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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아프리카 역사 I ] - 고대왕국의 형성

구름위 2014. 9. 1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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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왕국의 형성

 

3.1 북부 아프리카

이 지역에서는 역사적 발전, 고대 문명, 그리고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지역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풍부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쿠시(Cush), 악숨의 역사는 매우 길어서 세계 문명의 가장 영속적인 유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지역에서 성취한 것에 대한 해석이 얼마간은 다른 인종의 기여, 보편적인 철학 사상의 토대, 서구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과 같은 문제에 대한 커다란 역사적 논쟁의 일부분이 되었다. 최근 일부 논쟁에서는 아프리카 중심의 신흥 정치사상을 정의하고 있는데, 현대 문명의 뿌리가 고대 흑인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흑인으로부터 파생된 많은 사상들이 이집트와 그리스와 같은 고대 문명의 형성과 발달에서 인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집트 왕국 : 5500여년전 나일강 유역의 농업국가. 신이 왕으로 현신하였다고 믿는 절대권력을 가진 파라오(Pharaoh)가 지배, 남쪽의 누비아족과 교역 및 접촉을 하였다. 이집트는 곡물과 금을 수출했고, 흑단, 상아, 목재, 마차용 말, 타조깃털, 보석, 금속, 향료를 포함하여 많은 상품을 수출했다. 통치 형태와 경제 이외에도 고대 이집트는 상형문자, 수학, 천문학의 발달과 같은 성취로 주목 받았고, 건축, 예술, 의약, 종교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도 관광객들은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기념비, 보석, 토기, 그리고 다른 건축물에 압도당한다.

 

☞ 노크(Nok) 문화 :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식민자와 교역가들에 의해 철기 기술이 북부 아프리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서부 아프리카의 민족들 사이에 철기 기술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만들었던 커다란 테라코타 머리로 유명한 나이지리아의 초기 철기시대 노크(Nok) 문화가 이와 관련된다.

☞ 쿠쉬(Kush) 왕국 : 누비아인이 세운 쿠쉬는 2,700~2,800년 전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국가로, 이 나라의 역사는 이집트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쿠쉬의 왕은 사실상 기원전 700~500년 경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2,500여년 전 이집트에서 쫓겨난 쿠쉬의 지도자들은 점점 더 남하하여 거대한 철기 산업이 번성했던 메로에(Meroe) 지역에 이르렀다. 누비아인들은 메로에 언어와 문자, 새로운 신들과 사당, 새로운 예술형태와 피라미드와 같이 지역문화 특성들을 변화시키면서 이집트의 여러 가지 관습을 퍼뜨릴 수 있었다. 또한 메로에는 목재와 철이 풍부한 지역으로 훌륭한 건축과 방어물을 축조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멀리 떨어진 지역과의 원거리 무역에 참여하였다.

 

아직까지도 쿠시가 번성하게된 이유, 이 나라의 정치적 지배의 범위, 야금술의 보급에 대해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메로에를 계승한 국가들은 기독교 시대의 처음 수백년간 왕실의 신앙으로서 악숨에서 기원한 콥트 기독신앙(Coptic Christianity, 그리스도 단성설을 신봉하는 교회로 이집트 그리스도교의 일파-역자주)을 믿었다.

 

☞ 악숨(Axum) 왕국 : 에티오피아의 고대도시로 시바의 여왕이 살았으며 모세의 십계명 원판이 보존되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약 2천년 전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악숨(Axum)이 세워져 쿠시왕국과 맞섰다. 악숨을 세운 사람들은 2,100년 전 쯤 남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와서 나중에 지금의 에티오피아와 동부 수단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해 나갔다. 2,000년 전 그들은 홍해(紅海)에 접한 항구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아프리카 내륙의 코끼리 상아, 금, 향신료를 사러 온 상인들과 교역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400년 후 악숨의 지배자는 기독교도가 되었고, 에티오피아 고원의 중부와 남부에 세워진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을 지배하고자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암하릭(Amharic)어를 말하는 사람들인 이 국가의 지도자들은 700여년 전 에티오피아 고원의 중북부 지방에서 오래 전에 패망한 악숨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이 국가는 계속 증가하는 토지소유자 계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고, 500~600년 전에 번영을 구가한 후 사라졌으며, 18세기에 다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3.2 서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의 왕국

기원전 5,000-2,000년, 사하라 지역이 지속적으로 건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작자나 목축 집단들은 어쩔 수 없이 혹독한 조건으로부터 도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사막의 남쪽 가장자리 아래 서부 아프리카의 수단 초원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 중심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서부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의 국가들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국가 카르타고(현재 튀니지)가 로마인들에게 침공당한 이후에 형성되었다. 이 도시국가는 2,500년에서 2,800년 전 사이 베르베르(Berber)족과 손잡고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과 사하라 사막 통과 무역을 활발히 수행했다.

