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경제부흥과 발전(1946년 ~ 1960년)
2차대전 중 소련은 경제적으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무려 2,500만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전쟁으로 국부의 약 1/3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유럽 러시아, 특히 그 서부지역은 도시와 농촌 모두 반 폐허로 변해 있었다. 서유럽의 경제학자들은 소련경제가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기까지는 적어도 20년이 걸릴 거라고 내다보았다.
종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증폭되면서 '냉전'이 시작됐다. 반히틀러 연합에서 힘을 합쳤던 동맹국들이 사회주의권의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다시 소련에 등을 돌린 것이다. 피해가 덜했던 미국과 서유럽 여러 나라는 소련의 부흥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자들의 예견을 무색케 하면서 소련의 침체를 바라던 자들을 보기좋게 한방 먹였다. 온 국민이 경제부흥에 발벗고 나서, 제4차 5개년계획(1946~1950) 마지막 연도에 벌써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인 것이다.
5개년계획 1년차인 1946년, 소련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혹심한 가뭄으로 농업생산이 격감했고 전쟁이 끝남과 함께 노동규율이 이완되면서 공업생산까지 떨어졌다. 동원에서 해제된 천만여 명의 군인과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됐던 많은 인력들은 재훈련과 적응기간을 필요로 했다.
2년차인 1947년부터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후 재건사업이 계속 호조를 보여, 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 이르러 공업생산은 계획치를 크게 뛰어넘었고, 비교적 부진했던 농업에서조차 전쟁 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4차 5개년계획은 특히 생산재 부문의 성장에 중점을 두어, 투자액의 88%를 생산재에 집중시켰다. 그에 따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1950년대에도 경제성장은 순조롭게 지속됐다. 제5차 5개년계획(1951~1955)은 석탄 · 철강 · 석유 · 기계제조업의 발전과 전기화에 역점을 두었다. 국제적으로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동서대립이 더욱 첨예해지는 가운데 사회주의 진영 내의 내적 통일이 강화됐고, 코메콘을 매개로 한 사회주의 진영 내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것은 당시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경이적인 수치였다.
바이칼 아무르 간선철도를 건설하는 장면
그러나 농업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1950년대 초에야 겨우 전전수준을 회복한 농업은 그 후로도 낮은 성장률을 보이며 경제의 균형성장을 저해했다. 의사결정의 과도한 중앙집중과 지나친 통제, 낮은 농산물 수매가, 투자 부족, 생산동기의 유발 실패 등이 농업의 저성장 요인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성립된 과도체제하에서 흐루시초프가 농업개혁정책을 제시하며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흐루시초프는 농산물 수매가 인상, 수매 할당량 축소, 콜호스에 대한 지원 확대, 농업의 기계화, 계획 · 관리방법 개선 등의 농업정책으로 농업생산의 획기적인 증대를 꾀했다. 대규모 처녀지 개척사업을 펼쳐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알타이 등지에 새로운 농경지도 일구었다. 콜호스 합병정책으로 콜호스 당 경지면적도 늘렸고, 일부는 소프호스로 개조했다. 공업부문에서도 지역별 분권화 정책, 소비재 공업 중시 정책을 펴서 고도성장의 지속과 경제의 균형발전을 꾀했다.
과학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경제의 질적 변화를 뒷받침해주었다. 기초과학과 우주과학을 비롯한 몇몇 응용과학 부문에서 소련은 미국과 어깨를 겨루거나 오히려 앞질렀다.
