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을 탐험한 사람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발보아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파나마의 다리엔 지협을 통과하여 태평양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파나마운하의 태평양 쪽 항구인 발보아 항이 바로 그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발보아는 1500년에 스페인의 탐험대에 참가하여 콜롬비아 연안을 탐험하고 산토도밍고에 정착했으나, 빚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파나마의 다리엔 지역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당시 다리엔 지역의 총독이었던 콜럼버스의 장남 디에고 콜럼버스는 발보아를 다리엔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발보아는 한 원주민의 부족장에게서 "남쪽 바다에는 금으로 접시를 만들고 심지어 돛과 노까지도 황금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종족이 살고 있다"라는 정보를 얻었다. 여기에서 남쪽 바다는 태평양이며, 황금의 나라는 잉카제국이었다. 발보아는 스페인 왕실에 '자신이 곧 황금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위해 1,000명의 군사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스페인 왕실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발보아는 독자적으로 다리엔 지협을 지나 태평양(발보아는 원주민의 말에 따라 태평양을 '남쪽 바다'라고 명명했다) 해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원주민에게 진주와 황금조각을 얻었고, 황금의 나라인 '비루(Biru, 지금의 '페루(Perú)'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원주민의 공격으로 다시 다리엔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총독인 다비야와 이미 파나마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쌓았던 발보아 사이에 갈등이 극심했다. 이에 발보아는 다비야가 사법권과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는 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는, 원정대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탐험에 나섰다. 한편 스페인 본국에서는 다비야가 식민지 통치에 부적절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곧 새로운 총독이 임명되어 다비야의 행적을 조사할 것이라는 소식이 다리엔 식민지에도 전해졌다. 이에 다비야는 자신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발보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발보아를 체포하여, 반역죄와 원주민 학대죄 등의 죄목으로 그의 동료 4명과 함께 처형했다. 이로써 태평양을 최초로 목격한 발보아는 한동안 파나마 지역을 함께 통치했던 다비야의 손에 죽고 말았다.
마젤란
마젤란은 1480년경에 포르투갈의 북부 오포르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알부케르케의 지휘 아래 몰루카 제도를 왕복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1513년에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가 모로코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조직한 정벌대에 참여해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마젤란은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의 세비야로 이주했다. 마젤란은 서쪽 항로를 따라 인도에 도달하려는 자신의 탐험계획을 스페인 왕실에 제출하여 왕실의 후원을 약속받았다. 드디어 마젤란은 1519년 9월 20일, 스페인 왕실의 후원 아래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선단은 5척의 배와 265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었다. 대서양 상의 카나리아 군도를 거쳐, 같은 해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해 한 달간의 휴식을 취했다. 마젤란의 함대는 다시 항해를 시작하다가 광활한 평지 위에 우뚝 솟은 구릉지에 도착했는데, 이 구릉을 '몬테 비디(Monte Vidi, 멀리 보이는 산)'라 명명했다(이곳이 현재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다). 마젤란은 이곳에서 대양으로 나가는 수로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라플라타 강을 정찰했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탐험대원의 일부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젤란은 후안 세바스티안 델 카노1)를 시켜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반란을 진압한 마젤란 함대는 1520년 10월 21일, 마침내 대양으로 나가는 해협을 만났다. 마젤란 함대는 이곳 해협을 통과하는 데 36일이나 걸릴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악천후로 고생한 마젤란해협에 비해서 해협을 빠져나오고 나서 만난 바다는 잔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젤란은 이를 보고 '잔잔한 바다'라는 의미를 지닌 '태평양(太平洋, el Pacífico)'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마젤란의 함대는 장장 98일 동안 태평양을 횡단해서 라드론 섬(라드론(ladrón)은 '도둑'이라는 의미)에 도착했다. 이는 마젤란 함대가 태평양을 횡단해 처음으로 도착한 섬이었는데, 이곳 원주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갑판으로 올라와 이것저것을 뜯어갔고, 심지어 보트까지 가지고 가버린 데서 마젤란이 '도둑의 섬'이라 명명한 것이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괌이다.
마젤란 함대는 일주일 뒤에 필리핀 제도2)의 사마르 섬을 거쳐 세부 섬에 도착했다. 마젤란 함대는 이곳 세부 섬의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있던 막탄 섬은 오래전부터 세부 섬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마젤란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세부 섬을 돕기 위해 부하 60명을 이끌고 막탄 섬 정복에 나섰으나 1,500명이나 되는 막탄섬 원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 후 남은 원정대원들은 인도양을 횡단하여 희망봉을 돌아서 1522년 9월 6일에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 귀환했다. 이는 만 3년에서 12일이 모자라는 기간이었다. 이때 귀환한 사람은 겨우 18명이었다.
"마젤란해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라는 입간판 버스를 싣고 마젤란해협을 건너는 페리호
카베사 데 바카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해인 1492년에 스페인 남부 헤레스의 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세계에서 흘러들어 온 많은 보물과 정복전쟁에 관한 소문을 들으며 자랐다.
그 후 새로 발견한 지역들을 정복하고 통치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총독이 1527년에 스페인을 출발했다. 5척의 범선과 600명의 병사, 그리고 귀족 출신의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1527년 산루카스 항을 출발했다. 바카는 이 원정대의 재무 담당으로 합류했다. 그는 나르바에스와 함께 플로리다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이들과 함께 플로리다 반도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텍사스, 콜로라도, 뉴멕시코, 애리조나 지역을 걸어서 이동해 멕시코시티까지 갔다. 걸어서 미국대륙을 횡단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의사는 아니었지만 군인이었기 때문에 원주민에게 전장에서 경험했던 응급조치들을 해주면서 그들과 친분을 돈독히 했다. 아울러 굶주림과 고통을 겪으면서 미국대륙을 횡단했음에도 심오한 관찰과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아메리카 대륙의 생태, 원주민의 관습들을 섬세하게 글로 옮겼다. 카베사 데 바카는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동료 3명과 함께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카베사 데 바카는 당시의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스페인 왕에게 전했다. 이에 스페인 왕은 그를 남아메리카 동남부에 위치한 리오데라플라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평화로운 정복방식에 협조하는 원주민들과 적극적인 연대를 맺는 한편, 자기에게 협조했던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또 다른 원주민들을 응징했다. 이러한 통치방식은 자연히 원주민들 사이의 분쟁에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베사 데 바카의 통치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1545년에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압송된 뒤 관직에서의 부정행위로 유죄를 선고받고 아프리카로 추방되었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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