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2세 즉위(1762년) 예카테리나 대제
황실과 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는 농민과 농노들의 가혹한 착취를 바탕으로 했다. 여제의 치세 때 농민들은 최악의 상태로 전락했다. 여제가 그녀의 총신이나 아첨꾼들에게 방대한 국유지를 하사함으로써 반자유 상태였던 농민들마저 비참한 농노의 신세로 전락해갔고, 사유지의 농노들은 사고 파는 물건이 되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지주들에게 맡긴 채 참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민중들의 삶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속에서도, 여제의 치세하에서 러시아는 유럽 강국의 하나로서 그 위세가 실로 당당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유럽의 강국을 자처하며 세를 떨치던 폴란드는 러시아의 주도하에 셋으로 나뉘어 지도하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내부적으로도 행정체계가 정비되어 제정 러시아는 제국의 기반을 갖추었다. 여제의 시대는 겉보기에 실로 위대한 시대였다.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못하고 죽은 후 황제의 왕관은 황족들 사이에 이리저리 떠돌다가 1741년 그의 딸 엘리자베타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타는 조카인 독일 홀슈타인 가의 표트르 공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표트르 공자의 배필도 직접 선발하여 독일 안하르트 체르프스트 공의 딸 소피아를 뽑았다. 이 처녀가 바로 예카테리나다.
예카테리나는 명석하고 열정적이며 굳센 의지와 정렬을 가진 여걸이었다. 그녀는 곧 러시아어를 익히고 러시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그에 반해 젊은 표트르는 주정뱅이인데다가 행동도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을 경멸했다. 엘리자베타가 죽은 후 표트르가 제위에 올랐으나, 예카테리나는 6개월 만에 근위대의 도움으로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가 됐다.
열흘 뒤 표트르는 고주망태가 된 상태에서 살해됐다. 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것은 예카테리나의 애인이 된 근위대의 미남 장교 오를로프였다. 예카테리나의 애정행각은 유명하여,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적어도 21명의 애인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이 국사를 돌보는 데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여제는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충성의 대가로 토지와 재물을 주었다. 싫증이 나서 다른 남자로 바꾼 후에도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은급을 하사하여 관계를 유지했다.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이 독일인이고 또 남편을 죽이고 권력을 탈취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여제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서 손색이 없음을 만방에 과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민족 우선, 자유 확대, 귀족 우대 정책을 펴나갔다. 예카테리나는 먼저 쿠데타의 공신들과 쿠데타 후의 반발을 진압한 데 공이 큰 귀족과 총신들에게 대규모 서훈을 행하고 농민이 딸린 국유지를 나누어주어 자기 세력을 강화했다. 귀족들의 국가에 대한 봉직 의무도 폐지하고 자유의사에 맡겼다. 그리고 러시아 전역을 두루 여행하여 널리 배우는 모습을 과시했다.
어느 정도 기반이 정비되자 1766년 말에는 법전편찬 위원회에 인민 각층으로부터 광범한 대표를 참가시키겠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1767년 귀족뿐만 아니라 도시민, 국유지 농민, 카자흐와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뽑힌 564명의 대표가 모였다. 첫 회의에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참조하여 예카테리나 자신이 직접 쓴 〈훈령〉이 낭독됐다. 〈훈령〉은 법에 의한 통치를 설파하면서 러시아처럼 광대한 나라에서는 전제권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위원회에서 귀족대표들은 다른 신분의 사람도 관등이 오름에 따라 세습귀족이 될 수 있는 현행제도에 반대하면서 귀족의 특권을 주장했다. 도시 상인의 대표들은 자유고용 노동의 확립을 외치면서 농노를 점원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들도 농노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들과 대립했다. 위원회는 200여 회에 걸쳐 여러 법안을 심의하다가 1768년 말에 이르러 활동이 중지되고 만다.
법전편찬 위원회는 각 계층 간의 틈을 확인함과 아울러 황제가 인민 각층의 지지를 얻어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것을 선전하는 효과만 낸 채 성과 없이 끝을 맺었다. 여제는 그러는 가운데 볼테르와 편지를 교환하고 디드로를 초빙하는 등 자신이 계몽군주임을 과시했다.
대외정책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확대에 힘을 기울여 국민들의 민족적인 바람을 충족시켜주었다. 여제의 치세하에서 러시아는 남부와 서부로 크게 영토를 확장했고, 새로 획득한 영토는 귀족들에게 주어 농노제를 더욱 확대 강화했다.
착취당하는 농노와 농민, 자치권을 잃은 카자흐들은 러시아 최대의 농민반란을 일으켜 전제정치와 귀족 지배에 저항했다. 반란은 러시아의 동남부 지역을 휩쓴 1775년 지도자 푸가초프가 처형되면서 막을 내린다.
반란에 충격을 받은 정부는 그해 지방제도를 개혁했다. 전국을 50현으로 나누고 그 밑에 250개의 군을 두었다. 현에는 중앙관료를 지사로 임명, 파견했으나, 군의 행정과 사법은 현지 귀족 중에서 선출된 자에게 위임했다. 그에 따라 지주귀족들의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1785년에는 귀족과 도시에 대한 특권 인가장이 발부되고 귀족신분의 권리가 확립됐다. 귀족들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명예와 생명과 재산과 호칭을 박탈당하지 않고, 체형과 인두세를 면제받으며, 산업시설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도시민에게도 자치가 인정됐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귀족들은 예카테리나의 제국에서 화사한 봄을 즐겼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그들을 위협했으나 이제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변한 여제가 자유사상의 러시아 유입을 막아주었다.
러시아는 또한, 예카테리나의 치세에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여 국부가 증가하고 문화적으로도 진보를 이룬다. 당시 문화의 창조자와 향유자는 귀족들이었으나, 그 영향으로 진보적 지식인이 늘어가고 민중들에게도 교육과 의료와 복지 면에서 약간의 혜택이 돌아가면서 19세기의 찬란한 개화를 준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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