 

수단의 이주자들에 의해 도입된 식량 생산 혁명이 빠른 인구 증가, 비농업 전문화의 발달과 도시화의 시작을 촉발시키면서 이러한 과정이 수단 지역에서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농업 주기를 전체적으로 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의 중앙집권화가 출현했을 것이다. 식량 생산 혁명이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수단 서부 중앙의 두 집단, 즉 나이저강 상류의 만데(Mande)어 사용자들과 차드호(Lake Chad) 남부와 서부의 건조로 남쪽으로 이동해온 카누리(Kanuric)어 사용자들이 지배적인 경작자가 되었다. 이러한 집단들과 다른 집단의 식량 생산자들이 사상과 기술, 기본적인 도시화, 그리고 넓은 지역에 걸친 중앙집권적 정부의 시작을 전달한 것처럼 보인다.

 

수단의 인구는 초목이 자라고 물이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아 들어온 사하라 목축인들에 의해 더욱 많아졌음에 틀림없다. 수단 공동체의 발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철기 기술의 도입이었다. 기원전 3세기경 나이지리아 중부에서 번창한 노크(Nok) 문명의 대장장이들은 금속을 녹여 도구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기술은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 서부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수단 서부 지역 국가들의 성장을 자극한 또 다른 요인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 즉 부분적으로 사하라 횡단 무역에 기반한 경제였다. 서기 1세기말에는 대규모 낙타 대상들이 사하라를 건너 남쪽의 서부 아프리카 적도 숲에서 채굴한 금과 교환하기 위해 북부에서 수집한 소금을 운반하였다. 서기 1,000년 이전에 노크 및 다른 사회들은 철기 기술을 이용하여 사냥과 농업의 효율성을 높였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커다란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수단의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크건 작건 매우 유사한 정치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통치자들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중요한 종교적 기능을 맡았다. 그리고 그들의 개인 활력은 국가의 복지 그 자체와 밀접하게 일치했다. 그들은 화려한 왕궁을 유지하고 각료로 활동했던 국가의 고위 공직자들을 임명했다. 많은 경우에 왕족 이외에 세습 관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의 봉건 구조에서 매우 일반적인 기능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봉신 왕국에 대한 통치를 행사하는 정도까지는 "제국"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러한 국가들의 대부분은 느슨한 제국적 구조를 유지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봉신 국가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 가나(Ghana) 왕국 : 5세기경에 세워진 수단의 첫 번째 국가로 11세기에 쇠락. 1,1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무역상들은 테크루르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가나(Ghana)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수도(首都)였던 쿰비 살레(Kumbi Saleh)와 왈라타(Walata)의 위치는 경작지의 북쪽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는 남부 모리타니아(Mauritania)였는데, 이곳은 이 도시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가나의 소닌케(Soninke)족 거주자들은 모든 방향으로 봉신 국가(封臣國家, vassal state)들을 지배하는 강력하고 복잡한 왕국을 형성하였다.

 

가나는 사막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전략적 이점을 누리며 중간 상인으로서 사하라를 사이에 두고 행해진 금, 소금, 상아, 구리, 노예 같은 사하라 횡단무역 대상행렬이 구성되고 준비를 하는 활동무대였기 때문에 북부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의 자원 교역이 부흥함에 따라 번성하였다. 가나의 왕들은 그들의 통치 아래에 있는 영토 전체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잘 무장된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군대를 거느렸다.

 

☞ 말리(Mali) 왕국 : 11세기에 발흥하여 15세기 초에 멸망. 처음에는 나이저강 상류에 살면서 만데(Mande)어를 말하는 집단인 말리(Mali) 왕국이 무역과 권력을 독점했다. 구비(口碑)로 전승된 바에 따르면, 말리 왕국은 1230~1235년 사이 순디아타 케이타(Sundiata Keita)가 세운 나라로,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농부들로부터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금과 다른 물품들을 이용하여 사막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인 소금과 다른 무슬림 세계의 일용품들을 교환하였다. 말리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사 무사(Mansa Musa)는 많은 부를 축적해 1324년 메카로 아주 화려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칭송받기도 했다. 1468년까지 지속된 말리의 세력은 나이저강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손니(Sonni)왕 휘하의 송가이(Songhai) 왕국으로 넘어갔다.

