 해골들 위에 도시가 완성되니, 여기가 곧 페테르부르크다. 그해에 표트르는 러시아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전쟁을 치르기 위한 가혹한 징세와 징병, 신도시 건설을 위한 무자비한 징용,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1705년 또 한 차례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볼가 하구의 아스트라한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러시아 남부 전역을 휩쓸며 북상해 올라왔다. 그러나 1708년 돈 카자흐 출신의 지도자 불라빈이 표트르의 군대에 패하면서 반란의 불길은 사그라든다.

 

북방전쟁은 계속되고, 1709년 7월 폴타바에서 러시아군과 스웨덴군의 대접전이 벌어진다. 이 싸움에서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지친 스웨덴군은 표트르가 진두에 서서 지휘한 러시아군에 참패를 당한다. 폴타바 전투의 승리로 러시아는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 후로도 북방전쟁은 10년 이상을 끌었다. 약간의 기복이 없진 않았으나, 이후 러시아군은 스웨덴 군을 계속 몰아붙여 곤경에 빠뜨린다. 신생 발트 해 함대가 스웨덴 해군을 격파했고, 러시아 육군은 핀란드로 공격해 들어갔다.

 

1721년 전쟁은 마침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니슈타트 화약에서 러시아는 발트 해 연안을 영구히 확보한다. 서유럽으로 창을 뚫으려는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승리 축하연에서 표트르는 '황제' 칭호를 받고, 러시아는 '제국'으로 새롭게 모습을 단장한다. 국제적으로도 크게 지위가 상승한 러시아는 당당히 유럽 열강의 대열에 올라선다. 이제 러시아를 빼고서는 유럽의 일은 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