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인민의 권력 탄생

구름위 2014. 9. 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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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정부와 제헌의회 해산(1917년 ~ 1918년)

 

 

소비에트 정부 수립
1917년 10월 25일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권력이 확립됐으며, 레닌이 초대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했다.
 
10월혁명의 성공으로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가 탄생했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국내외의 위협을 물리치며 국가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려놓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은 아직 취약했다. 농촌에서는 농민들 대다수가 아직도 사회혁명당을 따랐다. 도시에서는 혁명파 노동자와 병사들의 힘이 강하여 정부의 버팀대가 되긴 했으나, 적지 않은 대중들에게 소비에트가 정부 역할까지 떠맡는다는 것은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다.

 

도망친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와 하루아침에 실권을 잃은 타협파 정당들은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흐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해왔다.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사관생도들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혁명을 승리로 이끈 노동자와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11월 초까지 최초의 반혁명 기도들이 일소됐고, 11월 말에는 카데츠의 반혁명 음모도 분쇄됐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을 수호하고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하는 데 인민대중의 넘치는 힘과 열정에 크게 의존했다. 억압에서 해방된 대중들에게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창조력이 샘솟았다. 수많은 집회에서 대중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고, 크고 작은 모든 기구에서 대중들이 스스로 일을 결정하고 집행했다. 노동자들이 직접 공장을 관리, 운영했고, 농민들이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병사들이 각급 지휘관을 직접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회의 주역임을 자각해갔고, 중앙과 지방의 각급 노동자 · 병사 · 농민 소비에트는 전권을 가진 유일한 국가기관으로 자리 잡아갔다.

 

노동자와 빈농과 병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에 착수했다. 사회주의적 생산과 국민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창설됐고, 지방에도 각급 국민경제회의가 만들어졌다. 노동자와 농민이 이전 지배자들을 대신하여 공장과 각종 기관 · 단체의 관리자 · 조직자로 부상했다.

 

봉건제의 유물도 과감하게 일소했다. 지주의 토지소유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국민이 러시아 '시민'이 됐다. 학교는 교회에서, 교회는 국가에서 분리됐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11월 2일 공포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러시아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평등권을 법령으로 확립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또한 인민의 절실한 경제적 ·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식량이 우선 지급됐고, 노동자 가족들은 음침한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자본가와 지주의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다.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고 노동조건도 개선됐으며, 산업재해와 질병 ·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됐다. 노동자 · 농민과 그 아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학교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됐다. 차르의 궁전과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집회장 · 요양소 · 박물관이 됐다.

 

혁명으로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점점 노동자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소비에트 권력의 중요한 버팀대가 되어갔다. 각급 농민 소비에트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의 세력이 크게 신장됐다. 1917년 11월부터 12월 초에 연이어 열린 농민 소비에트 임시대회와 제2차 전 러시아 농민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혁명당 우파의 기도를 물리치고, 정부의 포고와 정책들을 승인하고 노 · 병 소비에트와의 통합을 결정했다.

 

대회의 요구로 12월에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정부에 입각했다. 이로써 소비에트 정부는 강화되고 볼셰비키는 농민층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에게는 부담스러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혁명운동 초기부터 큰 공감대를 형성했고 2월혁명 직후에 입안됐으나 임시정부가 계속 미뤄온 제헌의회 소집 건이었다.

 

10월혁명 직전에 임시정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11월에 실시하겠다고 공고했다. 의원선출방식은 정당별로 후보자 명부를 작성한 후 득표수에 비례해 당선자를 확정하는 정당별 비례대표제였다. 그때까지 완전히 갈라서지는 않았던 사회혁명당은 좌파와 우파가 함께 단일 후보자 명부를 작성했고, 전국적으로 이름난 우파당원들이 상위번호를 차지했다.

 

10월혁명 성공 후에도 제헌의회의 이념은 대중, 특히 농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제 막 권력을 장악한 소비에트 정부는 대중들의 뜻을 존중하여 예정대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미 제헌의회보다 훨씬 민주적인 소비에트가 구성됐고 부르주아지 공화국보다 더 높은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건설되고 있는 지금, 새삼스럽게 제헌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직접 경험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실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11월 12일,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통 · 평등 · 직접 · 비밀 원칙에 입각하여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개표 결과, 사회혁명당이 40% 득표로 제1당, 볼셰비키가 24%로 제2당이 됐고, 나머지 표는 여러 정당이 나누어 가졌다.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업 중심지, 군 주둔지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은 농촌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반혁명 세력은 제헌의회의 다수파를 등에 업고 설욕전을 준비했다. 사회혁명당 우파의 체르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헌의회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소비에트 권력과 대치시켜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소비에트 권력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의원의 소환권을 도입하고,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제헌의회 문제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에서도 이견이 표출됐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를 혁명의 지주로 삼아 제헌의회를 견인하면서 혁명과업을 이루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백배 천배 더 민주적인 제도"라면서 제헌의회를 중시하는 태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소집도 하지 말고 의회를 즉각 해산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럴 경우 반혁명파들에게 대중선동의 빌미를 제공할 뿐이며 인민들에게 겉치레 민주주의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케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재헌의회 소집 전야인 1918년 1월 4일, 전 러시아 노 · 농 · 병 소비에트 중앙집행위는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은 '러시아는 노동자 · 병사 ·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것,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지리라는 것,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것,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하리라는 것 등을 확인했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가 소집됐다. 중앙집행위 의장 스베르들로프가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심의 · 인준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제헌의회가 혁명적 민주주의의 경로를 선택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제헌의회의 다수파인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제헌의회는 '소비에트의 부속물'이 되기를 거부하고는 사회혁명당 우파가 마련한 별도 법안의 심의에 들어갔다.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은 퇴장했다. 17시간의 지루한 토론이 있은 후 의회는 휴회했다. 그러나 의회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중앙집행위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한 것이다.