 

☞ 송가이(Songhai) 왕국 : 송가이 왕국의 지도자들은 커누 군대를 이용하여 강을 지배했는데, 1591년 4월 톤디비(Tondibi) 전투에서 모로코 침략자들에 의해 이미 쇠락하던 왕조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팀북투(Timbuktu), 제네(Djenne), 가오(Gao)와 같은 지역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 베닌(Benin) 왕국 : 12세기경 나이지리아에서 베닌 왕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 왕국의 중심지는 15세기 후반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방문하기 전까지 매우 크고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를 발달시켰다. 베닌 왕국은 주로 무역을 통제하며 수세기 동안 번성하였고, 또한 왕실에서 황동과 청동 주물의 왁스 제거 주조법(Lost-wax casting)과 상아 조각이라는 잘 알려진 전통을 발달시켰다.

 

☞ 카넴(Kanem)과 보르누(Bornu) 왕국 : 현재 차드(Chad)공화국 주변의 사막 인근에 세워진 카넴왕국은 가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세워졌으며 수세기 동안 중계무역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카넴 왕국의 지도자들은 북부아프리카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또한 1,500년 전 쯤에는 서남아시아와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500년도 더 지난 아랍의 자료들을 보면 오늘날 나이지리아 북부 차드(Chad) 호수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보르누(Bornu)라고 불린 강력한 계승국가가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숫자가 고정된 경작자들에 대한 지배가 확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보르누의 지배층은 거대한 무역중심의 국가를 유지할만한 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석과 구리 자원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 하우사(Hausa)족의 도시국가들 : 400여년 전까지 서부아프리카의 사바나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들은 보르누 서쪽의 하우사족이 세운 도시국가들이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발흥한 지역은 높은 지하수면과 많은 강과 계곡이 있어서 1년 단위의 관계농업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식량공급이 넉넉해서 예외적으로 조밀한 인구가 모여 살게 되어 1천여년 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거지와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일용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

 

도시국가 중 하나로, 말리(Mali) 왕국에서 온 이슬람화된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카노(Kano) 왕국은 500~600여년 전 쯤 매우 강력한 왕권을 갖게 되었다. 고비스(Gobir)와 카치나(Katsina), 보르누(Bornu)와 같은 또 다른 하우사(Hausa)족 국가들은 카노(Kano)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또 철광(鐵鑛), 숯을 생산할 수 있는 숲, 콜라 넛(kola nut) 무역, 남쪽에서 잡혀온 노예들, 풍부한 염색직물과 가죽제품들이 있어 실질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인 무역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산테(Asante) 왕국 : 1,680년 오늘날 가나가 된 아산테 왕국이 세력을 키워 아산테 왕 오세이 투투(Osei Tutu)와 그의 신하이자 사제였던 오콘포 아노키에(Okonfo Anokye)는 세 개의 작은 국가를 강제로 병합하여 아칸(Akan)어를 말하는 부족이 지배하는 연방국가를 만들었다. 아산테가 부흥했던 요인은 가나 중부의 금광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노예 무역과 관련하여 군사력을 키웠고, 또 무역을 통해 총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아산테는 해안을 통한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 오요(Oyo)왕국과 다호메이(Dahomey) 왕국 :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주요종족인 요루바족의 오요 왕국은 광활한 지역을 경비하는 기마병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과 위다(Whydah), 포르토 노보(Porto Novo), 바다그리(Badagry) 같은 항구에 있는 다른 무역상들이 점점 더 많은 노예를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730년, 오요(Oyo) 왕국의 속국인 다호메이(Dahomey)가 아가자(Agaja)왕 시절부터 노예매매권을 갖게 된 이래 19세기 말 노예무역이 쇠퇴할 때까지 바다로 향하는 주요 통로들을 장악했다. 그 후 오요 왕국은 북쪽에서 무슬림 왕국인 소코토(Sokoto)가 발호하고 남쪽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요루바(Yoruba)의 속국들이 힘을 갖춘 채 독립하자 멸망해 버렸다


3.3 동부 및 중부 아프리카의 왕국

흔히 남부 아(亞)대륙(subcontinent)이라 불리는 반투 아프리카(Bantu Africa)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문화의 개막을 촉진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가장 성공적인 예이다. 여기서는 적도 남부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이 반투족 언어들과 밀접히 관련된 어떤 언어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과정을 조사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는 풍요롭고 매우 다양한 "반투 아프리카" 문명의 발달을 이끈 중요한 문화적 상호작용이 함축되어 있다. "반투"는 하나의 언어나 민족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가계가 "원형 반투(proto-Bantu)"어로 거슬러 올라가는 종족의 450개 이상의 언어 집합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은투(ntu)'라는 단어는 "사람"을 의미한다. 반투 기원과 이주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은 언어 재구성으로부터 파생되었고 때로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지했다.

