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가초프의 반란(1773년 ~ 1775년)
영주의 명령을 어겨 처벌받는 농노 황실이 호사를 부리고 귀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동안에 러시아 농민과 농노들의 처지는 계속 악화돼갔다. 황제가 총신들에게 은급으로 하사하는 국유지가 증가함에 따라 농노로 전락하는 농민도 함께 늘어갔다. 농노제도 계속 악화일로를 걸어 예카테리나 시대가 되어서는 지주가 어떤 형벌을 가해도 농노는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농노는 말하자면 밥 먹고 숨 쉬는 물건이었다.
농민과 농노들은 이제 격렬히 저항했다. 예카테리나 치세 초기의 10년간 중앙러시아에서만도 약 40회의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러시아의 동쪽 볼가와 우랄 지방에서 지금까지의 소규모 폭동과는 다른 거대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스텐카 라진의 열풍이 러시아를 휩쓸고 지나간 지 약 100년 후에 러시아 최대의 농민반란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기폭제가 된 것은 이번에도 역시 카자흐들이었다.
남부로 새롭게 확장된 러시아 영토가 귀족들에게 하사되어 이곳에까지 농노제가 확대되면서, 지금까지 존중받아오던 카자흐의 자유가 부정됐다. 정부는 나아가 야이크(우랄) 강 유역의 카자흐를 러시아 정규군으로 편성하고자 했다. 카자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 야이크 카자흐는 1772년 도망친 칼미크인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됐다.
에멜리얀 푸가초프는 돈 카자흐로, 분리파 정교도였다. 그는 야이크 카자흐들에게 투르크 왕을 따르자고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72년에 심비르스크 감옥을 거쳐 카잔 감옥에 갇혔다. 그는 근엄하고 친절, 경건한 태도로 수인들과 간수들을 감화시켰고, 마침내 간수들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자유의 몸이 된 푸가초프는 분리파 정교도인 우랄 지방의 카자흐들에게 토지와 자유를 위해 궐기하자고 호소했다. 1773년 그는 10년 전 예카테리나의 음모로 폐위, 암살됐다고 전해진 표트르 3세를 칭하며, 야이크 카자흐들 사이에 나타났다. 농민들 사이에는 그때까지도 차르가 아직 살아서 예카테리나와 귀족들을 피해 은신해 있다는 믿음이 널리 유포돼 있었다.
카잔과 오렌부르크 현의 주민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토지를 빼앗아간 러시아의 관리와 상인들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주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80명에 불과했던 푸가초프의 무리에 카자흐, 탈주병, 광산과 공장의 농노 노동자, 도망 농민과 농노, 그리고 바슈키르, 키르기스, 타타르, 칼미크, 카자흐인 등 소수민족들이 속속 합류하여, 가을에는 군사가 2만 5,000명을 헤아리게 됐다.
푸가초프는 이 군대를 이끌고 오렌부르크를 공략하면서 사방에 병사를 풀어 관리와 지주들을 살육케 했다. 카잔, 아스타라한, 니주니 노브고로트, 페름이 반란군의 활동무대로 변했다. 모스크바 근처에서까지 방화와 약탈이 행해졌다. 작은 도시들은 싸우지도 않고 이 '표트르 3세'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이제 푸가초프의 반란은 라진의 반란을 능가하는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지방관헌들은 사태의 중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일례로, 반군이 오렌부르크에 들이닥쳤을 때 지사는 무도회를 열고 있었다. 부하가 달려와 성채의 보루가 무너졌다고 보고했는데도 그는 별로 귀 기울이지 않고 무도회를 계속 진행시켰다. 반란을 진압하러 온 군대도 규율이 형편없었다. 진압군이 봉기하여 장교를 살해하고 반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 틈을 타 푸가초프와 반란군은 빠른 속도로 그 세를 확대해갔다.
그러나 푸가초프의 반군은 1774년 3월 이윽고 유능한 장군이 지휘하는 정부군을 만나 우랄 지방으로 패퇴한다. 그러나 장군이 급사한 뒤에 온 후임자는 태만한 사람이어서 푸가초프는 다시 세력을 규합할 시간을 얻었다.
우랄 지방에서 새롭게 힘을 모은 푸가초프는 새로 만든 무기와 탄약으로 무장하고 서진하여 다시 카잔을 넘어 모스크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반군은 다시 3만 가까이로 불어났고, 반란의 불길은 다시 타올라 니주니 노브고로트까지 뒤엎고 모스크바를 위협해왔다. 예카테리나는 그제서야 초조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74년 여름 대규모의 진압군이 끔찍한 보복을 가하면서 진압작전을 전개해왔다. 카잔 서쪽에서 정부군에 패퇴한 푸가초프는 반군을 이끌고 남부의 곡창지대를 지나가면서 농민들을 선동했다. 각지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일어나 다시 모스크바 주변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정부는 투르크와의 전쟁을 급히 끝맺고 토벌군을 증강하여 푸가초프의 본대를 추격했다. 푸가초프의 군대는 차리친(볼고그라드) 근처에서 강력한 진압군을 만나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푸가초프는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그러나 그해 말에 그는 정부에 매수된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정부군에 넘겨졌다. 모스크바로 압송된 푸가초프는 1775년 1월 붉은 광장에서 사지를 찢기고 죽었다.
체포된 푸가초프
각지의 농민반란은 그해 여름까지 계속됐다. 진압군은 반란의 깃발을 든 숱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을 교수대에 매단 후 교수대를 마을에 그대로 세워두었다.
반란 중에 빼어난 미모로 푸가초프의 눈에 띄어 그의 부인이 된 16세 카자흐 소녀 우스티나아도 죽을 때까지 참담한 곤욕을 치렀다. 반군들에게 '황후'로 불린 우스티니아는 체포된 후 감옥을 전전하면서 숱한 고문과 능욕에 시달렸다. 소문을 들은 예카테리나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고 싶었다. 여제 앞에 끌려온 그녀의 몰골은 2년간의 감옥생활과 거기서 겪은 곤욕으로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여제는 "소문만큼 예쁘지는 않군" 하고는 그녀를 요새에 종신 유폐하라고 명했다. 여제는 그녀가 요새에서 장병들의 노리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유능한 애인 포튬킨의 도움을 받으며 그때까지 남아 있던 카자흐 자치령을 모두 없애고 지방행정을 개혁하여 전제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푸가초프의 반란이 진압됨으로써 러시아에서 대규모 농민전쟁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민중이 활발하게 일어서던 시대는 가고, 참고 순종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대신, 지식인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 사회의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한 시사평론가 노비코프와 농노제에 전면적인 비판을 가한 작가 라디시체프가 그 선구자들이다. 특히 라디시체프는 1790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 속에서 농노제도의 끔찍한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한편, 농노제를 정면으로 비난하면서 농노해방을 주장하여 러시아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라디시체프에게 '푸가초프보다 더 나쁜 놈'이라면서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후 그는 감형되어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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