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구름위 2014. 9. 1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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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훈시하는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총사령관으로서 물자와 장비가 부족한 상태로 수백만 국민을 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다.
 
1914년 7월 15일(신력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더 많은 식민지와 시장을 확보하려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충돌이 급기야 세계규모의 전쟁을 불러온 것이다. 열강 중에서도 독일의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호전적이었다. 독일은 19세기 종반 이래 고속성장을 계속하여 몇몇 분야에서 이미 최강국이던 영국을 앞질렀으나, 뒤늦게 경쟁에 뛰어든 탓에 식민지를 많이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외감을 느낀 독일은 세계 재분할의 의지를 굳혀갔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에 열강 간의 합종연횡이 진행됐다. 1880년경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었다. 이에 맞서 러시아와 프랑스,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접근하여, 20세기 초 3국협상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유럽에 서로 적대하는 두 제국주의 진영이 형성됐다.

 

혁명운동의 위협도 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 후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한 강대국의 정부들, 특히 러시아의 차르 정부는 인민대중의 관심을 혁명에서 전쟁으로 돌리고자 했다.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당시 발칸 반도는 독일 중심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중심의 범슬라브주의, 투르크와 발칸의 여러 나라, 불가리아와 발칸의 다른 나라들, 오스트리아 · 헝가리와 세르비아 등등의 대립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말 그대로 '유럽의 화약고'였다. '사라예보 사건'은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한달 후, 발칸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나라와 그 동맹국들이 싸움에 휘말려 들어갔다.

 

7월 15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세르비아의 보호국을 자처하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어 독일이 7월 19일 러시아에, 7월 21일 프랑스와 벨기에에 전쟁을 선언했다. 이에 맞서, 영국과 그 동맹국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바야흐로 세계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를 축으로 하는 중부 유럽의 동쪽과 서쪽, 발칸 반도, 그리고 각지의 독일 식민지에서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후 3국동맹에서 탈퇴하고 연합국에 가담했다. 대신, 연합국 내 몇몇 나라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투르크와 불가리아가 전쟁의 와중에서 추축국에 가담했다.

 

서부전선은 독일군이 전격전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북동부를 손에 넣은 후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후 3년 동안 많은 사상자를 내며 참호전을 계속했으나 전선의 이동거리는 20㎞를 넘지 못했다.

 

동부전선에서는 한동안 독일과 러시아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914년 말 심각한 군수물자 부족을 겪던 러시아의 열세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군화가 없어 동상에 걸리고 외투와 내의가 부족하여 감기에 걸린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1915년 초여름, 갈리치아와 폴란드가 독일군에게 넘어갔고, 이어 벨로루시와 발트 연안 일부에까지 독일군이 진주하면서 전선이 교착됐다.

 

모든 국가의 부르주아 정당은 국민들에게 전쟁 지지와 조국방위를 호소했다. 독일에서는 러시아의 전제군주가 독일인민의 민주적 성과를 일소하려 한다고 비난했고, 프랑스에서는 독일 제국주의가 프랑스 민주주의를 유린하려 한다고 선전했으며, 러시아에서는 독일인이 러시아를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국민들에게 전쟁의 목적이 국민을 구하는 데 있다고 거짓 선전했다.

 

제2인터내셔널에 속한 사회주의 정당들도 거의 모두가 노동자의 이익을 저버리고 조국방위라는 미명하에 전쟁을 지지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리더를 자임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정부의 전시 기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 · 영국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는 나아가 반동적인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까지 했다.

 

러시아에서는 멘셰비키 의원단까지도 전시 기채에 반대했다. 그만큼 러시아 노동자 계급의 반전 감정은 강렬했다. 그러나 멘셰비키의 주류는 그 후 조국방위전쟁 지지로 돌아섰다. 사회혁명당도 좌파 일부를 빼고는 전쟁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전쟁 발발 전까지 제국주의 전쟁 반대 결의를 해온 제2인터내셔널은 스스로의 결의를 백지화하고 붕괴해버렸다. 혁명투쟁을 거부하고 계급협조 정책을 펴오던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전선이 날카롭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 기회주의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부르주아 정부의 약탈전쟁을 지지하여 국민들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넣고, 자기 나라 인민들에게 다른 나라 인민들을 살육하도록 부추겼다.