 

☞ 부간다(Buganda) 왕국 : 700여년 전 경, 동부아프리카의 거대한 호수 지역에서 국가 형성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국가들은 대부분 소금, 소, 철의 경제적 중요성과 기름진 농토와 바나나와 같은 식량이 있음으로써 거주가 가능하다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탄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거대한 호수들 주변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조상들은 남쪽에서도 왔고, 서쪽, 동쪽, 북쪽에서도 왔음이 분명하다.

 

쿠시테(Kushite)어, 나일로틱(Nilotic)어 그리고 반투(Bantu)어를 사용하는 조상들의 후손인 지배자들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을 비롯해 다양한 요소를 동원해 힘을 기르고 중앙집권적 왕국을 세웠다. 빅토리아 냔자(Victoria Nyanza) 호수 북서쪽의 기름진 평원을 차지하고 있던 부간다(Buganda) 같은 국가가 전형적인 예이다. 18~19세기에는 부간다(Buganda)의 지배자였던 카바카(Kabaka)가 간다(Ganda) 혈족의 특권을 점차적으로 양도받아 현재의 우간다(Uganda) 지역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바나나의 충분한 공급 외에도 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은 수공예 제품의 활발한 무역이었다.

 

☞ 콩고(Kongo) 왕국 : 콩고강 어귀에 15세기말 포르투갈인들이 최초로 도착했을 때, 은징가 은쿠우 (Nzinga Nkuwu)가 다스리고 있었던 이 왕국은 이미 수 세대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다. 1506년 은징가 은쿠우의 아들인 알폰소(Affonso)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형을 축출한 후 이 왕국의 마니콩코(manicongo; '지배자'라는 뜻)가 되었다. 알폰소가 즉위한 후부터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권력 대부분이 지역의 종교적 가치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의 개종으로 이러한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선교사들과 노예 무역상 같은 포르투갈인들의 커다란 영향력은 이러한 권력 기반을 더욱 훼손했다.

 

☞ 루바(Luba)와 로지(Lozi)왕국 : 소금 및 철광의 원거리무역으로 내륙분지에서 중앙집권 정치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현재 콩고(Congo)의 샤바(Shaba) 지역에서 1400년대 초반 사냥영웅인 이룽가 칼랄라(Ilunga Kalala)가 루바(Luba)족을 기반으로 왕조를 세웠다. 지금은 콩고 공화국과 잠비아와 앙골라가 위치한 지역에 세워진 사바나 남쪽의 다른 국가들은 루바(Luba)족과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합쳐 지배혈족으로서의 우월함을 내세웠다. 잠비아(Zambia)의 서쪽, 잠베지(Zambezi)강의 범람원 위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19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통일을 이룬 로지(Lozi)라는 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 스와힐리(Swahili) 왕국 :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외부 세력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가들 중 동부아프리카 연안에 자리잡은 무역국가들이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역중계항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연안어업도시에서 출발하여 내륙의 농경 부족들과 관계를 맺고 기원 후 100년 경 이미 그리스-로마 세계와 접촉을 하게 된다. 9세기 경부터 시작하여 이곳의 도시국가들은 인도양 연안의 이슬람 문화와 코끼리 상아, 금, 노예무역으로 유지되던 아프리카의 정치체제와 맞물려 성장하고 쇠퇴했다.

 

서기 1천년 무렵에는 이런 아프리카의 도시국가들은 모가디슈(Mogadishu; 현재의 소말리아)부터 소팔라(Sofala; 현재의 모잠비크)에 이르기까지 국제해상무역에 깊이 관여했다. 탄자니아 남부에 위치한 킬와(Kilwa) 같은 국가는 쇼나(Shona)가 지배한 짐바브웨의 금광을 기반으로 중국, 인도 그리고 다른 이슬람 세계와 광범위하게 무역을 했다. 이러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한 해상무역 사회는 아랍과 페르시아의 이민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근본으로 삼은 독특한 스와힐리(Swahili) 문화를 발달시켰다.