 

대중들은 제헌의회의 해산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소비에트 권력과 사회주의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가볍게 길에서 치워졌다. 그러나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제헌의회의 역할을 기대한 소시민 대중과 일부 지식인은 그 조치를 수긍할 수 없었다. 좌파 사회혁명당 외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내전기에 이들 중 일부는 소비에트 정부에 총부리를 들이댄다.

 

볼셰비키와 소비에트 정부는 마침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의 꽃이랄 수 있는 의회를 내쳐버리고 세계 역사 초유의 소비에트 권력을 다져나갔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에 열린 제3차 노병 소비에트 ·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는 제헌의회에 대한 정부의 정책을 승인하고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하여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 소비에트 체제를 정착시켰다.

 

전쟁에서 빠져나오다

 

 

 

브레스트 강화와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1918년)

 

전쟁의 종결은 혁명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2월혁명이 성공한 것도 전쟁에 염증을 느낀 병사들이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나온 데 큰 힘을 입었고, 2월과 10월 사이에도 병사들은 '전쟁 반대'를 외치며 노동자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혁명을 이끌었다. 10월에도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정책에 분노를 느낀 병사들이 일관되게 전쟁을 반대해온 볼셰비키를 지지하여 '무혈' 혁명을 이뤄냈다. 혁명이 성공한 지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익한 제국주의 전쟁은 하루빨리 끝내야 했다.

 

소비에트는 혁명 직후 발표한 〈평화에 관한 포고〉에서 평화 의지를 천명하면서 모든 교전국에게 무병합 · 무배상의 전면강화를 제안했다. 11월 8일 소비에트 정부는 영국 · 프랑스 · 미국정부에 특사를 보내 강화교섭을 시작하자고 호소했으나,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도 평화 요구는 거세어, 영국 · 프랑스 · 미국 ·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반전집회와 시위가 일어났다.

 

독일이 최초로 반응을 나타냈다. 후방과 전선에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지는 데 자극받은 독일정부가 교섭의사를 표명해온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이를 연합국 정부에 전했으나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단독교섭에 착수했다. 교섭은 11월 20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됐다. 강화교섭의 조건으로, 전투 중지, 독일군의 서부전선으로의 이동금지가 합의됐다.

 

독일측이 제시한 강화조건은 가혹했다. 독일정부는 배상금 지불, 독일이 점령한 러시아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이에 인민위원회는 연합국의 교섭 참여를 재차 촉구했으나 다시 묵살됐다. 영국 · 프랑스 · 미국 등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더 이상 형제국이 아니었고, 어떤 면에서는 독일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1918년 1월, 독일은 연합국의 반응을 보고 마침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독일측이 제시한 강화조건의 수락을 요구해왔다. 소비에트 정부는 숙고 끝에 독일의 요구를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측 교섭 전권위원이던 트로츠키는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독일과의 굴욕적인 강화체결은 독일정부의 입지를 강화시켜 독일혁명과 세계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1월 28일(신력 2월 10일),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쟁도, 강화도 하지 않는다. 군 동원을 해제한다"는 희한한 성명을 내고 교섭을 결렬시켰다.

 

2월 18일(1918년 2월 14일(구력 2월 1일)부터 그레고리 력(신력)을 채택했다(이하 신력을 쓴다))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전투를 재개했다. 러시아군은 삽시간에 수십 킬로미터 뒤로 밀렸고, 러시아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졌다.

 

소비에트 정부는 인민들에게 전력을 다해 사회주의 조국을 지켜내자고 호소했다. 이에 정규 적군(붉은군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붉은군대는 프스코프, 나르바, 레베리에서 적위대와 협력하여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려는 독일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점령군과 집요하게 싸웠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단기간에 무너뜨리려는 독일의 계획은 실패했다.

 

볼셰비키 중앙위, 인민위원회,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는 혁명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소수 강경론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독일의 강화조건 수락에 동의했다. 3월 3일, 강화조약이 조인됐다.

 

3월 14일 전 러시아 소비에트 임시대회는 브레스트 강화조약을 비준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은 비준에 반대했고 인민위원회에서도 철수했다. 이로써 정부는 다시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제 볼셰비키는 크게 강화되어, 농민들 사이에서도 사회혁명당 좌우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후 많은 문제에서 정부와 대립하던 사회혁명당 좌파는 7월 6일 독일대사를 살해하고 반소비에트 폭동을 일으키나 곧 진압되고 소비에트에서 축출당한다.

 

브레스트 강화의 조건은 굴욕스러울 만큼 가혹했으나, 국가와 대중에게 긴급하게 요청되고 있던 '휴식'을 가져다주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시기를 이용하여 사회주의적 개조의 실시에 착수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재빨리 은행, 대공업, 철도, 운송 체신업, 외국 무역의 국유화에 착수했고, 차르 정부와 임시정부의 국채와 해외차관을 무효화했다. 생산과 생산물 분배에 대한 통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한다'는 사회주의적 보수의 원칙이 도입됐다. 한편, 3월 6일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는 궁극목표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로 설정하고, 당명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꾸었다. 3월 12일에는 수도가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의 중심인 모스크바로 옮겨져 다시 '모스크바 시대'가 시작됐다.

 

1918년 봄, 소비에트 권력은 독일군에 점령된 서부지역과 카프카스를 제외하고는 이전의 러시아 제국 거의 전역에서 입지를 굳혔다. 7월에 열린 제5차 소비에트 대회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여기서 혁명의 승리, 프롤레타리아 독재형태로서의 소비에트 권력, 모든 민족의 동등한 권리, 토지와 기본적 생산수단의 인민 소유 등이 명확하게 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