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추락하는 러시아 제국

구름위 2014. 9. 1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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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1904년 ~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재빨리 조선을 장악한 일본군이 평북 의주 부근에서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배, 차르 정부의 약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혁명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지던 때에 러시아 제국의 파탄을 앞당기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팽창정책이 마침내 동양의 신흥강국 일본과의 충돌을 가져온 것이다.

 

서양문물을 재빨리 흡수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이제 대륙으로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종이호랑이' 중국을 꺾고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역시 만주진출을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 · 독일과 손잡고 간섭을 해오는 바람에 일본은 분루를 삼켜야 했다.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은 일본은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기세가 오른 러시아는 승승장구하며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조선에서는 아관파천 후 압록강 ·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내고, 조선에 군사 · 재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만주에서는 질곡에 빠져 있던 청을 구슬려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남만지선의 부설권을 따내고, 뤼순을 조차하여 요새로 만들었다.

 

1900년 청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건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중국 전역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동청철도와 남만지선도 많이 파괴됐다.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에 출병한 러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만주를 점령해버렸다.

 

긴장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압력을 넣었다. 러시아는 이에 세 차례로 나누어 만주에서 철병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2차 철수를 눈앞에 둔 때에 러시아 정부 내에 변화가 일어났다. 온건파 비테의 강력한 정적인 플레베가 내무장관에 취임하는 등, 무모한 강경론자들이 득세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주지배를 관철하려는 비테의 주장이 밀려난 것이다. 1903년 중엽에는 강경파 베조브라조프가 실권을 장악하고 알렉세예프가 극동총독이 되면서 문제의 해결이 더욱 복잡해졌고, 이어 국제적인 안목이 있는 비테가 해임됐다.

 

1903년 7월 일본의 제의로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권을 가르려는 러일 교섭이 시작됐으나, 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이 지나쳐 끝내 합의에 실패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낙관하지는 못했으나, 당시 마무리 단계에 있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된 후에는 승산이 더 희박해진다는 판단 아래 전쟁을 적극 추진했다. 1903년 말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

 

상황이 전쟁으로 치달아가자 러시아의 차르 정부는 임박한 혁명의 불길을 전쟁으로 끄려는 생각에서 모험의 길을 택했다. 차리즘의 계산으로는 일본에 손쉽게 승리를 거둬들여 새로운 식민지와 시장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전제권력의 위엄을 높여 혁명세력을 분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04년 1월 26일 일본해군이 랴오둥(遼東) 반도의 뤼순(旅順)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개전 초부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붙였다. 세계는 일본군의 뛰어난 전투능력에 크게 놀랐다.니콜라이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온 일본군을 맹비난하면서 국민들에게 전쟁에의 적극 참여를 호소했다. 그러나 먼 극동, 러시아 령 밖에서의 전쟁은 설득력이 약했다. 차르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극동지방의 전쟁에 대비를 못한 채 전쟁에 돌입한 러시아는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유럽 쪽에서 증원군이 도착한 후 반격을 개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크로파트킨 육군장관이 총사령관이 되어 극동으로 향했고,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물자를 계속 실어날랐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환바이칼 구간은 여름에는 배로, 겨울에는 얼음판 위로 건넜다. 그로 인해 수송에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러나 유럽 러시아에서 온 증원군도 전세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1904년 8~9월에 벌어진 랴오양(遼陽) 회전에서 러시아군은 일본에 패퇴했고, 포위 속에 진지를 사수하던 뤼순 요새마저도 157일 만인 12월 20일에 무너지고 말았다.

 

러시아군의 잇따른 패배는 국내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민심은 완전히 이반됐다. 1, 2월에는 러시아 전역에서 대규모 철도파업이 일어나 시베리아 철도의 군용물자 수송도 큰 차질을 빚었다. 각지에서 반정부 시위와 반란이 줄을 잇고 소수민족 거주지에서 반러시아 운동이 고조되어, 이들 지역에도 믿을 만한 부대를 보내 치안을 유지해야 했다. 개전 당시부터 전쟁에 반대해온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안팎으로 곤경에 처한 가운데 러시아군은 1905년 2~3월의 봉천회전에서 또다시 패퇴했다.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갔다. 러시아는 발트 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항진해가던 발트 해 함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발트 해 함대마저도 5월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함대에 의해 궤멸했다.

 

국내에서는 혁명이 더욱 고조되어, 이제 농촌에서까지 반란이 일고 군대마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차르 정부는 국내치안의 회복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전쟁종결을 결정지었다.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노리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미국 북동부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이 열렸다. 일본이 배상금과 사할린 북부의 할양 요구를 철회하면서 8월 23일 강화가 맺어졌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 · 일의 각축 속에 가까스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은 또한 랴오둥 반도와 남만 지선 철도를 차지하면서 남만주를 세력권 안에 넣고 사할린 남부도 얻었다.