 

그 와중에서도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일관되게 반전 입장을 취했다. 두마의 볼셰비키 의원단은 전쟁에 극구 반대하여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볼셰비키는 나아가, 인민의 이익에 배치되는 부정한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유도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 내전으로 전화하자고 주장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사회민주당, 독일의 일부 사회주의자도 줄곧 전쟁에 반대했으나 내전으로의 전화 슬로건까지는 내걸지 않았다. 이들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1915년 짐머발트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서 '짐머발트 좌파'를 이룬다.

 

전쟁은 전투에 직접 참여한 병사들은 물론 근로인민 전체에게 기아와 추위와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러시아의 국민경제는 붕괴됐고 주민의 필요는 충족되지 못했다. 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물가는 급등한 데 반해 임금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자본가는 전쟁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었고, 전쟁으로 인한 온갖 재난은 인민대중이 송두리째 짊어졌다. 독일군 점령지를 탈출한 수백만 난민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극에 달했다. 인민들 사이에서 전쟁과 차르 전제에 대한 불만이 점점 격화됐다. 이번에도 노동자들이 선두에 나섰다. 1915년에는 전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50만여 노동자가 파업에 가담했다. 군대 내에도 많은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고, 항명과 소요와 반란, 적병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레닌은 이 시기에 〈제국주의론〉을 집필하고 〈국가와 혁명〉을 구상하면서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분석하고 혁명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혁명적 정세의 주요 징후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1. 지배계급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지배를 계속할 수 없게 되는 것
2. 근로대중의 결핍과 빈곤이 평상시보다 더 심화되는 것
3. 지배계급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매우 높아지는 것
4. 지배계급 타도를 위해 일어설 능력 있고 결의에 찬 전위계급과 당의 존재

 

전쟁은 러시아에서 혁명적 정세를 만들어냈다. 전쟁은 엄청난 인명과 물자를 소진하고 있었다. 1916년 말까지 500만이 넘는 병사가 죽거나 다쳤고, 막대한 동원으로 국민경제는 파탄났다. 거의 전 국민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혐오했고, 반전감정은 차르 정부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동운동은 급속히 고양되어 1916년에는 100만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병사들의 탈영과 항명과 소요도 빈번해지고 광범해졌다. 농민들의 소요도 잦아지고 과격해졌다. 1916년 중엽에는 후방근무 동원령에 반발하여 중앙아시아 민족들 사이에서 수백만이 가담하는 거대한 봉기가 일어났다.

 

지배계급 내에서도 갈등이 격화됐다. 1915년 8월, 카데츠 · 10월당 · 진보동맹 등이 결집하여 두마 내에 절대 다수 세력을 형성한 '진보 블록'이 국민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신임내각'의 구성과 온건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차르는 이를 무시했다. 젬스트보 연합과 도시 두마 연합도 '책임내각'을 요구했다. 정부는 분해상태에 빠져들었고, 그 틈을 타고 황후와 요승 라스푸틴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1916년 12월 라스푸틴은 황족과 우익세력에게 암살당했고, 지배층 내에서조차 황실의 권위가 급전직하하면서 쿠데타 모의가 몇 갈래로 진행됐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한걸음 빨랐다. 1917년에 들어 하루하루 파업의 물결이 높아갔다. 1월에는 25만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고, 2월에는 40만여 명이 파업에 가담했다. 병사들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다. 수도(전쟁 발발 후 독일식 이름 '페테르부르크'를 버리고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는 점점 무정부 상태로 변해갔고 정부는 수습능력을 잃어버렸다. 정세는 이제 혁명의 외길로 치달아 갔다.

 

로마노프 왕조 몰락의 에피소드 하나

 

요승 라스푸틴의 전횡(1915년 ~ 1916년)

 

 

                   그레고리 라스푸틴이 궁전에서 두 귀부인 사이에 앉아 있다.

                   그는 '성자'로 불리며 알렉산드라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조가 망할 때에는 여러 가지 조짐이 나타난다. 경제가 파탄나면서 민심이 이반되고 충신이 제왕의 곁을 떠나며, 어리석은 신하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횡행한다. 우유부단한 왕은 다가오는 위기를 보지 못하고 간신들에게 정사를 맡긴 채 부질없는 일에 탐닉한다. 백성들 사이에는 온갖 풍문이 꼬리를 물고, 뜻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후일을 도모한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허약하기 짝이 없던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일로로 몰고 가는 요인들이 착실하게 성숙해갔다.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면서 경제는 파탄나고 국민들은 큰 괴로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막대한 이윤을 챙긴 자본가와 그에 미혹된 정치가들은 '조국방위의 성전'으로 국민들을 계속 내몰았다. 대중들 사이에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정부와 황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당시 황실을 지배한 사람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아니었다. 무능하고 심약했던 차르 뒤에는 드세고 편협한 황후 알렉산드라가 있었고, 황후 뒤에는 그녀가 신처럼 떠받드는 요승 라스푸틴이 있었다.