3.4 남부 아프리카 왕국

남부 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국가들은 상당히 늦게, 그리고 약간 다른 방식으로 발달했다. 개척적인 농업전문가들과 목축업자들이 침투해 들어갔던 마지막 지역들 중 하나인 이 지역의 많은 부분에서는, 훨씬 비옥한 중앙아프리카 초원에서처럼 생태학적 조건이 인구 집단의 급격한 증가를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계절 이동 목축이 북쪽에서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까지는 이러한 지역에서는 흩어져서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주가 지역화된 인구 통계학적 압력을 완화해줄 여지는 항상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치적 과정이 제국적 융합보다는 분열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고, 지배적인 정치구조는 작은 독립 추장국의 정치구조와 닮은 꼴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적어도 이 지역의 많은 부분에서 인구 압박이 커지기 시작했다. 남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또 다른 이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남부 끝부분에 정착한 17세기 네덜란드 이주자의 후손으로 토지 소유욕이 강한 트랙보어(trekboer)인들의 이주였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 :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는 다양하고 복잡한 고고학적 유물이 남아있는 국가로서 800여년 전에 세워진 왕국이다. 이곳에는 짐바브웨(Zimbabwe, 위대한 집)라 불리는 굉장한 석조 건축물 유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현재 쇼나(Shona)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상들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아마도 잠베지(Zambezi)강에서 림포포(Limpopo)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황제를 위한 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인도양 무역망과 연관을 갖고 있었으며 부유한 금세공 지역을 에워싸고 있었다.

 

황금교역의 활성화와 중국과 아시아에서 토기나 유리와 같은 상품을 수입함으로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의 많은 석조건물 중심지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나라의 복잡한 석조 건축물은 이곳의 정교한 경제적 정치적 체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경제, 정치적 체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비(口碑)와 초기 포르투갈 방문객들이 직접 기술한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에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원래의 쇼나(Shona)국은 인도양 무역상들이 잠베지강 계곡에 살고 있던 새로운 아프리카 무역 중계상을 찾아간 후 두 집단간의 전쟁으로 인해 멸망했지만, 1,420년 경에 쇼나(Shona) 북부의 냐심베 무토타(Nyatsimbe Mutota)에 계승국가가 세워졌는데, 이 나라는 무웨네 무타파(Mwene Mutapa)/모노모타파(Monomotapa)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 줄루(Zulu) 왕국 : 남부아프리카에서 발호했던 줄루왕국의 영향력은 아주 멀리 말라위(Malawi)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정도였다. 줄루족의 남부아프리카에서의 건국 과정은 수천명의 이주와 정복을 강요하는 전쟁과 동요의 시기인 음페카네(Mfecane)와 함께 시작되었다. 음페카네(Mfecane)란 줄루족 언어로 '부서지고 깨지는 시기(the era of the crushing or breaking)'/'고난의 시기(Time of troubles)'라는 뜻인데, 남부아프리카에 백인 거주지가 계속 확장되었던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줄루 왕국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인구의 증가, 노예 및 상아 같은 물품의 원거리 무역, 수백년 전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옥수수의 유입 등과 같은 좀 더 깊은 변화의 결과였을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지도자가 샤카(Shaka)였다. 그는 국지전을 수행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향상시켜 1819년에서 1828년 사이에 매우 효율적으로 권력을 강화하여 군사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주와 정복이 있었고, 남부아프리카 전역에도 많은 왕국이 세워졌다. 이 특별한 인물은 매우 효율적으로 군대를 훈련시켰고 신속하게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현존하는 체제를 변환시켜 자신이 지배할 수 있었던 각 혈족을 망라하여 나이별로 집단을 구성(Age-grade system)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처럼 혁명적인 사회 체제를 구성한 덕분에 그는 젊은이들의 집단을 모두 이끌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여성들은 식량을 생산하여 그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줄루족이 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줄루족에게 영토를 빼앗긴 다른 부족들은 남부아프리카의 내륙초원이나 지금의 짐바브웨,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 탄자니아가 세워진 더 먼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했다. 오늘날 레소토(Lesotho)가 된 소토(Sotho) 왕국과 오늘날의 짐바브웨가 된 은데벨레(Ndebele) 왕국은 모두 음페카네(Mfecane)의 결과로 생겨난 왕국이었다

출처 : 올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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