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붙는 혁명운동(1912년 ~ 1914년)
스톨리핀의 반동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는 겉보기에 평온을 유지했다. 노동자들의 파업도 수그러들었고 농민폭동도 한풀 꺾였다. 온 러시아에 반동의 칼날이 번득이는 사이로, 부르주아 입헌체제에 대한 환상이 싸움에 지친 민중들 속을 파고들어 와 혁명의지를 갉아먹어 갔다.
혁명가들도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다. 많은 활동가들이 곤욕을 치르고 투옥되고 유형지로 쫓겨났다. 남은 사람들도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소시민적 지식인과 분명한 의식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해갔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방조직은 거의 괴멸됐다.
사상적인 혼돈도 심해졌다. 사회민주당의 두 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알력이 심해지고, 사회혁명당도 좌파와 우파로 분리되면서 사실상 해체돼버렸다.
혁명의 퇴조기를 맞아 멘셰비키는 완전히 사기를 잃었다. 조직이 붕괴하면서 여러 파로 갈라진 그들은 혁명강령과 슬로건을 방기하고 노동자들을 향해 지배계급과의 협정과 화해를 호소했다. 세는 비록 줄었으나 조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볼셰비키만이 혁명 강령을 그대로 견지해나갈 수 있었다. 볼셰비키는 지하당을 청산하고 합법적인 조직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멘셰비키 내 청산주의자나, 반동의회로부터 사회민주당 의원을 불러들이자고 주장하는 볼셰비키 내 소환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당을 굳건히 지켜 다가올 혁명에 대비했다.
스톨리핀은 자신의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20년간의 평온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년간 인민대중이 투쟁을 포기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어야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영광과 시련을 겪은 인민대중이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차르 정부에게 '20년간의 평온기'를 갖다줄 리 없었다.
1910년 중반부터 러시아에 새로운 정세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체됐던 산업이 다시 고양되기 시작한 것이다. 매년 석탄과 철의 채굴량이 증가하고 선철과 철강의 생산량이 늘어났으며 직물과 설탕의 생산도 점차 늘었다. 노동자의 수도 점점 늘어, 1913년에는 공업노동자만도 350만이 됐다.
그와 함께 생산과 자본과 노동의 집중이 더욱 심화됐다. 거의 모든 산업이 자본가나 자본가 연합의 독점하에 놓였고,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종업원 500명 이상의 기업에 고용되어 세계 최고의 집적도를 보였다. 은행의 힘도 막강해져 금융 과두제가 국가경제를 지배했다. 외국자본의 유입도 크게 늘어, 주식회사와 주요 은행 고정자본의 30~40%, 그리고 석탄 · 석유 · 금속 등의 주요산업이 유럽 자본가들에게 장악됐다.
러시아와 유럽의 극소수 대자본가는 부유해지고 러시아 민중은 궁핍해졌다. 국민소득의 3/4은 얼마 안 되는 지주 · 자본가 · 부농이 차지했고, 국내에서 먹고 살기 힘든 근로인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물가가 폭등하고 노동자들의 상태는 악화됐다. 노동자들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자본가를 위해 일했다. 농민대중도 파탄지경을 헤맸다. 스톨리핀 농업정책의 결과로, 소수의 지주와 부농은 부유해진 반면에 농민대중의 삶은 영락했다. 빈농과 부농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농민들을 유럽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 이주시켜 농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길을 따라 발전하고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선진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농노제의 유산, 인민대중의 빈곤과 억압이 생산력의 발달을 저해했다. 1905년 혁명으로 크게 고양된 대중들의 의식도 낡은 체제와 양립하기 힘들었다.
대중들이 다시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1910년 여름부터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정치집회와 시위가 늘어갔다. 지주와 부농에 대한 농민들의 투쟁도 다시 시작됐다.
1912년 1월 프라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협의회는 대중들의 혁명적 분위기가 솟구쳐 오름을 확인하고, 민주공화제, 8시간 노동제, 지주토지 몰수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들 사이에서의 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볼셰비키와 소수 '당 유지파' 멘셰비키만이 모인 이 협의회에서는 또, 1907년 이후 사실상 소멸한 당 중앙위원회를 볼셰비키만으로 재구성했다. 이로써 볼셰비키는 당내의 다른 분파들과 완전히 갈라져 독립된 당을 이루었다.
1912년 4월 4일, 새로운 혁명을 재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베리아 밀림 속 레나 금광에서 군대가 파업노동자들에게 발포하여 500여 명이 죽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서 노동자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대규모 파업과 집회와 시위가 시작됐다. 30만 노동자가 항의파업에 가담했고, 이어 메이데이 파업 때에는 40만 노동자가 참여했다.
레나 금광 발포사건의 희생자들
1912년 가을, 제4두마의 선거가 치러졌다. 이번 선거에서도 10월당이 제1당이 되고 다른 우익정당들의 의석도 늘어 우익세력이 절대 과반수를 차지했으나, 10월당원 중 절반 이상인 150명이 좌익 10월당을 결성하여 온건 반대세력인 카데츠와 제휴함으로써 정부의 운신폭은 제3두마 때보다 좁아졌다.
한편,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 등급이 따로이 자기네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던 6개 공업 현에서는 모두 볼셰비키 후보가 당선됐다. 멘셰비키는 비공업 현에서 7명의 의원을 냈다. 제4두마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의원단을 구성하여 예리한 질문으로 각종 사건들을 사회문제화하고, 차리즘과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실태를 폭로하여 대중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소시민들과 일부 자유주의 세력을 민주투쟁의 대열로 끌어들이는 데 일조했다.
노동운동은 계속 발전했다. 1912년에는 100만 명 이상, 1913년에는 127만 명, 1914년 전반기에는 15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 계급은 다시 차리즘과 자본가들에 대해 적극공세를 취했다.
농민들의 움직임도 격화됐다. 1910년부터 1914년 사이에 1만 3,000건 이상의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군대도 다시 동요했다. 1912년 7월 투르케스탄에서 공병대의 무장반란이 일어났고, 발트 함대와 흑해 함대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1914년에 들어서면서 노동운동의 물결이 러시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1월 9일 1차혁명 기념일 파업이 끝나자, 그 뒤로 곧 여성노동자 대량중독 사건에 대한 항의파업이 이어졌다. 새로이 제정된 노동자보험법에 따라 3월에 치러진 노동자위원 선거는 혁명파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국에서 50여 만의 노동자가 참여한 메이데이 파업이 끝나자, 바쿠 노동자의 총파업과 동정파업이 다시 전국을 휩쓸었다.
7월 3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집회에 경찰이 발포를 했다. 전국에 유혈 제재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7월 4일에는 9만, 7일에는 13만, 11일에는 20만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고, 마침내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당국의 탄압과 전쟁준비에 항의했다. 모스크바 등지에서도 파업이 시작됐고, 페테르부르크와 로지에 바리케이드가 나타났다. 페테르부르크는 이제 군대의 야영장으로 변해갔다.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끈 것은 군대와 경찰의 힘이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는 혁명의 위협을 뒤로 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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