 

패전이 계속되던 1915년 여름, 황후와 라스푸틴은 자신들을 견제해온 총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라고 차르에게 간언했다. 8월 23일, 많은 각료들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차르는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틀 뒤인 8월 25일,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진보 블록'이 차르에게 신임내각의 구성과 온건한 개혁을 요구해왔다. 차르는 '진보 블록'과의 협조를 진언하는 몇몇 각료의 말을 무시하고 이 요구를 거절했다. 자유주의자들과 협조할 수 있는 기회도 팽개쳐버리고 충언을 하는 신하들까지도 내쳐버린 차르는 이후 황후와 라스푸틴에게 점점 더 의지해갔다. 총사령관이 된 차르는 수도를 비우고 전선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라스푸틴은 충실하기 그지없는 여신도인 황후를 등에 업고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차르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황후를 시켜 차르에게 편지 한 장만 띄우면 그만이었다. 1916년 12월 말 암살될 때까지 라스푸틴은 사실상 러시아의 황제나 다름없었다.

 

라스푸틴은 본디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으로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 수도원을 전전하는 '돌중'이 됐다. 그의 종파는 최면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흥종교였다. 그는 1904년에 페테르부르크로 와 점잔 빼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얻었고, 마침내 황후 알렉산드라까지도 사로잡았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사이에는 뒤늦게 얻은 알렉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후는 알렉세이를 끔찍이도 아꼈다. 알렉세이는 황후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어머니 쪽에서 독일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황태자는 많은 유럽 왕실을 괴롭히던 혈우병에 걸려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조그만 상처가 종창으로 발전할 때마다 알렉세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의사들도 혈우병체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라스푸틴이 최면술을 걸어 알렉세이의 병을 '치유'했다. 라스푸틴의 '처방'이 어떻게 먹혀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알렉세이는 그 후 크게 괴로워하는 일이 없었고, 라스푸틴은 황후에게 살아 있는 성자가 됐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이제 막강한 권세를 얻었다. 심약한 니콜라이 2세는 매사를 대가 센 아내의 뜻에 따랐고, 황후는 매사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했다. 라스푸틴은 황후와 황제에게 '우리의 친구'가 됐다.

 

1910년경 라스푸틴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라스푸틴은 궁정에서는 매우 정중하게 행동하고 농민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보여주었으나, 밖에만 나오면 '개'였다. 그는 어리숙한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수상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황후에게 밀려 실패하고 얼마 안 있어 암살당했다.

 

라스푸틴의 권세는 이제 하늘을 찔렀다. 모두들 황후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은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1915년 초가을 차르가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으로 출동하면서 러시아는 이제 라스푸틴의 것이 됐다.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이 라스푸틴과 교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돌아갔고, 며칠이 멀다하고 내각이 해산되고 개각이 이어졌다. 장관들의 목숨과 주요정책의 방향은 이제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라스푸틴은 또한 꿈에 계시를 받았다며 황후를 통해 전선의 차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후는 차르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성자'의 조언을 전했다.

 

"우리의 친구가 식량공급은 걱정 말랍니다. 다 잘될 거라는군요."
"우리의 친구가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지 말라고 합니다. 손해가 더 클 거래요."

 

수도의 거리에 황후와 라스푸틴의 관계를 조롱하는 벽보가 나붙고, 둘이 동침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두 사람이 독일과 결탁하여 단독강화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도 횡행했다(라스푸틴 일파는 실제로 독일과 강화하여 왕조를 유지하고자 공작을 폈다). 마침내 대황후가 전장으로 달려가 차르에게 수도 귀환을 청했으나, 차르는 라스푸틴이 '신께서 보낸 성자'라면서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일반대중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1916년 가을, 위기가 깊어지면서 대중들의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졌다. 자본가들 사이에 쿠데타 움직임이 싹트고, 황실과 귀족사회 한구석에서까지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위기를 느낀 황실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고자 했다.

 

암살 주모자는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유스포프 공과,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였다. 그들은 평소 라스푸틴이 아리따운 이리나 공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2월 말, 그들은 공주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공주의 초대장으로 라스푸틴을 유스포프의 저택으로 불러냈다. 1층의 '암살실'은 호화롭게 꾸몄고 식탁 위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았다.

