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탕트와 소련의 외교(1970년대)
1966년 제23차 당대회는 외교정책의 주요과제를 다음 3가지로 정리했다. 1. 세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은 비교적 일관되게 이 과제를 실천에 옮겼다. 서방측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핵전력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공존하는 정책을 택하여 데탕트 시대를 열었다. 사회주의권과는 경제 ·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해가는 데 초점을 두었으나, 한편으로 방향과 정책을 달리하는 국가, 특히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됐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는 서방측과의 평화공존이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했다.
쿠바 위기 때 미국의 강경책에 한 걸음 물러섰던 소련은 이후 핵전력과 해군력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데 힘을 쏟았다. SLBM(잠수함 발사 미사일)의 열세를 ICBM(대륙간 탄도탄)의 증강으로 극복하여 핵미사일의 균형을 이루어냈고, 원양함대를 대폭 증강하여 해군력도 강화했다.
1960년대 말, 미국과 소련은 양국 사이에 핵균형이 거의 이루어졌음을 느꼈다. 이미 지구를 수십 차례 파괴할 수 있을 만큼 핵무기가 축적된 상태에서 더 이상 핵군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인류 공멸을 자초하는 것일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됐다. 지나친 군비증강은 또한 양국의 경제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1969년 전략무기 제한교섭(SALT)이 시작됐고, 1972년 5월 SALT 1이 타결됐다. 교섭과정에서 ICBM의 소련 우위, SLBM의 미국 우위, 양국의 핵균형이 확인됐고, 양국은 ABM(탄도탄 요격 미사일) 기지와 전략무기의 보유 상한선에 합의했다. 조약은 보유 상한선을 높게 책정하고 복수핵탄두(MIRV)와 같은 질적 증강을 방치하여 군비축소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양대국 간의 핵억제체제를 발족시키고 긴장완화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소련의 평화공존과 긴장완화 정책은 유럽의 데탕트 기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 8월 소련은 서독과 조약을 맺었고, 1971년에는 서베를린에 대한 다자 간 협약에 조인했다. 동서독 간에도 1972년 기본조약이 체결되어 공존을 확인했다.
소련의 그로미코 외무장관은 "이제 소련을 제외하고 해결할 수 있는 국제문제는 없다"면서, 핵균형의 확인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 · 서유럽 ·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섰다. 오랜 기간의 냉전이 가시고 동서화해, 데탕트 분위기가 세계를 풍미했다.
동서 간의 긴장완화는 '유럽의 안전과 협력을 위한 헬싱키 회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73년부터 2년간 계속된 협의 끝에, 1975년 유럽 33개국과 미국 · 캐나다 정부가 최종문서에 서명했다. 문서는 국가 간의 평화공존 원칙, 2차대전의 결과로 생겨난 현실, 특히 국경의 불가침성 인정을 확인했다.
7년간의 교섭 끝에 1979년에는 SALT 2가 타결됐다. SALT 2는 다탄두 미사일의 탄두 수까지 제한하는 등 양적 · 질적 규제를 크게 강화한 진일보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출병을 이유로 미국의회가 비준을 거부하면서 소련과 서방국가 사이에는 다시 대결 기운이 고조된다.
소련의 대서방 외교는 전 세계에 동서화해 기류를 고조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나, 사회주의권 내의 외교는 몇 가지 큰 장벽에 부닥쳤다.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이 그 첫 번째 장벽이었다.
1968년 1월 개혁파의 두브체크가 공산당 제1서기에 선출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집중제와 검열제도를 철폐하는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자유로운 사상의 개진이 허용되고 많은 사회단체가 설립되면서 다원화된 사회로의 전환이 예고됐다.
소련에서는 논쟁 끝에 마침내 무력진압으로 방향이 모아졌고, 사태의 확산을 우려한 동유럽 국가들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 그해 8월 20일, 소련과 동유럽 4개국 군대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에 진입하여 자유화 운동을 진압하고 두브체크 정권을 붕괴시켰다. 진압 명분은 '사회주의의 성과 수호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게 부여된 국제적인 의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나라의 사회주의체제가 위협받을 때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은 적극 개입하여 사회주의를 수호할 의무가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그 나라의 주권까지도 잠시 제한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나왔다.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으로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상호 간에 현실을 인정하는 기조가 자리 잡는다. 사건은 오히려 사회주의권 내에서 더 심각한 파장을 일으켰다.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가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서유럽 공산당들도 소련의 무력개입을 주권침해로 규정했다.