이런 노력들이 성과를 거두어 1950년대 후반에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서며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공업부문도 이전보다 성장률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고도성장을 유지했다.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 육성되어, 합성물질 · 석유화학제품 ·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련에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경제성장률이 자본주의 진영의 성장률을 크게 앞질렀다. 대체로 선진국이었던 자본주의 진영과 후진국이었던 사회주의 진영,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경제 격차는 점점 좁혀져갔다. 중공업 부문에서는 소련이 미국과 대등해지거나 부분적으로 오히려 앞서기 시작했다. 제3세계권은 물론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소련경제의 문제점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농업의 상대적 저성장은 여전히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했고, 생산재와 소비재 생산의 격차도 1940년을 1:1로 할 때 1960년대 중반에는 2:1로 벌어져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경제를 기획 · 조정하는 계획기구의 부담은 커졌고, 지역 간 · 농공 간 · 산업 간의 이해대립을 해소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돼야만 했다. |
흐루시초프와 새로운 프로그램
평화공존론과 스탈린 비판(1956년)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과 사회주의권에서는 권위의 공백으로 인한 일시적인 동요가 일어났다. 소련에서는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를 정점으로 하는 과도 집단지도체제가 성립됐다. 2급 지도자이던 흐루시초프는 이때 1급 지도자들 간의 상호견제와 양보의 틈을 타고 제1서기의 자리에 올랐다.
신임 수상(각료회의 의장) 말렌코프는 스탈린 시대에 소홀히 했던 소비재 생산 중시와 평화공존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이래 비밀경찰의 책임자였던 내무장관 베리야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그는 억압완화와 법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인기를 끄는 한편, 주요 지도자의 지지자들을 차례로 제거해갔다. 이에 베리야의 야심을 경계한 동료들이 한데 뜻을 모았다. 그는 결국 6월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뒤 연말에 처형됐다.
말렌코프의 인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1955년 2월 그는 '행정상의 경험부족'을 이유로 수상직을 사임했다. 소비재 생산 중시 정책이 난항에 봉착한데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주요 지도자들이 밀려나면서 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가 전면으로 떠올랐다.
흐루시초프는 내전기에 입당한 돈바스의 광부 출신으로, 인민과 함께 호흡할 줄 아는 기질의 소유자였다. 1930년대 말 '대숙청'기에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은인자중하며 숙청의 회오리를 피해갔다. 스탈린 사후인 1953~1954년 흐루시초프는 농업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며 포괄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여 호응을 얻었다. 카자흐스탄 개척 등 그의 농업정책이 하나 둘 실행에 옮겨지고 좋은 결과를 내면서 정부에 대한 당 서기국의 우위가 굳혀져갔고, 그의 입지도 차츰 강화됐다.
1956년 2월, 소련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 제20차 당대회가 열렸다. 흐루시초프는 국제정세에 관한 보고에서 유명한 평화공존론을 제창했다. 거기서 향후 소련외교의 기본방침이 된 다음 세 가지 테제가 제시됐다.
1. 전쟁은 피할 수 있고 또 피해야 한다.
이러한 노선의 변화는 핵전쟁에 의한 인류절멸 위험이 커졌다는 인식과 함께, 사회주의 진영이 대두하고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는 유리한 정세 속에서 세계사의 진보를 낙관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은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의 한 수단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자본주의 철폐를 부정하는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생각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셋째 날에는 대회 전에 흐루시초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다녀온 고참 당 정치국원 미코얀이 '스탈린 개인숭배'를 공공연히 비판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25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흐루시초프가 비밀보고에서 스탈린의 공과 과를 논하면서 스탈린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사회주의의 초기 건설과정, 파시즘에 대한 투쟁, 전후 재건과정에서의 스탈린의 역할이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반면에, 말년에 더욱 강화된 개인숭배, 무오류성의 신화, 독선적인 권력남용 등은 레닌주의 집단지도 원칙으로부터의 일탈이었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부당한 제한, 사회주의 이념의 침해, 근거 없는 억압, 대조국전쟁 시의 오판 등의 폐해가 빚어졌다고 호된 비판이 가해졌다.