 

러시아 제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제체제하 러시아의 후진성과 취약성, 권력의 부패상을 다시 한 번 드러내준 전쟁이었다. 그러나 차르 정부에게 전쟁의 패배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다. 불붙은 혁명이 온 러시아를 뒤흔들며 권력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차르의 환상은 깨어지고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905년 1월 9일, 동궁 광장에서 노동자들의 평화시위에 발포함으로써 '피의 일요일'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이후 혁명의 불길에 휩싸여 들어간다.
 
러일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허약함과 차리즘의 반민중적 본질을 명백히 드러내었다. 물가의 급등, 지나친 군대동원으로 근로대중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국민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차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가리고 있을 뿐, 차르는 진실하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1904년 7월 내무장관 플레베가 암살당한 후 차르 정부는 자유주의자 미르스키를 후임으로 앉히고 탄압정책을 약간 완화했다. 젬스트보 의원이 중심이 된 자유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일련의 정치집회를 열고 헌법제정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여러 개의 전문 직업인 조합은 '조합의 조합'을 결성하고 밀류코프의 지도 아래 적극적인 주장을 펼쳤다. 사회혁명당은 반동관료들을 차례로 암살하는 한편, 농민들을 선동하는 데 주력했다.

 

사회민주당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역량을 집중시켜 혁명 프로그램을 전파했다. 전국에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하는 속에 1904년 12월 카스피 해 연안의 석유산업 도시 바쿠에서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를 함께 내건 강력한 파업이 일어났다. 5만의 노동자가 참여한 바쿠 파업은 9시간 노동, 임금인상, 파업기간 중 임금지불, 노동자대표의 승인 등을 포함하는 러시아 노동운동사상 최초의 단체협약을 얻어냈다. 이 무렵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대가 강화되어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에 학생들이 적극 가담하는 전통이 세워졌다.

 

차르 정부는 혁명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혁명세력으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주바토프의 관제 노동자 조직은 1903년 조직의 일부가 파업에 가담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주바토프는 해임됐다. 1904년에는 정교회의 사제 가폰이 경찰의 협력을 얻어 만든 '페테르부르크 공장노동자 모임'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갔다. 통칭 '가폰 조합'은 경찰 감시하에 가폰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강연회 · 음악회 등의 계몽사업을 펼치는 어용조직이었다. 그러나 그해 말 1만 명에 이른 '가폰 조합' 노동자들의 요구가 서서히 경찰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12월 말, 1만 2,000명의 노동자를 가진 페테르부르크 최대의 금속기계 공장 푸틸로프 공장에서 작은 항의가 일어 가폰 조합원 4명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12월 27일부터 가폰 조합 노동자들이 연일 집회를 열어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했다. 집회에 참석한 사회민주당원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발전시켜갔다.

 

1905년 1월 3일, 푸틸로프 공장의 전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초과근무 폐지, 임금인상, 노동자대표 인정, 해고는 노동자대표들과의 협의를 거칠 것 등을 공장주에게 요구했다. 공장주는 요구를 거부했다.

 

1월 4일에는 프랑스 러시아 조선소, 5일에는 네바 조선 · 기계공장이 8시간 노동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6일까지는 파업이 전시로 확대되어 450여 공장 11만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했다.

 

가폰은 대중들의 소박한 차르 숭배심을 기반으로 차르에게 직접 경제적 요구를 탄원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심의과정에서 정치적 요구가 전면에 내세워졌다.

 

1월 8일 아침, 가폰은 차르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차르의 신성 불가침을 약속하면서 내일 아침 인민 앞에 나서서 차르를 믿고 있는 백성들의 청원을 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사제 가폰이 이끄는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하고자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겨울궁전으로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이 들고 가는 청원서는 이런 문구로 시작됐다.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저희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여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이제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청원서는 이어, 제헌의회 소집, 정치 · 종교사범 대사면, 보통교육실시, 언론 · 출판 · 집회 · 종교의 자유, 농민에게의 단계적인 토지이전, 합당한 표준임금 제정, 8시간 노동제, 노동조합 설립 및 노동쟁의의 자유 등을 요구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폐하, 인민들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당신과 당신의 신민을 가르는 벽을 깨부수십시오. 저희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시면 러시아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희는 바로 이 자리, 궁전 앞 광장에서 죽어버리겠습니다. 저희에게는 오로지 두 갈래 길밖에 없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냐, 무덤으로 가는 길이냐."


시내 곳곳에서 시작된 행렬은 겨울궁전 앞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광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르가 아니라, 바리케이드와 무장한 군대였다. 행렬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총성이 광장을 뒤덮었다. 노동자들의 피가 새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기마대가 노동자와 시민들을 뒤쫓으며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렀다.

 

1월 9일 하루 동안 페테르부르크에서 1,000여 명이 죽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이날은 '피의 일요일'로 불리게 된다.

 

"우리에게 이제 차르는 없다!"
"전제를 타도하자!"

 

분노의 함성이 온 나라를 진동시켰다. 차르에 대한 신뢰는 죽었다. 노동자들은 피로써 차르 권력의 실체를 확인했다.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와 군대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모스크바에서 총파업이 시작됐다. 13일 리가에서 벌어진 파업과 시위에서 또 70여 명이 죽었다. 항의파업과 시위가 전국에 소용돌이쳤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