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인민 속으로··· 러시아

구름위 2014. 9. 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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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 운동(1873년 ~ 1875년)

 

 

농노해방선언을 읽는 사람들(미야소예드프작, 1873년)
1873년 후반부터 많은 학생과 청년지식인이 "인민에게 진 빚을 갚자"며 농촌에 뛰어들었다.
 
1873년부터 1875년 사이에 많은 청년들이 '브나로드'(인민 속으로)의 기치를 들고 농촌으로 갔다. 인민들의 노동과 그들이 겪는 고통에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던 수천의 학생과 인텔리겐치아가 이 운동에 동참하여 자신의 열정을 불살랐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들의 뜨거운 선전에 침묵으로 답했다. 열풍이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청년들은 치밀한 준비와 조직의 중요성을 깨닫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브나로드' 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된 인민주의는 게르첸의 이념에서 비롯됐다. 자유와 정의를 몹시도 사랑한 게르첸은 유럽 혁명의 붕괴와 프랑스와 영국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비애와 적개심을 갖고, 러시아는 서유럽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초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러시아의 농촌에서 정의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무지하므로 굳은 신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일깨우고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농민공동체의 전통을 살려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체르니셰프스키에 의해 더 구체화됐다. 그는 자유란 그것을 즐길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에 자유보다 사회주의가 더 먼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86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가 특수한 경로로 사회주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인텔리겐치아와 학생들 사이에 폭넓게 확산됐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후에 '나로드니키'라 불렀고, 그들의 사상을 인민주의(나로드니체스트보)라 했다.

 

나로드니키에는 크게 세 부류가 있었다. 첫째는 라브로프의 영향을 받은 선전주의자들로서, 끈기 있게 인민에게 교육과 선전을 베풀어 인민들의 의식을 일깨운 후에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민 전체의 의식을 고양시키면서 인민들 사이에서 혁명의 지도자를 만들고자 했다.

 

둘째는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선동을 통해 인민봉기를 이끌어내려는 부류다. 이들 봉기주의자는 인민은 본디 사회주의적이고 항상 사회혁명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인텔리겐치아의 임무는 그러한 불만과 항의들을 거대한 흐름으로 엮어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셋째는 트카초프의 영향을 받아 혁명적 소수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들로서, 인민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혁명적 엘리트들을 조직, 전제체제를 타도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1870년대 들어 인민주의자들의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나탄손이 조직한 차이코프스키 단이다. 여기서 향후 러시아 사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다수 배출됐다. 나탄손의 체포 후 중심 인물이 되는 차이코프스키는 이후 신비종교에 빠져 운동에서 이탈하지만, 크라프친스키, 크로포트킨, 페로프스카야, 신녜구프, 클레멘츠, 로파친, 티호미로프, 크릴로프, 코발스카야, 코르닐로바 등이 70년대 러시아 혁명운동사에서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다.

 

1871년에 조직의 틀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도 학습과 연구에 정진하면서 다량의 국내외 서적과 논문을 확보하여 학생들 사이에 배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자신들이 직접 소책자를 써서 만들기도 했다. 1872년 여름, 이들은 노동자들에 눈을 돌렸다. 이들은 주로, 농촌과의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던 방직공장 노동자들에게 접근하여 선전작업을 수행했다. 농민들 속으로 파고들어 활동할 인자들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1873년 말까지 핵심단원들이 모두 체포되고 만다.

 

지방에서도 여러 조직이 활동을 시작했다. 돌구신이 이끄는 조직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활동무대를 옮겨가며 소책자를 비밀 출판하고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선전을 행했다. 1873년에는 남부의 오데사에 자슬라프스키가 지도하는 남러시아 노동자동맹이 생겨났다. 그와 더불어, 학생과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이자는 거대한 흐름이 형성돼갔다.

 

1873년 6월 알렉산드르 2세는 스위스에 유학 가 있던 청년 남녀들에게 학업을 중지하고 즉시 귀국하라는 칙령을 발동했다. 유학생들이 망명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혁명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정보가 제국의 정보기관을 통해 차르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서유럽 사회의 진보된 모습을 관찰하고 혁명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유학생들의 귀국은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가고 있던 '인민 속으로' 주장에 불을 지폈다.

 

1873년 후반부터 많은 학생과 청년 지식인이 "인민들에게 진 빚을 갚자"는 주장에 공감하여 농촌에 뛰어들었다. '브나로드' 운동이 절정에 이른 1874년 여름에는 줄잡아 4,000명 이상의 청년이 인부나 제화공 · 목수 · 방물 장수로 가장하고 발이 부르터지도록 마을 마을을 돌아다니며 러시아의 현실을 말하고 사회주의와 혁명을 선전했다. 일부는 다소 안정된 일거리를 찾아 농민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농민들의 계몽과 교육에 힘을 쏟으며 차리즘에 대한 저항을 고취했다.

 

바쿠닌을 따르는 다수의 청년은 농민들에게 즉각 봉기를 호소했고, 라브로프를 따르는 청년들을 농민들과 농민공동체에 속한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육과 선전을 통해 미래의 혁명 지도자들을 만들어내고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농민들의 무관심과 냉대, 불신과 의구심이었다. 때로는 적대감을 가지고 당국에 고발까지 했다. 정부는 무조건 체포로 이에 대응했다. 체포를 면한 청년 남녀들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고 도시로 돌아온다.

 

1876년까지 모두 4,000명의 청년이 체포되면서 '브나로드'의 열풍은 가라앉았다. 이중 770명이 약식재판에 부쳐져 265명이 구금됐고, 1~4년간의 미결수 생활에서 다시 70여 명이 병에 걸려 죽고 미쳐 죽고 자살했으며, 마지막 남은 193명이 1877년에 정식재판에 부쳐져 유죄판결을 받는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한 장면인 '브나로드'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나, 대의에 몸을 던지는 그들의 놀라운 용기와 헌신성, 그리고 그들의 범한 오류까지도 이후의 운동에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러시아 혁명운동의 요람'이었던 '브나로드' 운동을 거치며 러시아의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