가장 호된 비판을 가한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의 외피만 썼을 뿐 서유럽 제국주의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회제국주의'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중소 분쟁은 이제 국경문제로까지 비화되어, 1969년 3월 우수리 강의 다만스키 섬에서 양국 군대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중 · 소 관계는 마침내 적대관계로 변했고, 1970년대에 들어 중국은 그때까지 '세계인민의 적'으로 삼고 있던 미국과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소련을 제1의 적으로 돌렸다. 중국은 이후 미국 · 일본과 국교를 맺고 자본 · 기술제휴를 강화하면서 소련을 포위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은 점점 강화돼갔다. 코메콘을 매개로 한 소련과 동유럽 간의 협조관계는 국가별 분업체제로까지 발전해갔고, 1972년에 쿠바, 이어서 베트남까지도 코메콘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국가 간의 연대를 발전시켰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도 개선되어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1960~1970년대에 미 · 소의 주된 대결장은 제3세계였다. 미국과 소련은 고도의 지원 · 견인 정책을 펴면서 신흥국가들을 하나라도 더 자기 영향하에 두고자 했다. 소련은 동서화해의 기류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원하여 제국주의의 뿌리를 자르고 사회주의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힘썼다.
가장 치열한 싸움터는 베트남이었다. 1964년 미국 전투기의 북폭 개시로 재개된 베트남 전쟁에서 소련은 당시 반목하고 있던 중국과 함께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미국은 '더러운 전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남베트남의 반민중적 정권을 지원하며 전쟁을 계속 끌었으나 1973년 결국 베트남 인민에게 밀려 철수했다. 1975년 베트남에는 통일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1975년 오랜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1967년과 1973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에 벌어진 중동전쟁에서 소련은 아랍국가들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아랍국가들의 민족주의가 강화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석유독점체제가 흔들렸다.
1975~1977년에는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에티오피아 민족혁명세력을 지원하여 친소 정권을 수립했다. 이 무렵,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두 나라 외에도 베냉, 기니비사우, 브라자빌 콩고, 리비아, 모잠비크, 아프가니스탄, 남예멘, 이란 등지에서 반제국주의 정부가 수립되고 더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 전통적인 식민주의의 기반이 무너진다.
그 파장은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밀려왔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인민운동과 군부의 협력하에 파시스트 정권이 타도됐고, 1970년에는 칠레에서 선거를 통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됐으며, 1979년에는 니카라과에서 반제 혁명이 일어나 산디니스타 정권이 수립됐다. 그러나 모두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인해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0년대 말엽, 소련은 미 · 중 · 일 3개국의 제휴에 위기감을 느껴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했다. 1979년 반혁명게릴라에 시달리던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부가 파병을 요청해오자 소련은 치밀한 고려 없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런데 반정부 게릴라가 처방세계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소련은 끝없는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대미 · 대서방 관계는 다시 악화됐고, 서방측은 소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경제사정은 눈에 띄게 악화돼갔고, 해외의 반체제 인사들은 대정부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1970년대를 통해 사회주의 세계체제는 크게 약진했으나, 그 중심인 소련은 차츰 위기전야로 치달아갔다. |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
사하로프, 노벨 평화상 수상(1975년)
어느 사회에나 비판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생각과 경험 역시 모두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세력들은 사회의 정체와 부패를 막고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사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반사회적 대중운동을 부추기는 등 부정적인 역할도 한다. 평가의 척도는 그들의 행동이 사회의 진보에 부합하느냐 역행하느냐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뒤, 모든 종류의 착취를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숭고하고도 지난한 이상을 추구하는 소련사회에서, 그 목표와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이견이 표출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체제대결을 벌이면서 때로는 말로, 때로는 무력으로 서로 자기를 관철하려 들려는 속에서, 두 체제는 자연히 상호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파급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반체제 운동은 물론, 혁명 직후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혁명 직후의 내전을 거치며 반혁명 세력은 거의 제거되거나 망명했고, 남은 적대세력은 이후 스탈린 시대에 가혹하게 처형 또는 추방되거나, 강제수용되어 노동을 통해 교정을 받는 운명을 겪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적대세력이 아닌 정치적 반대자와 양민들까지도 무더기로 피해를 당한 사례가 많았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수백만의 억울한 피해자가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 명예회복됐고, 사회 일각에서 스탈린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사태의 악화를 우려한 정부의 태도변화로 1차 제동이 걸렸다. 그 후 1961년 제2차 스탈린 비판은 막힌 출구를 뚫어놓는 구실을 하여, 일단의 지식인들이 철저한 스탈린 비판과 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타자기로 찍어서 유포하거나(사미즈다트), 광장에서 낭독집회를 열고, 해외에서 출판하기도 했다(타미즈다트).