 

라스푸틴은 유스포프가 친히 모셔왔다. 유스포프는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곧 내려올 거라면서 그에게 계속 술과 과자를 권했다.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에게 집시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기이한 광경이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견디다 못한 유스포프가 마침내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라스푸틴이 고꾸라지고 2층에 있던 공모자들이 뛰어내려 왔다.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 쪽으로 걸어갔다.

 

푸리슈케비치가 연신 몇 발을 쏘아 라스푸틴을 쓰러뜨렸다. 공모자들은 밧줄로 시체의 양손을 묶어,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사흘 뒤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됐다. 손을 묶은 밧줄은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사인은 독에 중독돼 죽은 것도 아니고 총 맞아 죽은 것도 아닌, 익사였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죽었고, 살인자들은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라스푸틴을 제거해 황실을 구하려는 암살자들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니콜라이 2세는 이제 가족들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에 묻혀 혁명의 전조를 외면했다. 어느 정도 사태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라스푸틴은 차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었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나의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 동안 그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자가 폐하와 친척 관계인 사람이라면, 폐하의 자녀와 친척 어느 누구도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연일 파업과 시위가 계속됐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두 달 남짓 후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온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제정 러시아의 붕괴

 

2월혁명(1917년)

 

2월 23일(신력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르크 지구의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 시위대, 다리 건너 시내 중심부 진입 시도. 다리에서 경찰에 저지됐으나 일부는 얼어붙은 네바 강을 건너 시 중심부 진출. 오후 5시, 본대도 다리 돌파하여 네프스키 대로 행진.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 슬로건은 주로 '빵을 달라'. 파업 참가자는 약 13만.

 

2월 24일. 파업이 다른 구역으로 확대. 21만여 명이 파업에 가담하고 학생들도 개별 참가. 카자흐 병이 출동했음에도 네프스키 대로에서 시위 관철. 슬로건은 '빵'으로 시작하며 '전쟁 반대' '전제 타도'까지 나타남.

 

2월 25일. 파업이 전 도시로 확대되어 총파업 시작. 30만여 명이 파업 참가. 신문도 안 나오고 전차도 운휴. 대학과 전문학교가 수업 거부 돌입.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 격화. 노동자들도 권총과 폭탄까지 사용. 카자흐 병사가 시위대와 함께 경찰을 습격하여 경찰서장 살해.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4명 사망. 슬로건은 '전제 타도'와 '전쟁 반대'였고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도 등장. 저녁때 비보르크 지구의 전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관 모두 도망. 26일 새벽까지 활동가 100여 명 체포.

 

2월 26일(일요일). 오전은 평온했고 낮부터 시위가 시작됨. 오후에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 개시하여 다수 사상. 부상 귀환병으로 구성된 파블로프스키 연대 4중대가 이에 격분,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저지하기 위해 네프스키 대로로 향함. 병영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언했으나 다른 연대의 병사들에게 무장해제 당함.

 

2월 27일. 볼린스키 연대의 교도대, 하사관 지휘하에 출동명령 거부하고 장교를 살해한 후 반란 선언, 근위보병 2개 연대와 공병 제6예비대대도 반란 가담. 병사들이 노동자와 함께 감옥과 구치소를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 석방, 재판소 불타고,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만 정, 권총 3만 정 탈취. 오후 3시경 비보르크 지구의 모스크바 연대, 저녁때 장갑차 부대, 밤에 시 남부의 3개 연대가 반란에 가담. 이날 총 6만 6,700명의 병사가 혁명 편에 섬.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 진압부대를 편성하여 출동했으나 도중에 해체됨. 수도 혁명 승리.

2월 28일. 총 12만 6,700명의 병사가 혁명 편에 가담. 하바로프의 부대는 오전까지 해군본부를 지켰으나 혁명 편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됨. 오후 2시 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귀영하면서 수도의 정부군 최종 붕괴.

 

2월혁명 6일간의 일지다. 2월 14일 두마 개회일에 맞춘 노동자의 파업과 학생들의 시위, 2월 18일 푸틸로프 공장의 파업에 이어, 2월 23일에 비보르크 지구의 방직공업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의 시가행진이 시작됐고,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여성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대는 늘어갔고, 슬로건도 '빵을 달라'에서 '전쟁 반대' '전제 타도'로 바뀌었다.