흐루시초프는 솔직한 태도로 레닌 말년의 레닌과 스탈린 간의 갈등, 레닌의 '유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대숙청' 시절에 행해진 당원과 당지도자들에 대한 공격,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과 허위자백 등을 상세히 보고했다. 비밀보고는 미국 국무부가 영문으로 전문을 발표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평화공존론과 스탈린 비판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스탈린의 억압정치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이 시작됐고, 억압에 직간접으로 관계했던 사람들이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됐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학문과 창작의 자유 요구가 일기 시작하고, 역사학자들 간에 당과 별도로 스탈린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움직임이 고조됐으나, 그해 가을 위기가 닥치면서 제동이 걸렸다. 국내에서의 '해빙'은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국외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서유럽 국가의 공산당에서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 가능성에 몰입하는 유로코뮤니즘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했고, 소련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유명한 중소 논쟁이 시작됐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은 폴란드와 헝가리였다.
폴란드에서는 반스탈린주의자였던 고물카의 정권이 수립되어 스탈린주의자들이 일소됐다. 소련 지도자들이 급거 폴란드로 날아가 폴란드의 새 지도자들과 회동한 후 새 정권의 정책이 인정됐다.
헝가리에서는 정권을 장악한 골수 스탈린주의자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가운데 1956년 10월 지식인 · 학생 · 노동자들의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헝가리 정부의 요청으로 출동한 소련군에게까지 무력으로 맞섰으나 곧 진압됐다. 소련군의 진압 명분은 '사회주의가 쟁취한 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봉기진압 후 헝가리에는 보다 많은 자유와 민주를 약속한 새 정권이 수립됐다.
국외의 커다란 반응은 국내의 스탈린 비판을 중단시킴과 동시에 당 지도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1957년 초, 스탈린 비판의 기수였던 《역사의 문제들》지는 '레닌적 당성'에서 일탈했다고 매몰찬 비판을 받았다. 당 지도부는 흐루시초프와 미코얀을 한편으로 하고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말렌코프 등을 한편으로 하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스탈린 비판을 통해 더욱 입지를 굳힌 흐루시초프는 개혁 프로그램을 힘있게 밀고 나갔다. 1953년 이래 그가 주창해온 농업개혁정책이 계속 실행에 옮겨졌고, 공업부문에서도 종래의 중앙관청을 대부분 폐지하고 지역별 국민경제회의에 권한을 위임하는 경제관리체제의 개편을 단행했다.
1957년 6월,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경제담당 당간부들과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말렌코프 등이 힘을 합쳐 흐루시초프의 해임을 꾀했다. 이들의 기도는 당간부회에서는 성공했으나, 뒤이어 열린 당 중앙위에서 흐루시초프 파에 밀려 역전당했다. 몰로토프 등은 '반당 그룹'으로 비판받아 해임됐다. 1958년 3월, 흐루시초프는 수상직까지 겸하여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이 무렵인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1961년에는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일약 세계의 저명인사가 됐다. 미사일 개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이어 우주개발에서도 소련이 미국을 따돌리고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힘을 배경으로 흐루시초프는 대미외교에 나섰다. 1959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첫 미소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와 반대로 중국과의 논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1960년 중국은 공공연히 소련을 비판했고, 흐루시초프는 중국 파견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스탈린 비판은 일단 제동이 걸렸으나, 숙청 희생자들의 재심은 계속 진행되어 수백만 명이 수용소 또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많은 사람들이 명예회복됐다.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시 스탈린 비판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다.
1961년에 열린 22차 당대회에서 제2차 스탈린 비판이 행해졌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과 그 일파의 죄를 공공연히 고발했다. 이윽고 대회에서 스탈린의 유해를 붉은광장의 레닌 묘에서 들어낸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대회가 파한 후, 이제 모든 분야에서 스탈린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라게리(강제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흐루시초프의 승인하에 《노비 미르》 지에 실려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제22차 당대회는 그와 더불어, 소련이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에서 전 인민의 이익과 의사를 표현하는 전 인민의 국가로 전화했다고 선언하면서, 1970년까지 모든 부문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1980년까지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쓰는' 공산주의 시대로 진입한다는 의욕적인 당 강령을 채택했다. 국내에서 경제성장이 호조를 보이고 국제적으로도 사회주의 세계체제와 민족해방운동이 폭넓게 발전하고 있던 낙관적인 정세를 반영한 강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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