그러나 흐루시초프를 실각시키고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부가 다시 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스탈린 시대에 성장해온 브레즈네프 정부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의 비판이 불러올 폐해를 우려하여 역사의 재고찰을 봉쇄했다.
1966년 2월 '반소련 선전' 내용이 담긴 자신의 작품을 해외출판한 작가 다니엘과 시냐프스키의 재판을 시작으로 1968년 1월까지 세 차례의 재판이 열리면서 공개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의 탄압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유죄판결을 비판, 항의하고 감형탄원에 참여했다.
1968년 여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을 계기로 억압은 더욱 강화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진압에 항의하는 붉은광장의 5인 시위자에게는 4~5년형이 선고됐다. 정부는 체제비판을 억제하는 한편으로, 개인적인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체제를 문제 삼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는 것은 억압을 받았으나, 사생활에서는 금지된 간행물을 읽는 것도 용인됐다.
비판세력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지식인들의 태반은 체제 내로 복귀했으나, 이들 사이에서는 '공식적인 입장'과 '속마음'을 각각 달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견해를 타이핑, 복사하여 사미즈다트(지하출판물)로 널리 유포시키며 저항을 계속한 사람들이 이론파(異論派)다. 사미즈다트는 해외에서 출판되어 다시 역수입되곤 했다. 1970년대 초의 대표적인 해외출판물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와 메드베데프의 〈역사의 심판에 부쳐〉다. 이론파 운동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정권타도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반대운동은 아니었고, 지도층의 권위주의적 지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합리성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개량운동이었다. 운동은 체제 개선, 체제 민주화, 이데올로기 정화, 인권운동 등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다.
이론파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물리학자 사하로프는 지하출판물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에서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정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개선할 수 있다는 온건한 주장을 폈다. 그에 반해 아말리크는 구조적 병리의 시정 가능성조차 의심한 과격파였다. R.메드베데프는 민주개혁에 기대를 거는 공산주의자인 반면에, 솔제니친은 정교신앙에 기울어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회의를 품었다(솔제니친은 망명 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소련 비난의 선봉에 선다). 시냐프스키는 이념과 리더십의 쇄신을 통한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회복을 주장한 반면에, 카피차는 과학과 경제의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1970년대 초 이론파, 즉 반체제 지식인들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강화해나갔고, 정부는 새로운 억압책으로서 반체제 인사들의 출국을 허용하고 대신 시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에 따라 솔제니친을 비롯해 첼로 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 작가 보이노비치, 악쇼노프, 시냐프스키, 생물학자 J.메드베데프 등, 체제비판적인 이론파들이 잇따라 국외로 출국 또는 추방됐다. 해외이주를 희망하던 유태인의 출국도 용인되어 1973년까지 13만 명이 출국했다.
그로 인해 반체제 경향이 뚜렷한 이론파는 거의 망명자가 됐고, 이들 출국자와 이들이 낸 출판물들을 통해 소련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소련의 대외적 위신이 적잖이 실추됐다. 특히 망명자들은 해외에서 반소 신문 · 잡지와 서적을 활발하게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반소련 운동을 북돋우는 한편, 국내로도 출판물을 대량 유입시켜 국내의 반체제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에 남아 있던 비교적 온건한 체제비판 인사들은 합법단체를 조직, 합리적인 정책개발을 자극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단체들에는 야키르 등의 '인권옹호 그룹', 사하로프가 이끄는 '인권위원회', 투르친 등의 '앰네스티 국제 그룹', 오를료프 등의 '헬싱키 모니터 그룹' 등이 있었다.
1975년,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반체제 지식인들의 기둥이자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인권운동가 사하로프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됐다. 당시 사하로프는 사회주의의 개량 차원을 넘어서서 자유주의 성향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에 서방측의 편파적인 시각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반 사하로프 캠페인이 벌어졌다. 사하로프는 그 뒤에도 소련정부의 묵인하에 인권운동을 계속하다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출병을 비판한 뒤 1980년 1월 고리키 시에 행정유형됐다.
그 뒤로도 이론파 운동은 미미하게 계속되다가 1982년 '헬싱키 모니터 그룹'의 해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몇몇 연구소의 개혁 성향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경제개혁 주장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1980년대 중엽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개혁운동과 함께 체제비판운동이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고, 체제 내 개혁을 요구해온 사하로프, R.메드베데프 등의 지도자는 개혁파의 중추로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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