 

2월 25일 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시위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본격화됐으며, 26일부터 시위대에 공감하는 병사들의 이반이 시작됐다. 27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수도의 거의 모든 병사들이 혁명 편에 가담하면서 제정 러시아는 마침내 무너졌다. 대중봉기에 병사들이 가담하여 2월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끓어오르는 대중들의 열기를 수렴하여 혁명을 진전시킬 기구가 시급히 조직돼야 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수도를 장악한 2월 27일 저녁, 타브리다 궁전에서 공장과 군대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 병사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거리와 광장에서 탄생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전투적인 동맹이 1905년의 경험을 살려 즉각 민중의 권력기관을 구성한 것이다. 1905년과 달리 혁명투쟁에 적극 가담한 병사들이 노동자와 함께 혁명의 양대 지주로서 처음부터 소비에트에 참여했다. 3월 1일, 수도의 병사들은 소비에트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소비에트의 '명령 제1호'라는 문서로 정리, 발표했다.

 

3월 초에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멘셰비키가 대표로 많이 선출됐다. 대부분 농촌출신인 병사들은 사회혁명당의 오랜 뿌리와 포괄적인 주장에 친근감을 느꼈다. 혁명투쟁에 처음 가담한 많은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치열한 전투성보다는 다소 느슨하고 부담없는 멘셰비키가 편했다.

 

페트로그라드 봉기의 승리 소식은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한 달도 못돼 전국의 모든 현과 대부분의 군에 노동자 · 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공업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차르 정부의 판사를 파면하고 새로운 인민판사를 뽑았다. 수비대는 소비에트에 복종했고, 농민들도 뒤따라 농민위원회와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소비에트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수도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노 · 병 소비에트가 조직된 2월 27일 밤, 두마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위원회에 시내의 '질서확립'을 위임했다.

 

위원회는 전선의 니콜라이 2세에게 대표단을 파견했다. 차르는 수도가 위기에 빠진 줄 알면서도 철도노동자들의 봉기로 수도에 접근도 못 하고 있었다. 위원회의 대표는 차르에게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라고 설득했다. 전선의 사령관들도 이 요구를 지지했다.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차르는 3월 2일,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다음 날 미하일은 사태를 파악하고 제위 계승을 거부했다. 3월 4일 니콜라이 2세의 퇴위 칙서와 미하일의 제위 거부 칙서가 동시에 공표됐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와 제정 러시아는 종말을 고했다.

 

두마 임시위원회는 혁명을 더 이상 심각한 상태로 몰고 가지 않으려면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페트로그라드 노 · 병 소비에트와 교섭을 벌였다. 소비에트의 다수파였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자신들의 2단계 혁명원칙에 따라, 두마 임시위원회의 부르주아 임시정부 수립 구상을 지지했다. 그러나 혁명의 승리로 사기충천해 있던 대중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정부에 입각은 않기로 했다.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협정하에 3월 2일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입헌민주주의자로서 젬스트보의 지도자였던 리보프 공이 수상이 됐고, 카데츠와 10월당에서 대부분의 각료가 선출됐다. 사회주의자로서는 트루도비키의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입각했다.

 

이리하여 러시아에는 임시정부와 노 · 병 소비에트의 '이중권력'이 탄생했다.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실행할 수 없었다. 이 이중권력 구조는 빠른 시일 안에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소돼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에게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분명히 전제는 타도됐고 혁명은 성공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엄청난 변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불과 2, 3주 사이에 차르와, 전제정부의 법률가 · 경찰 · 사제 · 지주 · 관료 · 장교 · 고용주 등, 차르 시대의 지배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맛보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조국의 쇄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정녕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러시아의 저 낮은 곳에서는 뜨거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의 목소리, 그네들의 고통과 희망, 꿈의 응어리였다. 그들은 정녕 꿈 같은 사태에 접한 것이다.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가르쳤고, 학생들이 교수에게 새로운 역사강의를 주문했다. 배우들이 극장을 인수하여 다음 대본을 직접 선택했고, 병사들이 성직자를 자기네 회합에 참석시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능력이나 지식으로 사람의 품위를 판정하던 기준도 바뀌었고, 케케묵은 왕권신수설 따위는 까마득한 옛날 얘기가 됐다. 이런 혁명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생을 운동에 몸바쳐온 혁명가들조차도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사태의 흐름을 좌우할 힘도 없었다.

 

"2월에서 10월 사이에 혁명은 밀물이 되어 우리는 그것을 중지시킬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케렌스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다만 사태의 흐름을 올바로 인식하여 물줄기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막힌 곳을 뚫어주는 것, 이것이 혁명가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